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미망인 이야기]
1982년 2월 1일 故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남대문 옆 동방생명 빌딩 28층 삼성그룹 회장실로 첫 출근을 한 필자는 삼성 회장실의 분위기가 상당한 흥분으로 들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흥분된 분위기에는 원인이 있었다.
미국 보스턴 소재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게 된 李 회장이 "18년만의 미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회장의 희망에 따라 필자도 李 회장의 미국 방문을 수행하게 되었다.
미국 방문 등정에 앞서서 李 회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李 회장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이승만(李承晩), 맥아더(Douglas MacArthur), 레이건(Ronald Reagan) 등 세명을 거명했다.
그는 이번 여행을 앞두고 맥아더의 동제(銅製) 흉상(胸像)을 특별히 제작했고, 이 흉상을 미국 방문 길에 버지니아州 노포크市에 소재한 '맥아더 기념관'에 기증할 생각이라면서, 필자에게 엉뚱한 임무 한 가지를 떠맡기는 것이었다.
"맥아더의 미망인이 생존해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 미국 방문 길에 그녀를 식사에 초대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美 국방성 의전 계통을 통해 뉴욕의 월돌프타워 펜트하우스에서 은거 중인 미망인 유진 맥아더(Eugene MacArthur) 여사를 접촉, 그해 3월 어느 날 뉴욕 소재 한식당 '아리랑 하우스'에서 오찬을 대접하는 일정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오찬 당일 식당 앞에서 맥아더 여사를 마중한 필자는 미국 월간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회장의 안내로 도착한 그녀의 왜소한 모습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원래 첫 부인을 사별(死別)한 맥아더는 재혼한 부인 유진 여사에 대한 엄청난 공처가(恐妻家)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왜소한 체구의 여성 앞에서 거구(巨軀)의 맥아더가 그렇게 세상에 호가 난 공처가였다니..."
그러나 식당에 들어가 좌정한 뒤 맥아더 미망인은 순식간에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의 주인공이었다.
이날 2시간 이상 지속된 대화의 7할은 맥아더 미망인의 차지였다. 다음은 그 대화 가운데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대목이었다.
대화 도중 李 회장이 물었다. "한국에 마지막 오신 것이 언제였느냐"고.
맥아더 미망인의 대답이 의외였다.
"맥아더와 한국 사이에 존재했던 특별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대답은 李 회장은 물론, 통역을 하는 필자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미망인의 이 말에 놀라움을 표명한 李 회장이 "그러면 삼성이 귀빈으로 초청할 터이니, 가까운 시일 안에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간곡하게 초청했다. 그런데 李 회장의 이 말에 대한 미망인의 대꾸가 더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한국을 정말 가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한국엘 가려면 내 남편의 허락이 필요한데, 내 남편은 지금 故人이기 때문에 그의 허락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1954년의 어느 날 우리 내외가 다시는 아시아 방문을 하지 않는다'는 맹서를 한 일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독단적으로 이 맹서를 파기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을 첨가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극동지역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나의 남편은 1952년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일본에서 일본 천황을 능가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1952년 해임되어 미국으로 귀국한 後에는 그를 찾아온 일본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1954년 필리핀의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대통령이 2차 대전 중 오스트랄리아로 탈출했던 남편이 필리핀의 레이테 섬을 탈환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라고 우리 내외를 초청했다.
그 당시는 아직 프로펠라 항공기의 시대였다.
우리를 태우고 미국 본토를 떠난 군용 프로펠라 수송기는 발이 짧아서 여러 군데를 기착한 뒤, 마지막으로 일본 토쿄 근처 타찌까와 공군기지에 기착했었다. 7시간 동안 군용 바라크 안에서 머무는 동안 단 한 명의 일본인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거기서 우리 내외는 맹서를 했다.
'이번을 미지막으로 다시는 아시아의 땅을 밟지 말자'고. 그런데 그 뒤 나의 남편은 나를 두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그러니, 나는 나의 남편과의 약속을 내 마음대로 파기할 수 없다 "
李 회장은 이런 맥아더 미망인을 상대로 더 이상 방한 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다.
- 李東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