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자레를 아십니까
이 문 열
김 선생이 그 사내에게 불쑥 그걸 물은 것은 어떤 밤 열차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였다. 그 무렵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김 선생과 나는 방학을 이용해서 몇 군데 버려진 유적들을 답사 중이었고 그 사내는 여행 중의 어느 밤차에서 우연히 우리와 동석하게 된 여행자였다.
“모르겠소. 나자렌지 낫자룬지 그게 뭔데요?”
그런 사내의 반응은 어딘가 들뜬 것 같은 김 선생의 물음에 비해 너무도 심드렁한 것이었다.
“아니,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그걸 물었을 때에도 당신께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순순히 물러난 것은 왠지 곧 외면하시는 당신의 모습이 성난 듯하고 또 우리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모르십니까? 나자레를, 그리고 그 겨울을요?”
나는 김 선생이 그 사내를 당신이라고 호칭했을 때 취중이지만 흠칫했다. 그 호칭은 분명 예사 높임의 하나였지만 이상하게 호전적으로 들렸고, 적어도 사내는 우리보다 10년 넘게 연상으로 보였다. 성깔 있어 보이는 짙은 눈썹이며 우뚝한 콧날도 그런 내 우려를 한층 온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다행히도 호칭과 관련된 그런 자질구레한 예의에 무관심한 듯 여전히 그 심드령한 목소리로 반문할 뿐이었다.
“그 겨울은 어떤 겨울인데요?”
그러자 김 선생은 원인 모를 흥분에 젖어 오랫동안 그의 심중에 자리하고 있었음에 분명한 어느 음울한 겨울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겨울이 유난히 추웠다는 아무런 근거는 없으나 어쨌든 우리에게는 지독한 추위였숩니다. 농장에도 별일이 없고 성냥 공장도 그만둔 뒤였으므로 그 겨우내 우리 나자레의 백여 명 형제들은 모두 방구석에만 처박혀 긴긴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침 방학 중이어서 공부한다는 명목은 있었지만 실은 바로 그 추위 때문이었습니다. 열기라고는 며칠에 한 번밖에 비치지 않는 방이라도, 담요나 몇 장 겹쳐 두르고 등을 맞댄 채 서로의 체온에 기대앉았으면 그런대로 그 겨울의 낮은 견딜 만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은 내가 있던 ‘베드로실(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여덟 명의 작은 동거인들은 길다란 책상에 둘씩 붙어 앉아서 맞은편 깨끗한 회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 수난상이나 기도하는 ‘사무엘’을 올려다보며 아아 주님의 보혈(寶血)이 얼겠구나, ‘사무엘’, 네 무릎이 몹시도 시리겠다 하는 따위의 멍청한 생각에 잠겨 길기만 한 그 겨울 낮을 보냈던 것입니다. 혹시 할 말이 있어도 우리는 극히 필요한 것만을 그것도 짧고 조심스레 건넸습니다. 입을 벌리는 그 순간 방 안의 냉기가 우리를 한꺼번에 꿰뚫을 것 같아서, 혹은 우리의 목소리가 일으키는 미미한 진동마저도 방 안의 냉기를 더할까 봐. 그러다가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스레 방 안의 정적을 찢어 오면 우리는 무슨 전기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화다닥 일어나 저린 다리를 절룩거리며 식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식당은 ― 대개 꺼져 있는 조개탄 난로를 가운데로 하고 역시 썰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주방 쪽에 허옇게 서린 김은 언제나 훈훈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게다가 갓 퍼낸 강냉이죽의 따스한 열기와 구수한 내음은 충분히 우리를 즐겁게 하였고 때로 ‘메뉴’가 바뀌어 밀가루 수제비거나 생된장을 얹은 꽁보리밥이 나올지라도 그로 인해 우리 식탁의 기쁨이 감하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서운 작은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창틀을 흔들어 그곳에 엷은 먼지가 아련히 피어오를 때까지, 그리고 그의 악명 높은 자전거살이 날카로운 소리로 공기를 가르고 몇몇의 언 볼에 붉은 줄을 그어 놓을 때까지 요란스레 그 즐거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식사 끝.
우리는 ‘아버지 감사합니다.’를 크게 외치고 뛰듯이 식당을 나오는 것인데, 그러나 아무도 그 아버지가 하느님 아버지인지 원장 아버지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때쯤은 다소 활기를 되찾아 이번에는 추위 다음으로 그 겨울의 낮을 괴롭혔던 무료와 권태에 대해 얼마간의 저항을 저 나름대로 시도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나 같으면 결국은 몇 장 읽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원내 도서실에서 『즉흥 시인』이나 『소공녀(小公女)』 따위를 펴 들었고 어떤 아이들은 언 땅바닥에 금을 긋고 한두 시간 놀이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나이가 든 패들은 양지 쪽에 모여 서서 닥쳐올 봄의 가출(家出)에 대해 조심스레 음모했습니다. 나자레의 괴질(怪疾) ― . 해마다 봄이 오면 하룻밤에도 몇씩이나 낯익은 얼굴들이 사라져 갔는데 그 모의는 대개 그런 겨울 오후에 이루어졌던 것
입니 .
그러다가 다시 모두 추위에 쫓겨 오전의 위치로 돌아가고 정적. 이윽고 창 앞 서양추리나무에 발갛게 노을이 비낄 때까지 그런 상태는 계속되는 것입니 다.
말이 난 김에 하는 얘기지만 우리가 서양추리란 이름을 붙인 그 나무는 좀 특출 난 데가 있었습니다. 서양은 재래종이 아닌 왜래개량종임을 드러내고 추리는 자두의 사투리로서 표준어로 바꾸면 외래개량종 자두나무쯤이 될 것입니다. 원사(院舍) 앞에 꼭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여름날의 그 당당한 줄기와 무성한 잎, 그리고 거의 주먹만큼이나 한 그 열매는 이 땅에 적응력이 부족한 그 곁의 여러 무화과(無花果)나무에 비해 찬란하다고 할 만큼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래오래 그 나무가 우리 기억에 남게 된 것은 그것이 지녔던 엄격한 금기(禁忌)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무에 대한 작은아버지의 원인 모를 애착은 우리들의 무심한 접근조차도 가혹한 체벌(體罰)로 다스릴 만큼 광적인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후 상당한 세월이 지나간 후에 어쩌다 선악과(善惡果)에 대한 얘기라도 듣게 되면 우리는 항상 그 탐스러운 서양추리를 연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채 그 봄이 오기도 전에 그 밋밋한 줄기에는 그 겨울의 끔찍한 종장(終章)이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자레의 밤은 여러 점에서 낮보다는 훨씬 활동적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첫 번째 순서는 저녁 예배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2층의 넓은 예배실을 데우고도 남는 두 개의 장작 난로로 하여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러 모인 주의 어린 양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만한 수의 배화교도(拜火敎徒) 였습니다. 매일 무슨 분류처럼 흘러나오는 원장 아버지의 설교를 아련한 자장가처럼 들으며 우리는 불의 열기가 가져오는 몽환(夢幻)에 젖어 식후의 노곤함을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말기를 바라던 그 예배도 끝나고 난로가 꺼지면 우리 남자애들은 이내 썰렁해지는 그 자리에서 하루의 암담한 결산을 맞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 형제 교육 시간으로 원래는 우리들의 화목과 우애를 위한 것이었으나 그 무렵은 대개 형들의 단체 기합 시간으로 충당되던 순서였습니다. 청소가 불결하다, 형들에게 예의가 없다, 예배 시간에 졸았다 등등 그 이유는 그때그때 잘도 마련되었는데 특히 그 교육은 정기 구호일 전야에 길고 가혹했습니다.
정기 구호일(定期救護曰)은 한 달에 두어 번씩 외국의 어리석은 양부모(養父母)나 자선단체가 겨우 강냉이죽이나 밀가루 수제비로 연명하는 우리들에게 턱없이 비싼 모피 외투나 에나멜 구두 혹은 태엽만 감아 주면 저절로 춤을 추는 자동인형 따위를 보내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꼭 자기들의 어리석음만큼 의심으로 언제나 그 전달을 확인하고자 했고 때문에 그놈의 저주받을 사진 촬영이 있게 되는데 그게 항상 말썽이었습니다. 전달자의 사진기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본인에게 분배된 그 물품들은 그들이 떠난 후 다시 회수해 보면 대개 현저히 상품 가치가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모피 외투에 불똥이 떨어지고 에나멜 구두의 콧등이 까지거나 자동인형의 모가지가 비틀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소유를 확보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철없는 물욕 탓이었습니다. 적어도 한번 회수된 것들이 다시 임자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호일 전야의 그 길고 가혹한 교육은 말하자면 그 모든 사태에 대한 예방 조치인 셈이었습니다. 적어도 10년은 후에 군대에 가서나 경험하게 될 그런 방식의. 그리고 비록 큰형들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작은아버지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형제 교육이 끝나면 그다음은 온전한 우리들의 겨울밤이었습니다. 소등(消燈)은 원래가 열한 시였지만, 며칠에 한 번씩 불을 때는 날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일찍부터 침구를 깔고 줄줄이 누웠습니다.
헛수고가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우리는 추위와 결핍에서 구해줄 잠을 서둘러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면에 넓게 터진 유리창과 장판을 하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서 스며드는 겨울밤의 냉기는 늦도록 우리의 잠을 방해했습니다. 몇 번이나 일어나 이미 닫힌 창문을 다시 확인하고 멀쩡한 모포를 뚫어진 것이 아닌가 뒤적이다 보면 적어도 자정은 가까워서야 잠이 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김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롤 탐색하는 눈초리로 사내를 살폈다. 거친 세파가 남긴 여러 흔적과 유별나게 깊고 공허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음산하게까지 보이는 그 얼굴을, 그러나 그 사내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플라스틱 술잔을 기울인 후 지나가듯 한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당신도 꽤나 고생스럽게 자랐구려.”
“그럼 정말로 그 겨울을 모르십니까?”
마침 기차가 굴을 지나는 바람에 김 선생은 악을 쓰듯 되물었다.
“기억에 없소. 그 따위 겨울은.”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은 분명 알고 계십니다. 오직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 아무리 해도 그녀만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가련한 이브의 딸은요.”
“이브의 딸? 외국 여자요?”
“정말 교묘한 부인(否認)이십니다. 그러나 잔을 든 당신의 손은 분명히 떨리고 있습니다.”
“여보쇼, 젊은 친구 당신은 무얼 오인하고 있어. 나는 당신들 먹물 든 사람들이 흔히 경멸해 마지않는 단순 육체노동자일 뿐이오. 지금도 나는 여기 이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길이요.”
곁에 잠들어 있는 여자와 어린아이 둘을 가리키며 사내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한 불쌍한 여자를 알고 있고 또 그녀의 얘기를 꼭 내게 들려주고 싶다면 그렇게 빙빙 돌려 가며 말할 필요가 없소.”
그것은 무언가 참아 주고 있다는 그런 불쾌한 어투였다. 그러나 김 선생은 여전히 개의치 않고 자기의 얘기에 열중했다.
그 겨울 우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고 얘기했습니다만 사실 거기서도 내가 있던 베드로실은 제외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옆방 바돌로메실(室) 의 ‘우는 누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무언가 몹쓸 병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스물두엇가량의 처녀였는데 대개 자정 무렵부터 시작되는 그녀의 울음소리에는 정말 참고 잠들기 어려운 데가 있었습니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스산한 겨울바람에 섞여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그 애절한 음향은 마치 수천수만의 검은 창날처럼 불행과 슬픔에 익숙한 우리의 어린 영혼을 찔러 왔던 것입니다.
처음 얼마간 나는 그 소리를 못 견뎌 하는 것이 유독 나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어느 저녁인가 언제나 나와 한 담요를 덮은 재섭이라는 아이가 자기 전에 솜으로 귀를 막는 걸 보고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애는 말없이 그러나 약간은 짜증 난 표정으로 옆방 그 누나 쪽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물론 나도 따라 해 보았지만 뺨에 고막이라도 생긴 듯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생생한 기억을 남긴 것은 평소에 사람 좋기로 정평 있는 우리 베드로실의 실장 춘수 형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날도 우리들은 예의 그 울음소리 때문에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는 것 같던 그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바돌로메실’을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썼던 것입니다. 누나, 그만 죽을 수 없수? 그렇게도 살아야 하우? 그렇게두 말유. ― 대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상급반이었던 그로서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린 우리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터무니없이 맹렬한 그 분노도 그랬지만 무언가 더럽다는 투의 말은 오히려 속상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튿날 그가 작은아버지에게 엉덩이가 찢어지도록 맞았다는 소문을 듣고도 우리는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 그 누나의 울음과 관계된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때 아닌 여자애들의 집단 가출이 있었는데, 나이 든 형들의 수군거림은 그것도 바로 그 ‘우는 누나’ 때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나간 나보다 대개 서너 살 위인 그녀들 셋 중 하나를 나는 여러 해 후 어느 도회의 뒷골목 술집에서 만나게 됐는데 그때 통음(痛飮)에 젖은 그녀는 이렇게 술회했던 것입니다.
“그 울음소리 ― 기억나지. 사실 그때 우리는 그 울음소리로부터 도망쳐 나온 거야. 우리도 그렇게 속절없는 울음을 울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거야. 우리는 다 알고 있었거든…… 다 ― .”
그러나 그 울음소리의 주인은 처음부터 그런 가련한 처지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시 나자레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한때는 그곳 마흔 명 남짓의 여자애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중학을 마치자 당시의 관례대로 먼 데 도시로 나가 어느 직물 공장의 여공으로 출발한 그녀는 함께 나간 다른 자매들이 낮은 임금과 과로에 지쳐 혹은 여러 세상의 유혹과 타락에 몸을 망치고 성급하게 불행한 결혼이나 그 이상 더 깊은 인생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갈 때도 성실하고 착하게 자기의 길을 가 ― 한때는 어느 대우 좋은 은행에 근무하며 야간이나마 대학에까지 진학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 아아, 왜 선악을 불문하고 우리에게 재난은 닥쳐오는 것입니까. ― 갑자기 지금까지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몹쓸 병은 그녀를 침범하였고 달리 의지할 데 없는 그녀는 다시 잔뼈가 굵은 그곳으로 몸을 의탁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병도 처음부터 그렇게 지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곳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왼쪽 무릎 아래만 마비되어 그저 좀 심하게 저는 듯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은 어린 원아들의 좋은 보모 노릇도 했으나 이윽고 왼쪽 다리 전체가 마비되고 다음은 오른쪽 ― 이렇게 해서 그 무렵은 완전히 반신불수가 된 채 우리 옆방에 기거하게 된 것입니다.
어린 나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에 젖어 창틀이 희뿌옇게 밝아올 때까지 깨어 있게 하고, 성장한 지금도 원인 모를 슬픔으로 그녀의 추억에 잔을 바치게 하는 그 애절한 울음소리와 함께…….
그리고 김 선생은 정말로 거칠고 성급하게 자기의 잔을 비웠다.
그가 들큰한 오징어포를 씹는 동안 잠시 우리들의 좌석은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것은 단조로운 열차의 바퀴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그사이에도 김 선생의 눈은 집요하게 사내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몽롱한 눈길이었고 무감동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김 선생이 다시 채근하듯 물었다.
“그런데 ― 그녀를 모르십니까?”
“가엾은 여자군, 조금은. 그러나 땅 위에 흔히 있는 일이오.”
“땅 위에 ― .”
김 선생이 유독 그 말을 반복하여 내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자기가 뿜어낸 담배 연기로 흐릿해진 그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옆에 잠들어 있는 그의 아내는 저질의 화장품 탓으로 보이는 납중독 증상과 뒷골목의 여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주름으로 무언가 어두운 과거를 연상시키는 얼굴이었고 그 양 곁에 갈라 앉아 잠든 두 아이는 선천적인 성병에 의한 것 같은 부스럼 투성이었다.
“좋습니다. 역시 부인하시는군요. 그러나 당신께서 방금 사용하신 ‘땅 위에’라는 말은 방금 나에게 또 한 인물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신은 고집스레 그녀까지도 부인하셨지만 적어도 이 사람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때 그 사내의 지긋한 눈길에 문득 비친 우려의 빛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김 선생의 일순 빛나던 득의의 기색은 그런 그의 우려를 읽은 탓이었을까. 김 선생은 한층 음흉해진 듯한 목소리로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나자레’에도 행복한 시절의 전설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이끈 영웅의 신화도. 그것은 역시 그곳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와 성실한 성품을 인정받아 읍내의 교회 기금으로 신학 대학에 진학한 형과 그가 읍내 교회의 지우(知遇)를 입기 전 우수한 성적으로 지방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일없이 그곳에 머물렀던 2년이었습니다.
내가 ‘나자레’에 수용된 것은 이미 그가 떠난 후여서 한 번도 대면은 못 했지만 그는 대단한 정열과 사랑의 영웅이었습니다. 작은아버지도 왠지 그만은 두려워해서 그에게 일임한 형제 교육 시간은 그대로 화기애애한 오락 시간이었고, 여름의 그늘과 겨울의 난롯가는 그가 들려주는 여러 재미있는 얘기로 항시 즐거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겨울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군불을 땠으며 일주일에 한 번은 고깃국이 나왔습니다.
후일 우리들의 태업(怠業)과 소비자의 외면으로 그만두게 된 성냥 공장이 그 재원(財源)인데 그때 그는 작업 감독은 물론 판로 확장을 위해 호별 방문도 서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는 누구도 고아라고 해서 우리 나자레의 형제들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반드시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는 학교의 선생님조차도 우리들의 눈치를 보았고 일요일마다 단체로 가는 주일학교의 반사(班師)들은 겨울이면 난로 주위 자리를 숫제 우리가 갈 때까지 비워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대로 자비와 용서의 형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엄격한 징벌의 형이기도 하여서 형제들 중 누가 사소한 것이라도 거짓을 행하거나 불의에 가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후일 작은아버지의 그 어떤 처벌보다 더 엄중한 처벌을 했습니다. 천한 이기(利己), 나태 같은 것들도 용서하지 않는 바였고 그래서 공동 작업이 있었거나 성적표가 나오는 날 밤의 예배실은 이유 없이 작업에 빠졌거나 성적이 떨어진 형제들의 신음 소리와 땀 냄새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내가 그곳에 머문 3년간 나는 한 사람도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오직 세월과 더불어 광휘를 더하는 전설의 영웅이었으며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완성의 한 전형일 따름이었습니다.
만약 그 가련한 여인 ― 우는 누나 ― 만 아니었던들 그는 지금까지도 그러 했을 것입니다.
그 형과 그녀의 사랑은 나자레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들이 결혼하리라는 소문은 결혼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조무래기들에게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고 실제로 그들 간의 편지 심부름을 해준 사람도 우리들 중에는 여럿 있었습니다. 그녀가 병실을 차리고 눕기 전 나도 몇 번인가 양지바른 화단가 같은 데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두텁게 철 된 그 형의 편지를 읽고 있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분명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 겨울 그녀가 완전히 반신불수가 되어 바돌로메실에 병실을 차리고 누울 무렵부터 갑자기 그 형의 편지는 끊어지고 예의 그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이 든 형들은 은연중에 동숙자도 없는 그런 후미진 방에 병실을 지정한 작은아버지를 비난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한결같이 그 형을 의심했습니다 그녀의 눈물을 버림받은 여인의 눈물로 단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예기치 않은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김 선생의 말을 중단시켰다. 성급하고 다소 떨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건 어린 탓이었겠지.”
그러자 김 선생의 눈빛은 다시 한 번 득의로 빛나더니 이번에는 거의 노골적인 심문의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사내는 순간 당혹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처음의 심드렁한 목소리로 돌아가 띄엄띄엄 말했다.
“이를테면 ― 자신의 회복을 체념한 그녀가…… 그 사람을 위해서, 먼저 그를 버렸을지도…….”
“역시 아시는군요.”
“무얼?”
“그 사람 말입니다. 그녀도, 나자레도.”
그러자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의 그런 과장된 침착은 왠지 이번에는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내가 그를 변호해 주었다고? 그러나 그 따위 신파적인 해석은 흔해 빠진 국산 영화 두어 편만 보아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소.”
“그렇다면 전혀 그를 모른단 말씀입니까? 정말 모두 부인하시렵니까?”
“당신의 얘기는 퍽 재미있지만, 그리고 무엇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그 구성진 얘기를 계속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진실로 그중의 누구와도 인연이 없소.”
거기서 사내의 급속한 회복과 반비례해서 격해 가던 김 선생의 목소리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
“할 수 없군요. 그럼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당신께선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 김 선생의 어투는 곁에서 듣기에도 민망스러울 만큼 도전적이고 날카로웠다. 아무리 술을 사고 있는 것은 우리 쪽이라고 하지만 그런 김 선생에 대한 사내의 참을성은 거의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는 작은아버지입니다. 오, 그 사람……. 나자레의 추억 도처에서 뻣뻣이 굳은 왼팔과 화상으로 일그러진 눈매로 무슨 악령처럼 음산하게 나타나는 그 사람. 우리 백여 명의 허약한 육신만이 아니라 파리한 영혼에까지도 간단없는 감시의 눈을 번득이며 그 무서운 질타와 강철 회초리를 거침없이 구사하던 그 사람. 예배 시간마다 전 인류의 죄악을 홀로 참회하듯 길고 과장된 기도를 올려도 자신은 아내에게마저 버림받은 그 삐뚤어진 독신자.
그러나 이제 내가 추억하려는 것은 그런 두렵고 불쾌한 그가 아니라 우연히 접하게 된 그의 다른 일면입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나는 나 자신의 조그만 삽화를 끼워 넣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학 중의 어느 소집일, 아마도 춘수 형이 소란을 피운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무심코 바돌로메실을 지나던 나는 돌연히 ‘우는 누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굳이 나를 지명해서 부른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날의 대면은 퍽 인상 깊은 것이었습니다. 늘 그랬듯이 어색하게 머뭇거리며 그녀의 머리맡으로 다가가던 나는 그날따라 돌연 이상한 전율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공포라 할까, 하여튼 다가오는 나를 찬찬히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무언가 섬뜩한 것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것이 병자 특유의 창백한 안색과 여윈 탓에 날카로워 보이는 콧날 그리고 번득이는 젖은 눈매 같은 것으로 내 어린 영혼을 섬뜩하게 했던 것입니다.
나를 부른 용건은 대단찮은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고통을 짧게 호소한 뒤 잠자는 약을 좀 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그녀의 다짐이 좀 꺼림칙했지만, 순순히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시작으로 해서 나는 매일 그 심부름을 계속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약을 건넬 때마다 내 손목을 꼬옥 쥐어 주는 그녀의 따뜻한 손과 앞으로는 절대로 울지않겠다는 그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정말 그 저녁부터 들리지 않았습니다. 쩌엉쩌엉 먼 데 남천강의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복도를 지나는 고양이 발자국 소리가 머릿속에서 콩콩 울릴 만큼 조용한 밤에도.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가 별생각 없이 계속한 그 심부름은 뜻밖의 결과로 그날을 내 ‘나자레’의 날들 가운데서 특별한 날로 만들었습니다. 그날도 약을 사러 몰래 읍내까지 빠져나갔다 늦게 돌아온 나는 이상하게 음울하고 풀 죽은 ‘나자레’의 분위기를 발견했습니다. 낮 사이 작은아버지가 그 누나의 방에서 한 줌이나 되는 수면제를 찾아냈다는 것과 따라서, 누군가 그런 것을 사다 나른 자를 잡아내기 위해 그날 저녁의 형제 교육은 작은아버지 자신이 직접 하리라는 풍설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나이 든 형들은 엉덩이가 찢어져 적어도 일주일은 엎드려 자야하고, 어린 우리들조차도 종아리가 시퍼렇게 피명이 지리라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나는 수면제가 인간을 영원히 잠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의 몇 시간을 나는 정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때 내가 경험한 것은 이미 사소한 아이 시절의 불안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고뇌였습니다. 내가 그 누나의 죽음을 예비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고의(故意)의 참뜻을 이해 못 했던 나에게는 단순한 무분별에 대한 후회 이상의 쓰라린 가책이 되어 내 가슴을 찔러 왔고, 그 고통스러운 형제 교육 시간과 그 후 원인 된 내게 돌아올 형들의 무서운 보복에 대한 상상은 거의 나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다가 오, 주여. ― 나는 갑자기 위층에 있는 조그만 기도실을 생각해 내고 본능적으로 그곳에 달려가 엎드렸습니다.
진실로 내가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신을 믿은 적이 있다면 오직 그때뿐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간절히 기구했습니다. 어린 내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고 주여, 나를 닥쳐올 환란에서 보호해 주옵소서……. 그리고 그 반복으로만 이루어진 긴 기도가 끝났을 때 나는 영감과도 흡사한 결단을 얻었습니다. 나 스스로 먼저 작은아버지를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그를 버리고 떠난 후 사철 두터운 커튼으로 가리어져 있는 그 음침한 독신자의 방으로 그것은 어쩌면 절망한 다람쥐가 스스로 방울뱀의 입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심리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마침 그 방에는 원장 아버지가 와 계셨습니다. 노크를 하려고 문께로 다가가던 나는 나지막하나 심각한 그들 형제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쪽은 무엇인가를 만류하고 있었고 상대는 그걸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 하지만 그 애는 육신조차 팽개치고 달아나려고 하지 않았니, 하는 원장 아버지의 격한 목소리를 끝으로 방 안은 갑자기 침묵에 빠져들었고 문득 불안해진 나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적막한 영혼의 원사(院舍)를 한참이나 배회하다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작은아버지 혼자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술을 마시면서. 그러다가 불시에 침입한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습니다. 그 무서운 눈길에 질린 나는 미처 그가 묻기도 전에 무슨 대사라도 외우듯 그간의 경위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숩니다. 당연히 무서운 질타와 함께 강철 회초리가 따갑게 뺨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조용했습니다. 다만 들고 있던 술잔을 가만히 기울이더니 노을이 짙게 비낀 채광창을 묵묵히 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흉측한 얼굴의 화상(火傷)도 뻣뻣하게 굳어 탁자 위에 얹혀 있는 왼팔도 모두 이상하게 애조 띤 실루엣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나는 여러 고독한 사람을 만났지만 진실로 그보다 더 절실한 고독의 영상을 보여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김 선생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굳어 있는 사내의 표정을 기분 나쁘리만치 면밀하게 읽더니 속삭이듯 물었다.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습니까?”
사내는 아마도 다른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 선생의 질문을 받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망연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용서라니, 무얼 말이오?”
“작은아버지 말입니다.”
그러나 사내는 다시 완강한 거부의 자세로 돌아갔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오? 그리고 ― 제발 그 심문자의 눈초리는 거두시오. 그놈의 청승맞은 얘기도 그만하고.”
그러고는 마지막 남은 술을 훌쩍 마시더니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웬만큼 지루한 데다 잠도 좀 자 둬야겠소. 내일이라도 일거리가 생기면 곧 일해야 할 테니까.”
김 선생은 무언가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결정한 모양으로 흔들 듯 사내에게로 다가앉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모르십니까?”
“글쎄, 당신의 얘기는 나와 상관이 없다니까.”
“그럼 5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쩔 수 없이 그 겨울의 종장을 들려 드려야겠습니다. 이걸 들으시면 아마 당신께서도 더 이상 그들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사내가 다시 눈을 떴다. 그걸 보고 안도한 듯 김 선생도 자신의 막잔을 비웠다. 나도 따라 비웠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훨씬 지나 우리를 제외한 승객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들리는 것은 객차의 덜컹거림과 단조로운 열차 바퀴 소리 정도였다. 밤이 깊을수록 더 맹렬히 타오르는 것은 김 선생의 추억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는 지친 투우의 심장에다 마지막 일격을 겨냥하는 투우사에게서와 같은 어떤 잔인함마저 번득였다.
그로부터 오래잖아 나자레의 겨울은 종장이 왔습니다. 긴 방학도 끝나고, 드디어 그 학년의 종업식이 있게 되는 날 새벽, 우리는 변소를 다녀오던 한 여자애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우리가 달려갔을 때 그 애는 어찌나 놀랐던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벙어리처럼 대중없는 손가락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서양추리나무 쪽이었습니다.
처음 우리는 거기에 빨래라도 널려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 디.
그것이 바로 그 가련한 누나의 최후였던 것입니다……. 겨우 우리 팔뚝만 한 가지에 그것도 두 다리는 접힌 채 땅에 닿아 있는데도 목을 맨 그녀의 사지는 이미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오래잖아 원장 아버지가 달려오고 이어 큰형들에 의해 시신이 힘들게 내려졌습니다. 가슴과 배의 옷자락이 형편없이 해지고 손톱에서는 피가 흐르는 그녀의 시신에는 아직도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돌로메실’에서 그 나무까지 하반신이 마비된 몸으로 기어가는 데 너무도 많은 시간이 걸려 정작 목을 맨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눈물에 젖은 그녀의 영혼은 서둘러 저주받고 오욕된 육신을 떠난 듯 인공호흡도 급히 달려온 의사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만 몇 번인가 그녀의 시신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 중년의 의사는 경황없이 서 있는 원장 아버지에게 “임신이었던 것 같소. 차라리 필요한 건 경찰이오.”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의 자세한 경과는 알 길이 없습니다.
재촉 속에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엄한 함구령을 받고 학교로 떠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던 것입니다. 정돈된 ‘바돌로메실’에는 깨끗한 수의에 싸인 누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고, 그 앞 조촐한 제상 위에는 촛불 두 개가 불길한 빛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짐작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친 도끼질에 무참히 쓰러진 서양추리나무와 남아 있던 조무래기들의 종잡을 수 없는 전언 ― 작은아버지가 짐승처럼 묶여 어디론가 실려 갔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 새벽의 소동 중에서 왠지 모습이 비치지 않던 그는 결국 미쳐버렸던 것입니다. 서양추리나무를 찍어 넘긴 것도 그였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인상 깊은 날은 그리고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일은 그밤 늦게서야 있었습니다.
그 하루의 여러 자극적인 사건으로 늦도록 잠을 설치던 나는 자정이 넘어 이제는 더 이상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그 ‘바돌로메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갓 열두 살이 된 나에게도 시체나 유령에 대한 공포는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그 방의 확실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소변을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창틀이 예사 아닌 불빛으로 훤하게 빛났고 나는 놀라움과 의혹으로 방 안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의외로 거기에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원장아버지와 어떤 청년이었습니다.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콧날은 낯설었지만 분명히 나자레의 오랜 우상이었던 그 형이었습니다.
그는 방금 무슨 책인가를 찢어 한 장 한 장 ‘시멘트’ 방바닥 위에서 태우고 있었습니다. 옆면의 붉은 색깔이나 책장을 찢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원장 아버지의 어깨로 보아 성경인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원장 아버지의 침울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용서해라. 그도 이미 벌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형은 마치 귀머거리처럼 기계적인 동작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안절부절못하던 원장 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그의 손목을 잡고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용서해라. 그리고 인간의 일로 신께 절망하지 마라.”
그러자 그는 삭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애가 병들었을 때 나는 이미 신약의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신뢰를 두었던 것은 이 징벌과 보상의 기록이었습니다만 ― 이제 알았습니다. 카인이 받은 저주는 아벨의 부활이 아니고, 욥을 위한 축복의 보상도 이미 잃은 것에 대해서는 무력한 것임을.”
물론 그때의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의 강렬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그 말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러나 원장 아버지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은 채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반복했습니다.
“나를 보아서도…… 이 아버지를 보아서도 용서해라. 그 녀석을”
그러자 갑자기 그 형의 두 눈에서는 은은하던 적개심이 광채가 되어 타올랐습니다.
“사실 용서받고 싶은 것은 아버지 자신이시지요. 그런 식으로 그 불쌍한 아이의 영혼까지 능욕하려 하셨지요? 결혼까지 강요했지요?”
원장 아버지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떨구며 잡았던 손을 힘없이 놓았습니다.
“용서해라. 그 녀석은 ― 그 녀석은…… 남한 땅에 떨어진 내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런 그의 말끝은 거의 흐느낌으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여전히 귀먹은 사람처럼 성경만 한 장 한 장 찢어 태우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그 두터운 표지마저 푸른 불길 속에서 온전히 재로 화하자 그는 조용히 일어나 그 새벽의 으스름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나자레와 신으로부터 영원히 그런데 ― .
하지만 그 사내가 먼저였다. 그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김 선생의 말허리를 자르며 그는 이상하리만치 취기가 가신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나를 닮았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잘못 봤소.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어디선가 죽었을 거요. 예를 들어 군대 같은 데서 특수부대를 지원해 해안 침투 중 적에게 사살되었거나 월남의 정글에서 ‘부비트랩’ 같은 데 걸려……. 자, 이제 정말 눈 좀 붙여야겠소. 술 잘 마셨소.”
그러고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시였다. 사내는 갑작스러운 요의(尿意)라도 느낀 듯 벌떡 일어서더니 출구 쪽으로 나갔다. 김 선생은 아직도 미심쩍은 얼굴로 그런 사내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더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삼십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으로 줄곧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김 선생 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갔을까?”
겉보기와는 달리 김 선생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러나 누구도 그런 것을 찾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러운 취기로 아슴푸레 잠이 들었던 나는 이런 차내 방송에 눈을 떴다
“사람을 찾습니다. 윤수원 씨, 나이는 39세, 윤수원 씨 가족 되시는 분이나 동행하신 분은 급히 승무원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윤수원 씨에게 큰 사고가 났습니다.”
잠든 것 같던 사내의 아내가 놀라 일어섰다. 그 바람에 두 아이도 칭얼거리며 눈을 떴다. 방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남천(南川) 철교에서 떨어져 지금 가까운 명계 시립병원에서 가료 중인데 중태라는 연락입니다. 가급적이면 다음 역에서 하차할 준비를 해 오시기 바랍니다…….”
(1977 년)
-끝-
2016년 11월 18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