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막을 내린 제7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에 오른 22편의 작품 중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 '아노라(Anora)'(미국, 숀 베이커 감독)는 여러 부문에서 미국과 러시아 합작 영화라는 느낌이 강하다.
미국 감독에 러시아 출신 배우들이 주연 혹은 주연급으로 열연하고, 양국의 문화가 영화 속에서 겹쳐지는 것은 물론, 대화도 러시아와 영어로 진행된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러시아인 3세대 여성의 성노동자(스트리퍼)가 러시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의 아들과 미국에서 '거칠고 코믹한' 사랑을 나누는 스토리 덕분이다.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의 포스터/사진출처:kp.ru
매춘 여성이 돈 많고 매력적인 독신남과 만나 사랑을 나누는 20여년 전의 영화 '프리티 우먼'(게리 마샬 감독, 리처드 기어, 줄리아 로보츠 주연, 1990년)의 현실판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아노라'는 현대판 신데렐라를 꿈꾸는 하층 여성의 삶과 사랑을 코믹하게 그렸다는 찬사를 받았다. 베이커 감독은 시상식에서 감격에 겨워 "이 영화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노동자들에게 바친다"고 했다.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kp.ru) 등 러시아 매체와 영화 포탈 키노포이스크 등에 따르면
제목 '아노라'는 극중 스트리퍼 역할의 여주인공 이름인 '아노라'에서 따왔다. 애칭인 '애니'로 불러 주기를 원하는 '아노라 미크헤예바'(마이키 메디슨·Mikey Madison 분)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할머니가 여전히 러시아어만 쓰는 미국 이민 3세다. 그녀는 소련권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뉴욕의 브라이튼 해변 지역에서 자랐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할머니 덕분에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만, 쓰거나 '우즈베키스탄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녀의 직업은 뉴욕 브루클린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스트리퍼. 남자들의 무릎 위에서 춤을 추면서 때때로 '에스코트'(남자와 동행 여행)를 하고, 매춘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가 '프라이빗 댄스'(고객과의 1대1 댄스)를 선보인 고객은 대부분 그녀의 아버지 정도 나이의 중장년 남성들.
아노라의 장면들/사진출처:칸 국제영화제, CRE FILM
그러던 어느 날 러시아 올리가르히 반야 가문의 아들인 20대 초반의 이반 자하로프(마크 아이델스타인·Mark Eidelstein 분)가 그녀를 불렀다. 한 눈에 아노라에게 빠진 이반은 개인적인 만남을 이어가다가 1만5천 달러를 줄테니, 1주일간 같이 놀아줄 것(에스코트 역할)을 제안한다. 당연히 애니도 동의하고..
둘은 서부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애니에게 푹 빠진 이반은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한다. 삶에서 절대로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 그녀는 즉각 노!
그러나 미국 여성과 결혼하면 엄한 부모가 있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반은 그녀와의 결혼에 집요하다. 공교롭게도 라스베이거스는 사전 절차 없이 즉시 결혼할 수 있는 곳. 둘은 우여곡절 끝에 합법적인 부부가 됐다.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면 '모래 속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처박는' 낙타와 같이 무책임하고, 비디오 게임이나 즐기는 아들과 달리, 이반의 부모는 계급적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매춘부와 결혼한 아들이 탐탁치 않을 수 밖에. 급기야 어머니(다리아 에카마소바·Daria Ekamasova 분)는 둘을 떼어놓기 위해 마피아 '이고르'를 미국으로 보냈다.
마피아 역도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가 맡았다. 벌써 세 번째(6번방·Coupe number 6, 페트로프 독감·Petrovs in the Flu, 아노라) 칸 국제영화제에 등단한 중견배우다. 특히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의 영화 '쿠페 6번'에서 영혼이 풍부한 러시아 광부 역을 맡아 주목을 끌었다.
극중에서 그는 '언제든지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마피아다. 애니는 그의 눈을 보고, '(그녀가 경험한?) 강간범의 눈을 닮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애니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인간미 훈훈한 포옹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와 '공생 관계'를 맺어간다.
아노라의 주연들. 왼쪽부터 이반 역의 마크, 애니 역의 마이키, 이고르 역의 유리/사진출처:SNS
애니는 잘생긴 왕자로만 보였던 이반이 부모의 억압에 점점 더 불쌍한 아이라는 걸 알알아챘다. 또 자신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동이 달라지는 점도 확인했다. 애니의 사랑은 그의 엉뚱한 반전 매력과 함께 점점 더 짙어지고..
둘을 떼어놓으려는 이반의 부모에게 애니는 몸부림치며 저항한다. 아프게 이 과정을 지켜보던 이반은 역시나 무책임하게 집을 나가버린다. 애니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또 러시아 마피아들은 돈을 다 받기 위해 이반을 찾아나서는 어색한 여정을 함께 한다. 그들은 관객들이 깜짝 놀랄만한 곳에서 이반을 찾아내는데..
러시아의 한 영화 평론가는 "애니와 이반의 관계(결혼 생활)가 제 3자의 개입 속에서도 살아남을 지 여부가 주요 관심사였는데, 영화 '아노라'는 막판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평했다.
철없는 이반 역을 맡은 러시아 배우 마크 아이델슈타인은 유리 보라소프와 달리 칸 국제영화제 참석이 처음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영화 평론가는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2년 전 TV 시리즈 '(바이올린의) 활'(Смычок)에서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알아봤다"고 썼다.
숀 베이커 감독/사진출처:칸 국제영화제
칸 국제영화제 수상작들, 위쪽 사진 2개가 '아노라'/캡처
숀 베이커 감독은 전작인 '레드 로켓'(2021년)을 비롯해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년) '탠저린'(2015년) 등을 통해 소외 계층의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레드 로켓'은 경쟁부문에 진출한 바 있다.
영화 '아노라'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현실 드라마다. 그럼에도 이번 영화제에서 7분 30초간 기립박수를 받았고, 영화제 공식 소식지인 스크린 데일리는 3.3점(4점 만점)이라는 최고 평점을 줬다.
전문가들은 특히 마이키 매디슨의 뛰어난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그녀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2019년)에서 단역을 맡은 뒤 2022년 공포 영화 '스크림 5'로 제대로 얼굴을 알렸는데, 칸 국제영화제에서 실제로 '신데렐라'가 됐다.
'아노라'는 또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정치적인 대립 상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배려하면서 촬영됐다는 분석이다. 러시아에 대한 전형적인 고정관념을 다 깨지는 않았지만, 마크 아이델스타인이나 유리 보리소프, 다리아 에카마소바 등 러시아 출신 배우들을 '잔인한 악당' 이미지로 몰아가지는 않았다.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