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가 사회로부터 욕도 먹고 조롱도 받지 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잘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 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다. 사회복지 관련 법인 의 52.15%, 종합사회복지관 45%, 노숙인 복지시설 62.8%, 지역아동센터 53.13%를 개신교 단체가 운 영하고 있으며, 대북지원 민간단체 79개 가운데 22 개가 개신교 계열 단체로 최근 대북지원의 40.29% 를 감당했고 해외원조단체 23개 가운데 17개가 개 신교 단체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합뉴스). 전체 인 구의 19.4%인 개신교인이 수행한 봉사로서는 상당 하다 할 수 있다. 특히 해외 원조에 앞장서는 것은 온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경의 가르침 에 충실한 것으로 기독교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 다. 과거 6.25전쟁 전후 우리가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외국 (주로 미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많은 구호 품과 구호금을 보내주었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 인이 다른 가난한 나라를 도움으로 그때 받은 은혜 에 보답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름답다. “오른손이 하 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충실해서인지 한국 교회의 이런 봉사는 별로 알려 지지 않았다.
유교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고등종교는 약한 사 람들을 돌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돌보아야 하는 이유는 같지 않다. 이슬람은 구제를 다섯 기둥(Five Pillars of Islam) 가운데 하나로 구원과 바른 삶의 필 수 요소로 가르치고 있다. 무슬림이 다수인 인도네 시아가 세계 기부 순위에서 2위인 것도 이와 무관 하지 않다. 불교에서도 자비는 윤회의 다음 주기에 복을 받는 조건으로 되어 있다. 미얀마가 영국의 자 선기부재단 (CAF –Charitable Aid Foundation) 조 사에서 매년 기부 순위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것도 그 나라 국민의 절대다수가 불교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구원의 조건도 아니고 상 받을 공로도 아니다. 구원과 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지 사람의 자격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고아, 과부, 객 (외국인) 같이 보호자가 없 어 권리를 침해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 되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쓰시고 심지어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들을 돌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약한 자를 돌보 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될(gratuitous) 것을 내가 착해 서 부가적으로 (extra)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요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이 순종해야 할 의무다. 정의의 기초는 모든 인간에 게 평등한 기본 인권이며 이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기 초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제 사회에서는 이 런저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 하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 에 의한 것이라면 푸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평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과 관계 없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부모, 사회적 혹은 정치적 상황, 자연조건, 문화의 변화 등 자신의 힘 으로 결정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불리 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것은 강한 사람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강자가 되는 것도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다. 가정환경, 사 회, 자연, 우연한 사건 등으로 덕을 보는 것이다. 타 고난 능력은 자신의 것이지만 그것도 자신의 노력 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것을 개발할 기회를 얻는 것 도 전적으로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 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된 사 람들에게 부족한 것을 자신의 공로가 아닌 원인으 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사람들이 채워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정의로운 것이다.
1971년에 발간된 롤즈 (John Rawls)의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은 정의에 대한 최근의 이론 적 논의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비록 이견과 비 판, 이에 대한 저자의 수정이 뒤따랐으나 아직도 그 책은 어떤 윤리학자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행사 하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정의의 원칙으로 평등의 원칙(equality principle)과 차등의 원칙 (difference principle)을 제시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 고 있다. 평등의 원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정의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차등의 원칙은 매우 창 조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그 핵심은 “최소 수혜 자의 최대 이익” (the greatest benefits to the least advantaged)이란 것이다. 모든 사람을 골고루 평등 하게 대우하는 것도 정의이지만, 가장 혜택을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는 것도 정의란 것이다. 실제 사회는 항상 약자와 강자가 있기 마련 이기 때문에 평등의 원칙보다는 차등의 원칙이 훨 씬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름 아닌 기독교적 정의다. 롤즈도 그때는 기독교인이었다. 고아, 과부, 이방인은 구약시대에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약자 들이었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는 예수님 시대에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 은 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 게 도울 수 있게 된 것도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 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한 자를 돕는다 하여 자랑할 것도 없고 공로를 요구할 자격 도 없다.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청지기 노릇을 지혜 롭게 수행하는 것뿐이다. 약한 사람을 돕는 것은 사 랑의 효용가치를 높인다. 가난한 사람에게 일만 원 은 부자에게 일만 원보다 훨씬 큰 가치가 있다. 그것 은 곧 그 일만 원을 벌기 위하여 투여한 노동의 가치 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을 뜻하고 노동중심으로 이 루어지는 삶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그 래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 방하고 순종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삶의 가치를 한층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받는 것” (엡 5:1)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가능한 한 가장 많 이 늘여서 약한 자를 돕는 것이 성도가 말세에 감당 해야 할 임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등불을 켜고 가 만히 서서 그의 재림을 기다리라 하시지 않고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라고 (눅 12:42) 요구하셨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재림을 가장 잘 기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첫댓글 약한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가 요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순종해야 할 의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