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이병률
늑대와 사막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 초원 외
내일은 죽겠다고 마음을 먹는 여자는
사진가에게 전화를 걸어 촬영 예약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사진을 누구에게 보내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었던 걸까요
여자는 공들여 차려입고 사진가가 만나자는 촬영지로 향했습니다
나무 밑에서도 한 장
산책로의 긴 의자에 앉아서도 한 장
들꽃 더미 속에 들어가서도 한 장
여자는 사진을 찍기라도 잘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 사진가는 여자를 물가로 데리고 갑니다
여자를 물가에 세워 놓은 사진가는
신발과 양말을 차례로 벗더니 연못 반대편으로부터
첨벙첨벙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도 서보라고 하고
저렇게도 해보라고 하고
연못 저만치에서 물을 헤치고 걸어들어와
사진가가 열심히 여자를 사진 찍는데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사진을 찍으려 했지
그 사람을 물에 빠뜨려 바짓가랑이까지 젖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흐느껴 운 것은 발아래께로 밀물이 몰려와서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으려는 가에 대한 이유는 없어도
이 밀물로 살 수는 있을지도요
여자는 사막에 가서 죽을 수 없다면
늑대 무리의 포로가 되어 그렇게 초원에 쓸려다니다
눈발에 묻히면 좋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이 삶을 실패라고 한다면 모욕일 거예요
그러니까 사진을 받더라도 딱히 어딘가에 사진을 남길만한
어떤 여분의 이유가 따로 있었을리가요
사진을 받기로 한 날 그녀는
다시 그날이 마지막인 것처럼
직접 사진을 받아야겠다며 사진가를 찾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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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를 지하철에서 보았다
내가 타고 있던 지하철 한 칸의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안 쳐다보는 듯하면서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그때 말 한 마리가 나타났지
사람들은 말은 쳐다보지도 않았어
붓질을 하듯 휘적휘적 꼬리만 흔드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긴 몸뚱이를 돌리려 하거나 발길질을 하지 않았어
지하철 바깥은 온통 안개가 덮여 있었는데
차라리 안개가 아니라 흰 물에 빠진 채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지
말이라면 타야 해
멀리 갈 수 있다면 말의 내는 바람 소리에라도 타야지
이대로 세상이 침몰하려 한다면
말 뒤에는 누구를 태울까
저 시선들을 마비시켜 줄 사람이면 어떨까
혼돈이 네온사인이 되어 걸린 이 나라에
무리를 지어 떠도는 몇 가지 의미라도 태워야 할까
원하지 않는 것들이 저절로 이뤄지고 있었어
그것이 인생이라는 더미
이번엔 원하지도 않은 내 말이 생긴 거야
말을 타야지
말이니까 먼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겠지
사람들 시선 때문에 이 말을 지하철 안에서 놓치더라도
나는 어디 멀리서도 이 말을 알아보겠지
말도 여기까지 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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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 마종기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