인천에는 녹지도 쉼터도 별로 없습니다. 섬들을 제외한다면
산다운 산은 어쩌면 계양산 하나 뿐.
인천의 진산이라고 하지요.
불행히도 이 계양산의 일부가 롯데 신격호 회장 사유지입니다.
(일제가 끝나고 일본인들 물러갈 때 적산으로 나온 걸 주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툭하면 롯데에서 계양산을 개발하려고 하는데요,
십년 째 계양산에 골프장을 짓겠다고 지x를 하고 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만, 십년입니다. 골프장 짓겠다 해서
인천 시민들이 우우우 반발하면 좀 물러갔다가
몇년후 다시 나오고 또 물러갔다 나오고
이러고 있는 거죠.
계양산 골프장 문제는 인천 바깥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환경운동가들이 계양산 소나무 위에서 200여 일간 살면서
엮은 싸움의 기록이 최근 책으로 나오기도 했는데요.
'솔숲에서 띄운 편지’ (알라딘 링크) ..자칫하면 글이 길어지겠군요.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딱히 활동하는 건 없지만
어머니 덕분에 이쪽 일을 어깨 너머로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어머니가 릴레이 단식농성에 참여하셔서 저도 도우미 격으로 따라갔습니다.
릴레이 일인 시위같은 거였죠.
산중턱 하느재 고개에 자리를 펴고
지나가는 산행객들에게 서명도 받고 농성을 하는데-
아, 저는 그날 약간 우울한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서명을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하시는지.
"하긴 하는데 이런다고 뭐가 되겠어요?"
"전에도 ### 서명했는데 결국 안되더라구요."
"돈있는 놈들이 하겠다고 하면 못 막아."
촛불 외의 어떤 사회적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예전에는 거리에 종종 나온 편이었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런 말들을
'서명하는 이들에게서' 이렇게 많이 듣지 않았어요.
- 요 몇년 사이에 냉소주의가 정말 확산되었구나.
혼자 있었다면 저는 그날 다운되었을 거예요.
어느덧 습관화된,
짐짓 세련된 체하는 냉소와 회의 속에 들어가버렸을 지도 모르구요.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밀어내도 계속 나타나는 골프장 개발 문제 자체가
사실 힘 빼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아니예요. 십년전에도 개발한다 그랬는데 사람들이 막아냈구요.
오년전에도 막아냈어요.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어요."
지칠 수 있는 이야기를 어머니는 거꾸로 희망의 증거로 내밉니다.
진심으로 열의를 다해서요.
그러면 사람들도 말하게 됩니다.
"어, 막았다구요?"
"그럼요, 시민들의 힘이 없었다면 벌써 여기 나무들 다 잘라지고
저 아래 솔슾도 골프장이 되었을 거예요."
크게 손짓하며 설명합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웃게 되죠.
그건 전략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힘은, 소년같은, 아니,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인간애와 진심에서 옵니다.
그날 어떤 할아버지가 왔어요.
거리에서 종종 마주치는,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소위 '꼰대' 기질의 할아버지였죠.
"이렇게 한다고 당신들에게 무슨 보상이 가? 돈이라도 나와?"
"파하하, 뭐, 계양산이 살아나는게 보상이죠."
"아니, 좋은 일 하는건 알겠어, 하지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추운데서 하루종일 굶으면서
자기 시간이랑 기력 뺏으면서
자기 삶이나 챙겨야지..."
저라면 그런 할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든
귀도 기울이지 않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건방지게 행동했겠죠.
그런데 어머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 할아버지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열심히 들을게요,
라는 천진한 자세로요.
그 할아버지는 계속 호통을 섞어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여기서 이러고 고생하고 있으면...."
아마 몇분간 되풀이해서 한 것처럼
'이런다고 돈이 나와 떡이 나와'라고 뒷말을 이으려 했겠죠.
하지만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정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눈을 빛내며
무슨 말이 나올지 열심히 귀기울여 듣고 있던 어머니와.
그순간 할아버지는 잠시 말문이 막힌듯 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고맙다고."
파핫,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저는 속으로 작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네, 그 극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입니다.
"(호통을 치며) 당신들이 여기서 이러고 고생하고 있으면!.... (작게) 고맙다고"
고마워. 그러니까 건강 조심해.
할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황황한 몸짓으로 사라지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할아버지께, 감사하다고 몸 조심하시라며 따뜻한 물을 드렸습니다.
집에 돌아가면서 저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들이 꽤 많더군요."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습니다.
"응, 나도 좀 놀랐어."
... 이런 삶의 선배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허무적인 포즈에 사로잡히기 쉬운, 게으르고 늘어지기 쉬운 저에게
어머니같은 선배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엄마.
+ '순정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는 부분.
본래는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똘망똘망'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 것 같아;;; 바꾸었는데
사실 그 때 표정은 정말 똘망똘망해 보였답니다.
아이와 같은 낙관과 희망과 신념으로 반짝이는 표정 앞에서
무언가가 바꾸어지는 순간들이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