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폐회원 여러분!!!
이 시간은 항상 쉬어가는 코너....오늘도 재미있는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 할 시간이 돌아왔군요
광해군편은 별로 기술할 내용이 없어 오늘 기술코져 하는"유하장군" 편을 끝으로 마감키로 함을 알려드리면서~
광해군 무오년에 만주의 누르하치가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의 신종은 우리 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던바, 우리 나라에서는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응서를 보내어 이를 구원케 하였다.
그러나 강홍립이 의리를 저버리고 누루하치에게 항복을 하자, 선천부사로 있다가 그의 좌영장으로 출정했던 장군 김응하는 대노하여 홍립을 꾸짖고 그의 포수 천여 명을 거느리고 약한 명군 편을 들어 적장 수십 인과 적병 5천여 명을 쓰러뜨렸다.
그런데 그가 한참 용전분투하고 있응 때, 갑자기 큰 비바람이 불어와 모래와 티끝이 마구 날려들므로 활을 쏠 수가 없어 크게 패하게 되자,누루하치의 군사들이 맹렬히 공격해 들어 오면서 부하들이 하나 둘씩 흩어져 마지막에는 응하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활을 들어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칼을 빼어 들고 닥치는 대로 무찔러 나갔다. 그러나 칼마져 부러지자 하는 수 없이 부러진 칼자루만 들고 버드나무 아래 지쳐 쓰러졌다. 무지한 오랑캐 군사들도 그의 눈부신 용전에 감복하여 그의 시체를 거두어 고이 장사지내주고 유하장군(柳下將軍)이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김응하가 죽기 직전, 그는 전포를 찢어 전사일자(戰死日字)를 혈서하여 그가 타고온 말의 목에다 매었다. 그리고 말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전하라고 이르고 죽었는데, 그 말은 사흘 만에 본가에 도착하였다. 응하의 아우 응해(應海)는 그 혈서 전포와 다른 의장 등으로 형의 무덤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말은 그 뒤 초료(草料)를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짐승이라도 그 의를 아는 높은 뜻이 있음을 기리어 관곽을 만들어 후히 매장해 주었는데, 그 무덤은 오늘날까지 남아 내려온다.
또 장군 밑에 통인으로 있던 김철현이란 사람은 그 때 나이 열 아홉으로 갓 장가를 든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장군이 순절할 때 그에게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라 일렀으나 그는 듣지 않고 용전하다 죽었다.
뒤에 조정에서는 김응하 장군에게 영의정을 중직하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통인 김철현에게는 그의 집을 십세복호(十歲復戶;10년 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해 줌 )시켰고,의주에 지은 김 장군의 충열사에 그의 화상을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장군 김응하는 본시 강원도 철원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온 고을 안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열 살 때 양친을 여의었고, 임진왜란 때는 열 네 살의 어린 나이로 그의 아우를 데리고 잘 피난하여 목숨을 보전했다. 차츰 장성함에 따라 힘이 장사여서 무슨 일을 하든 남의 몇 갑절을 해냈으며, 특히 사냥을 즐기었다.
을사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북해변장,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몸과 마음이 매우 웅장하고 장대하여 능히 열근 고기와 두어 말 술을 한꺼번에 마기고도 정신을 잃는 일이 없었다.
또한 말타기 활쏘기를 잘하여, 활을 쏘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말을 달리면서 투구를 벗어 땅에 던지고 뛰어 내려 그 투구를 집어 쓰고 쫓아가 다시 그 말을 탈 수 있었던 용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오성 이항복의 지지를 받아, 경원부사에 올랐으며, 이어 선천부사로 전직되어 가 있다가 만주로 출정하였던 것이었다.
첫댓글 이** 무더운 여름 지나느라 고생 많았겠소
이조 500년사 용장들의 면면을 보면 남달음이
있지안소이까 잘보고 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