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보충수업 마지막 시간 내가 들어간 교실 아이들에게 별도유인물을 한 장 마련했다. 제목은 ‘남은 방학을 알차게 보내는 일곱 가지 방법’이었다. 하루 종일 서점 순례하기, 하루 종일 마을 도서관에서 보내기, 열차여행 떠나기, 재래시장 구경하기, 시내버스로 종점에서 종점까지, 마을 뒷산 오르기, 우리 동네 꽃과 나무 이름 조사하기 등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실천방법까지 안내해 주었다.
유인물에 담은 내용을 학교 동료들에게도 메신저로 날려 보냈다. 선생님 댁의 자녀분께 권하면서 어른이 해 봐도 괜찮다고 했다. 팔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집 앞에서 211번 버스를 타고 창원중앙역으로 나갔다. 내보다 앞서 열차표를 산 낯익은 분을 둘 만났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처녀 선생들이었다. 같은 교무실을 쓰지 않아 인사 정도 나누고 지내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지도 몰랐다.
나도 표를 끊어 대합실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처녀들은 순천으로 간다고 했다. 전주 한옥마을 가는 길로 바로 가는 열차가 없어 갈아타고 갈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메신저로 보낸 내용 따라 열차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나는 한림정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산등선 타고 봉화산에 올랐다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서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한림정에서 봉화산을 두 차례 올라간 적 있다. 그때마다 봉하마을로 내려가질 않고 한림정으로 되돌아 왔다. 첫 번째 방문은 노대통령이 퇴임을 일 년 남짓 앞두고 있을 때였다. 한림초등학교에서 대학 동기생 친선배구를 끝내고 나서 산책 삼아 올랐다. 그때 사자바위에서 봉하마을을 내려다보니 현재 노대통령 사저 자리는 임야로 분묘를 이장시키고 석축 쌓을 돌덩이를 실어 놓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은 작년 가을로 가까이 지내는 세 친구가 부부동반으로 떠났다. 그때도 한림초등학교에서 올랐다. 그날 우리가 사자바위에서 노무현 묘소를 내려 볼 때가 어느 노인이 자신의 배변을 투척한 시간대였다. 우리는 봉하마을로 내려가질 않고 한림정으로 되돌아와 화포천에서 꽤 알려진 메기국을 먹고 돌아왔다. 방학을 맞은 이번에도 나는 남들과 다른 경로로 봉하마을을 찾아가는 길이다
통합창원시의 세 곳 역 가운데 창원중앙역을 이용하는 승객이 제일 많다. 아마도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지 싶다. 대구행 무궁화열차는 금세 진영역을 지나니 한림정역이었다. 한림정역에 내린 승객은 나 혼자였다. 나는 한림초등학교 뒤편에서 산책길 따라 올랐다. 올봄 노무현 재단에서는 ‘대통령의 길’이라고 명명한 표찰이 걸려 있었다. 한 시간 반 남짓 걸으니 호미 든 관음상에 닿았다.
경주에서 온 일가족 네 명을 만났다. 가까이 낙동강이 삼랑진을 향해 굽이쳐 흘러갔다. 사자바위에 섰더니 봉하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평일인데도 사찰이나 명승지처럼 내방객이 많았다. 나는 정토원을 지나 부엉이바위로 건너갔다. 사복 입은 젊은이 두 명이 간이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전경이지 싶었다. 돌계단을 내려와 노무현 묘역으로 들어섰다. 박석에는 추모 글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헌화대에는 시들지 않은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나는 너럭바위 앞에서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너럭바위 옆에는 정복 입은 전경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묘역을 둘러보고 추모관에 들렸다. 노대통령 생전 모습을 재현해 놓은 기록관이었다. 이어 노대통령 사저 앞을 지나 근래 복원한 생가를 둘러보았다. 마을회관 앞 주차장에서 진영읍으로 나가는 버스가 있었다만 나는 타지 않았다.
나는 장방리 갈대집으로 가는 둑길로 걸어 봉하들판을 지났다. 논에는 벼이삭이 나오고 있었다. 친환경 오리 쌀을 재배한다고 들었는데 무논에 오리는 보이질 않았다. 한때 측근 졸부가 노대통령에게 건넸다는 일 억짜리 시계가 화제였다. 내가 걸었던 들판에서는 권여사가 논두렁에 버렸다는 스위스 명품도 보이질 않았다. 폐선이 된 옛 철길을 따라 진영역까지 걸어갔더니 새마을열차가 들어왔다. 1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