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의 슬픔] 6
저녁 먹은 뒤에 처음으로 약을 마실 때에 엘리자베트에게는 한 바라는 바가 있었다. 그의 조급한 성격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낳은 바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약의 효험이 즉각으로 나타났으면.....하는 것이다.
이 바람은 벌써 차차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공상으로서 실현된다.
그는 생각하였다.
이제 남작 부인이 죽는다. 그때에는 엘리자베트는 남작의 정실이 된다.
‘조선 제일의 미인, 사교계의 꽃이 이 나로구나’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뜩거리며 생각한다.
이환이는 어떤 간사한 여성과 혼인한다. 이환의 아내는 이화느이 재산을 모두 없이한 후에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도망하고 만다. 그리고 이환이는 거러지가 된다. 어떤 날 엘리자베트 자기가 자동차를 타고 어디 갈 때에 어떤 거러지가 자동차에 치인다. 들고 보니 이환이다.
‘그러면 어찌 되나.’
엘리자베트는 스스로 물어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의 사랑의 전부가 어느덧 남작에게로 옮겨왔다.
그는 자기의 비열을 책망하는 동시에 아까 그런 공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중오, 놀람, 절망 들의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 가운데도 가느나마 그에게는 희망이 있다. 앞에 때가 있다. 약의 효험은 얼마 후에야 나타난다더라 엘리자베트는 생각을 하고 좔좔 오는 장맛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바람의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람은 종시 그 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튿날, 하기시험 준비 날, 엘리자베트는 시험 준비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누워서 약의 효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의 효험은 그날도 안 타나났다.
사흘째 되는 날도 효험은 없었다. 시험 하러 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대엿새 지난 후에 엘리자베트는 자기 건강상의 변화를 발견하였다. 모든 복잡하고 성가신 일로 말미암아 음식도 잘 안 먹히고 잠도 잘 안 오던 그가, 지금은 잠도 잘 오고 입맛도 나게 된 것을 깨달았다. 그때야 그는 그것이 낙태제가 아니고 건강제인 것을 헤아려 깨달았다. 그렇지만 약은 없어지도록 다 먹었다.
마지막 번 약을 먹은 뒤에 전등을 켜고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여보았다. 병원 사건 이후로 남작은 한번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리 근심도 아니 났다. 시기도 아니 하였다. 다만 오지 않아야만 된다. 그는 생각하였다. 왜 오지 않아야만 되는가 자문할 때에 그에게 거기 응할만한 대답은 없었다. 이 ‘오지 않는다’는 구는 엘리자베트로서 자기가 근 두 달이나 혜숙의 집에 안 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다는 이환 씨 생각이 나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는 고로 그는 곧 생각의 끝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이와 같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 또 다른 생각 왔다 갔다 할 때 문이 열리며 남작 부인이 낯에는 ‘어찌할꼬’하는 근심을 띠고 들어왔다.
“어찌 좀 나으세요?”
“네, 좀 나은 것 같아요.”
대답하고 엘리자베트는 자기가 무슨 병이나 앓던 것같이 알고 있는 부인이 불쌍하게 생각났다.
부인은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 한참이나 우물거리다가,
“그런데요.”
하고 첫말을 내었다.
“네.”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대답하였다.
부인의 낯에는 ’말할까 말까‘하는 표정이 똑똑히 나타나 있었다. 그러다가 입을 또 연다.
“아까 복손이(남작의 아들 이름) 어른이 들어와 말하는데요.....”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부인은 말을 연속한다.
“선생님은 이즈음 학교에도 안 가시고 그 애들과도 놀지 못하신다고요. 게다가 병까지 나셨다고, 얼마 좀 평안히 나가서 쉬시라고, 자꾸 그러래는수.”
부인의 낯에는 말한 거 잘못하였다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말을 다 들은 엘리자베트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무엇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고 무의식으로 자기 행리(行李)를 꺼내어 거기에 자기 책을 넣기 시작하였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엘리자베트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부인은 물었다.
“이 밤에 떠나시려구요? 어디로?”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정신을 차렸다. 그의 배에서는 뜻 없이 큰소리의 웃음이 폭발하여 나온다. 놀라는 것같이, 우스운 것같이. 부인도 따라 웃는다.
한참이나 웃은 뒤에 둘은 함께 웃음을 뚝 그쳤다.
엘리자베트는 웃음 뒤에 울음이 떠받쳐 올라왔다. 자연히 가는 소리의 울음이 그의 목에서 나온다.
이것을 본 부인은 갑자기 미안하여졌던지 엘리자베트를 위로한다.
“울지 마십쇼. 얼마든지 여기 계세요. 제가 말씀 잘 드릴 테니......”
“아니, 전 가겠어요.”
“어디, 갈 곳이 있어요?”
“갈 곳이.......”
“있어요?“
”예서 한 사십 리 나가서 오촌 모가 한 분 계세요.“
”그렇지만,......이런 데 계시다가.....촌.......“
부인의 눈에도 이슬이 맺힌다.
”제가 말씀......잘 드릴 것이니....그냥 계시지요.“
”아니야요. 저 같은 약한 물건은 촌이 좋아요. 서울 있어야......“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진다.
”서울 몇 해 있을 동안에.....갖은 고생 다 하고....하던 것을 부인께서 구해주셔서.....“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치마 앞자락에 떨어진다.
”참 은혜는.....내일 떠나지요.“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었다.
”내일!? 며칠 더 계시......“
”떠나지요.“
”이 장마 때.....“
”........“
”장마나 걷은 뒤에 떠나시면.......“
”그래두 떠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