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충무로 누벨 바그’ 윤여정
“조영남 만나 인생 끝냈기에 배우로 부활할 수 있었다”
‘하녀’에서 그녀는 주인공인 김진규를 유혹해 임신을 한 후 주인댁의 아이를 독살하는 독부로 변한다. 그러나 사랑 외에는 바라는 게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허무적인 잔영을 스크린에 드리우고 있다. 그에 비해 윤여정이 맡은 리메이크작 ‘화녀’의 가정부와 그의 호스티스 친구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적 선망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영화 안에서 삼일빌딩과 청계고가도로로 상징되는 서울의 모습은 주인공들의 중산층에 대한 선망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자본주의하에서 계급상승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은 ‘출세하면 31층 빌딩을 사자’고 약속하지만, 결국 하녀는 죽고 그녀의 친구와 본부인이 경찰 취조를 받은 후 비 오는 삼일빌딩 앞에서 초라하게 사라져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패배한 세상. ‘화녀’는 오리지널인 ‘하녀’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깃들인 시대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조망하려 시도했다.
-김 감독은 윤여정씨를 왜 뽑았다고 하던가요.
“그 무렵 내가 TV에서 발랄함의 상징이었어요. 요즘으로 치면 김희선쯤 되었다고 할까. 날 왜 뽑았느냐고 물으니까 김 감독님이 낄낄낄 웃으면서 ‘청승맞아서 골랐다’고 그러는 거예요. 고개를 갸웃했죠. 그 시절에 나보고 청승맞다고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김 감독 말고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이혼하고도 한참 지나 드라마 ‘관촌수필’을 하고 있을 때였을 텐데, 우연히 내가 나를 화면에서 보게 됐어요. 근데 참 청승맞더라고요. 정말 청승맞았어요. 그때 퍼뜩 김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르데요. 그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구나, 20대에게서 청승맞은 구석을 미리 보다니. 나는 나에게 청승맞은 구석이 있다는 걸 진짜 몰랐어요. 봐요, 지금은 전혀 발랄하지 않잖아요. 내가 나를 봐도 청승맞은 데가 있고.”
-김기영 감독의 작품을 보다 보면 다분히 가학적이고 인간에 대해 굉장히 냉정한 면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촬영감독 정일성씨 말로는 다른 감독은 카메라를 잘 모르지만 김기영 감독은 잘 알고 있었대요. 기이한 구도를 많이 사용했죠. ‘충녀’를 찍을 때예요. 소품으로 유리로 된 테이블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정일성 감독이 그 밑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 테이블 위에 색색가지 사탕을 뿌려놓고는 나보고 검정팬티를 입고 그 위에 올라가 앉으라는 거예요. 스물 몇 살 먹은 어린 애가 그걸 어떻게 해요. 또 싸움 나는 거죠, 울고 불고. 그런 일이 많았어요. 나보고 늘 성질이 못돼서 망할 거라고 그랬거든요.
하루는 나한테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되는 장면이라고, 오늘은 화낼 것도 없고 신경질 낼 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얀 시트에 나체로 드러누워 눈을 감으니 ‘레디 고’를 외치더군요. 그러고는 갑자기 천장에서 흰 쥐를 떨어뜨리는 거예요. 무슨 연기가 필요했겠어요? 아마 진짜로 기절했을 거에요. 그러니 영화장면이 사실적일 수밖에 없죠.”
-영화를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었군요.
“말도 마세요. ‘화녀’에 보면 남궁원씨와 내가 뒤엉켜서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와요. 그때 남궁원씨가 부들부들 떨면서 못 내려간다고 할 정도였어요. 나도 등에 상처가 엄청나게 났죠. 찍을 때는 또 어떻게 했느냐 하면 광목을 층계 위에서부터 묶어놓고는 카메라맨한테 그 위로 떨어지라고 그랬대요. 카메라맨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자빠지면 머리통이 깨지는데. 그런데 김 감독은 결국 현장에서 그걸 다 하게 만들어요. 그게 카리스마였죠.”
-김기영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인 ‘충녀’는 어땠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꼽는다면.
1972년작 ‘충녀’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노이로제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이 교수는 혼외정사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들과 함께 수용된다. 어느 날 그는 한 환자로부터 혼외정사때문에 급기야는 정부에게 살해된 어느 골동품 수집가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해 듣게 된다.
술집 호스티스였던 명자(윤여정)는 부인의 경제력에 밀려 무위도식하고 있는 김 사장(남궁원)을 만난다. 명자를 만난 뒤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된 그는 그녀를 후처로 맞아들인다. 어느 날 김 사장과 명자는 냉장고 속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하여 키우게 되지만, 명자는 아기가 고양이와 쥐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보게 된다. 어느 날 저녁, 명자는 집 안 냉장고 속에서 아기의 시체를 발견하고 다음날 그것을 교외의 땅 속에 묻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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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하게도 한밤중 냉장고 속에서 아기의 시체를 발견한 김 사장은 명자의 변명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아내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에 명자는 면도날로 김 사장을 살해하고 자신 또한 자살을 기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그 뒤 형사들과 신문기자에 휩싸여 현장을 재연하던 명자는 냉장고 속에 있던 아기가 다시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김 사장 부인의 운전수 박씨는 이 모든 일이 그녀를 위해 자신이 계획한 일이었음을 밝히며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거절하는 그녀를 향해 운전수 박씨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움직인다(이 시놉시스는 ‘김기영 시나리오 선집 1’(김기영/집문당/1996) 중 ‘충녀’ 시나리오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 것임).
“재연 장면이 끝나면 현실세계인 정신병원에서 남궁원씨는 환자고 나는 간호사예요. 그러니 그 반전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어요. 내가 특이한 웃음을 지으면서 남궁원씨를 바라보는 게 마지막 장면이었을 거에요. 내가 지금 기억하는 건 그래요.”
‘윤여정이 부잣집 딸이라더라’
-‘화녀’하고 ‘충녀’를 비교하면 어떠세요, 분위기라든가 본인 연기라든가.
“연기는 ‘충녀’ 때가 나았겠죠. 김기영 감독하고 의사소통도 잘 됐고. 그런데도 관객들에게는 ‘화녀’가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이에요. 그 영화가 더 충격적이었으니까요. 사실 ‘화녀’를 찍으면서 다시는 영화를 안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약값이 없는 상황이면 몰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여기저기서 제의가 와도 안 하겠다고 하니까 충무로에 ‘윤여정은 굉장한 부잣집 딸이라더라’는 소문이 났었대요.
그런 상황에서 한진영화사에서 영화 제의가 들어왔어요. ‘여대생 또순이’라는 거였죠. 제작자가 한갑수씨였는데 감독하고 둘이 저희 집까지 쳐들어와서 설득을 하는 거에요. 귀찮은 마음에 내가 출연료 100만원을 불렀어요. 당시 내노라하는 윤정희, 신성일씨가 50만원을 받을 때니까 어마어마한 돈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10만원짜리 수표 열 장을 내놓는 거에요. 그래서 이번에는 자동차가 없어서 못한다고 핑계를 댔죠. 감독이 자기 피아트를 집 앞에 갖다놓더라고요. 무슨 핑계를 대도 안 통하니 결국에는 찍을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시작한 영화니까 촬영에 들어가서는 후회가 많았죠. 참 한심하더라고요. 김기영 감독하고 작업한 게 있어서 그랬는지 다른 방식은 눈에 안 차는 거에요. 촬영을 나가면 여배우가 감독을 불러서 뭐라고 해요. 좀 있으면 또 남자주연이 부르죠. 그러면 콘티를 다 바꾸는 건가 봐요. 처음에는 나는 이미 돈 받았으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더빙할 때 보니까 엔딩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원래 시나리오에는 분명 내가 엔딩이었는데 다른 배우로 바뀌었던 거죠.
어린 마음에도 이건 뭐 영화도 아니구나 싶었죠. 김기영 감독은 누가 와서 콘티를 보자고 하면 그래도 ‘볼 것 없어’ 그러고 치워버리거든요. 그래서 더빙작업에는 참여를 안 하겠다고 했죠. ‘충녀’도 아마 김기영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안 했을 거예요.
김 감독님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참 많이 죄송했어요. 내가 이혼하고 나서도 전화를 많이 주셨거든요. 좀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면 좋은데 김 감독님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왜 그렇게 됐어? 어떻게 좀 잘 참아보지’ 그럴 텐데, 김 감독님은 딱 전화해서는 대뜸 ‘손해야, 손해. 그놈을 왜 놔줘, 그걸. 도장을 찍어주지 말지’ 그러는 거예요. 옳건 그르건 그 상황에서는 그런 말이 너무 싫잖아요. 어쩌다가 연극이라도 할라치면 꼭 객석에 와 앉아 있어요. 끝나고 나면 또 골지르는 말만 하는 거에요. ‘좀 잘하지 그걸 연기라고 했어?’ 몇 년에 한번씩 꼭 그러니까 나도 신경질이 나잖아요.”
‘한 넝쿨에 호박’
-윤여정씨는 영화도 영화지만 TV 드라마에서 더 눈부신 활약을 했죠. 그 가운데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 ‘장희빈’이었고요. 이전 드라마의 발랄한 이미지와는 달리 표독스런 면이 강하게 부각된 드라마였습니다.
“머리를 위로 빗어 넘겨서 나온 이마가 강조되니까 이미지가 굉장했었죠.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였어요. 아마 MBC가 제대로 시청률을 올린 첫 프로였을 걸요. 당시만 해도 TBC의 위세가 참 대단했어요. MBC는 후발업체였고. 그때 제가 동아제약의 오란씨 첫 모델이었는데 1년 하다 잘렸잖아요. 사람들이 포스터만 보면 ‘나쁜 X’이라며 눈을 찔러놨거든요.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지금 생각해보면 잠깐이었어요. 어쩌다가 이름만 반짝 난 거였지. 이혼하고 돌아와서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연기가 참 안 되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연기를 못하나 곰곰이 따져보니까 결혼 전에 연기를 워낙 짧게 했어요. 1967년에 데뷔해서 1972년에 미국에 갔으니 5년밖에 안 한 거잖아요. 당연히 고생을 할 수밖에요. 배우들, 이름 나는 거 하나도 좋아할 거 없어요. 그 허망한 이름값을 꼭 해야 하거든요. 이름은 높은데 연기가 안 되면 본인만 괴로운 거예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했던 결혼이 깨진 뒤에는 꽤 힘든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혼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나요?
“솔직히 나는 재혼한 사람은 참 용감하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결혼상대는 꼭 자기랑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잖아요.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다시 남자를 골라도 비슷한 남자를 만날 것 같더라고요. ‘한 넝쿨에 호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외모는 어떨지 몰라도 두 번째 만나는 남자도 속은 같은 남자겠거니 싶었죠. 나는 자신 없어요. 또 만나면 큰일이지. 한번은 누가 묻길래 내가 그랬어요. ‘내 안목이 조영남을 고른 안목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이 안목을 믿고 재혼상대를 고르겠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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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처음 결혼할 때는 조영남씨의 무엇에 반했던 거예요? 자유분방함이나 재주 많음에 끌렸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나 보죠?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나도 가만히 생각을 해봤죠. 우선 내가 정말 노래를 못해요. 완전히 음치라서 드라마 작가들에게 ‘다른 건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하겠지만 노래하는 건 쓰지 마세요’ 하고 부탁하곤 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노래 잘하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요.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천부적인 게 없어서 늘 노력으로 버티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끼가 많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어요,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그 사람은 굉장히 재주가 많았죠.”
“이혼 없었으면 연기도 없었다”
-제가 느끼기에는 연애나 신혼시절 두 분이 열렬히 사랑했을 것 같아요.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은 절보고 참 독하고 용감한 여자라고 그랬어요. 미국에서 우리 이웃이었던 분들은 슬퍼하기도 해요.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헤어질 수가 있느냐는 거죠. 솔직히 나는 거의 기억을 못해요. 결혼생활은 아예 잊어버리자고 작정을 했었거든요. 계속 그렇게 다짐을 하면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정말 까맣게 잊어버려요. 남들이 ‘그때 그랬지’ 그러면 ‘내가 그랬어?’ 하고 되물을 정도니까요. 딴 사람 얘기 같아요.
미국에 있을 때 나랑 친하게 지냈던 분 얘기로는 내가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사람처럼 살았대요. 아기 잘 때 동화책 읽어주고, 놀이터에 나가서 데리고 놀고, 커튼을 직접 만들어 달아놓고, 수건에 수도 놓고. 심지어… 조영남씨가 두부를 좋아하거든요. 우리가 미국에서 살 때는 두부를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내가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다는 거 아니에요, 별을 따다 바치는 심정으로.
그랬는데, 이제는 내가 굉장히 메마른 사람이 됐어요. 아마 한번 그런 삶을 끝내고 나니까 다시는 안 하기로 작정했나 봐요. 지난번에 노희경 작가가 한 영화잡지에 나에 대해 쓴 글을 읽다가 ‘젊은 나이에 이혼…’ 어쩌고 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중에 희경씨한테 ‘너 내가 젊은 나이에 이혼한 줄 어떻게 알았니?’ 하고 물었더니 ‘뻔하죠’ 그러는 거예요. ‘내 기사를 보다 내가 울다니 나도 참 늙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한테 그랬어요. ‘되새겨보니 내가 이혼을 서른 몇 살에 했더구만, 그러면 중매라도 하지 어떻게 그렇게 그냥 놔두냐? 이 나쁜 것들아!’ (웃음)
이혼했을 때 나는 내가 쉰 살쯤은 된 줄 알았어요. 모든 게 끝났다, 미래를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정통으로 느낀 슬픔이었거든요. 한번은 캐스팅 중에 ‘다른 사람이 하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안 나타나는데, 윤여정이가 하면 그게 살아난다’는 말을 들었어요. 물론 칭찬이었죠. 그렇지만 나는 ‘내가 정말 가슴 찢어지게 살았나 보다’ 싶더라고요.
어려서 영화를 할 때는 공포, 슬픔, 눈물, 그런 연기를 잘 못했어요. 최무룡 선생님한테 ‘선생님은 어떻게 우세요?’ 하고 물었을 정도니까요. 감정의 오르내림을 타는 그런 연기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이혼을 하고 나자 그런 연기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동료들한테 칭찬도 많이 들었죠. 생각해보면 내가 조영남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인생을 끝냈기 때문에 배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나 보다 싶더라고요.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잘 못 우는 배우였을 거예요. 그러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좀 안됐다 싶기도 하고….”
뒤늦은 여우조연상
-이혼 후에는 조영남씨와 말도 안 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참 못난 사람이죠. 정말 성격차이로 이혼을 했다면 또 모르지만 우리처럼 이혼했을 때는 그게 잘 안 돼요. 된다면 거짓말이에요. 솔직히 아직까지도 용서가 잘 안 돼요. 물론 밖에 나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아요. 제 얼굴에 침 뱉기니까요. 이혼한 사람들끼리 서로 치고 받으면 그게 또 무슨 꼴이겠어요. 어른스럽다는 게 다른 게 아니잖아요, 참는 사람이 어른이지.
-조영남씨 인터뷰를 보니 윤여정씨에게 굉장히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누구처럼 회고록 쓰지 않아 고맙다고요.
“고마워해야 될걸요. (웃음) 소설가 최인호씨가 나나 그 사람과 모두 친해요. 그런데 최인호씨가 나를 만나면 ‘××네 출판사가 요즘 책이 안 나가서 어렵대. 네가 좀 도와줘라’하고 농담을 해요. 내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나요. 자기가 그 동안의 이야기 전부 대필해서 출판사도 살리고 돈도 벌고 그러겠다는 거예요. (웃음) 지금은 줄었지만 예전에는 회고록 쓰자는 전화가 많았어요. 처음에는 화를 내고 그랬는데 김수현씨가 옆에서 보더니 ‘그걸 왜 그렇게 힘들게 거절하니? 3억만 불러, 그러면 다시는 전화 안 올 거다’ 그러더라고요. 3억은 너무하다 싶어 2억을 불렀더니 정말 다시는 전화가 안 오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