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옌안의 노래
심영의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60|140×210×13mm|232쪽
17,500원|ISBN 979-11-308-2165-8 03810 | 2024.8.12
■ 도서 소개
뛰어난 음악가이자 불굴의 항일 전사인
정율성의 일대기를 소설로 만나다
심영의 소설가의 장편소설 『옌안의 노래』가 <푸른사상 소설선 60>으로 출간되었다. 정율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했던 의열단 출신의 항일지사이자 중국인들이 열광한 음악가였다. 불굴의 항일 전사였고, 뛰어난 음악가였던 그의 일대기를 소설 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난다.
■ 작가 소개
심영의
소설가 겸 평론가, 인문학자.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5·18민중항쟁 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2020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었으며, 2023년 제2회 광주 박선홍 학술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사랑의 흔적』 『오늘의 기분』, 평론집 『소설적 상상력과 젠더 정치학』 『5·18, 그리고 아포리아』 등을 펴냈다. 2014년 아르코 창작기금과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기금을 받았다. 조선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오랫동안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등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을 강의했다.
■ 목차
프롤로그
1. 1941년 11월 옌안, 1차 심문
2. 1933년 5월 목포
3. 1933년 9월 난징
4. 1935년 3월 상하이
5. 1942년 9월 옌안, 2차 심문
6. 1936년 8월 조선
7. 1945년 8월, 조국을 향해
8. 1948년 평양
9. 1957년 3월 베이징, 3차 심문
에필로그
작가의 말
■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이 소설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에 맞서 투쟁했던 항일운동가들이 그 시절 불가피하게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그들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썼다. 정율성은 뛰어난 음악가였고 불굴의 항일 전사였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입당했고 해방 이후 북한으로 들어가 당의 방침에 따라 북한 공산당원이 되었다. 옌안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가>를,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다. 까닭은 그가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교조주의, 개인 숭배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친일 행위를 했던가? 일본제국의 특무(간첩)였던가? 만주국 혹은 관동군의 장교가 되어 독립지사들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살해했던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점하고 아시아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을 때, 어떤 사람들이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헐벗고 굶주리고 고문을 받으며 혹은 겨울 골짜기에서 죽어갔는가를 냉정하게 돌아보기를. 이 소설의 의도는 오직 그뿐이다.
■ 추천의 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고단한 여정에서 숱한 생명이 원통하게 스러졌으나 끝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항일투사들의 활약으로 결국 해방의 역사를 맞게 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누군가를 배척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역사는 결국 깨어 있는 민중의 힘으로 진보하는 것이지만 민주주의가 후퇴할 때마다 역사의 퇴행이 반복되는 것을 이겨낼 지혜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역사 공부가 그 첫걸음이라면, 정율성이라는 음악가이자 항일지사였던 한 인물의 생애사를 재구성한 심영의 작가의 장편소설 『옌안의 노래』는 그 몫을 충분하게 감당하고 있다.
―윤정모(소설가·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 출판사 리뷰
조국 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한 항일지사 정율성은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위대한 음악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어쩌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했을까. 1945년 광복 이후로 그는 왜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과 중국을 전전해야 했을까. 중국에서도, 북과 남에서도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던 영원한 이방인 정율성의 일대기를 이 책에서 만난다.
1914년 광주에서 출생한 정율성은 1933년 형을 따라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고, 음악을 공부하는 한편 의열단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대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와 대치한 군대는 마오쩌둥의 공산당 군대가 유일했는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본거지였던 타이항산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한국 민중의 해방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였다. 조선의 해방을 위한 투쟁 과정 중 그는 옌안에서 본격적인 공산당원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이 되자 정율성이 속한 조선의용군은 북한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각 정부가 세워진 한반도에서는 무정이 지도하고 있는 조선의용군과 김구가 주도하고 있는 임시정부 모두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해방된 조국에 입국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옌안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가>를,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며 북한 인민군의 사기를 북돋았던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서 일부의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냉전주의적 유물이다. 그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억압에 맞서 투쟁했던 항일운동가들이 불가피하게 공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조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했고 자신의 음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배척되었던 정율성의 삶과 정신을 이 책에서 다시금 조명한다.
■ 작품 속으로
정율성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전투 중인 병사들이 한마음으로 힘껏 부르며 그들의 전의를 드높이는 전투적인 음악을 주로 발표하고 후일 그와 관련된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사정은 그러한 데서 기인했다. 만일 그가 평화롭고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있었다면 보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래서 보편적인 정서에 스며드는 음악가로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크리노바 교수의 권유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서 음악 수업을 더 받을 수 있었다면 그의 음악은 전혀 다른 세계를 선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는 전쟁과 폭력의 시대였다.
율성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고 있는 중국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해방과 중국이 일본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109~110쪽)
율성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하면서 현장에서 음악의 소재와 주제를 찾았다.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보다 더 빠르고 강렬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깊고 오랫동안 자리 잡는 마력이 있었다. 물질적으로 늘 부족하고 장제스군과 일본 제국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옌안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음악회가 중단되지 않았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그리고 적들을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으로서 음악은 존재했고 그 중심에는 정율성이 있었다.
(146~147쪽)
“나라 사이에 진정한 친구란 없다. 필요에 다른 동맹만 있을 뿐이다. 동맹은 언제든 와해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나라가 동맹이 된다. 한때 동맹이었던 나라가 돌연 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국제관계다. 그러하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체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우리는 힘이 없지 않습니까? 힘이 없어서 일본제국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탓에, 장제스든 마오쩌둥이든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조국의 해방이 비로소 가능해지니까. 힘을 빌리는 것은 괜찮다. 문제는 물속의 소금처럼…….”
“물속의 소금이요?”
“그렇다. 소금이 물속에 들어가면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속에 소금기는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칫 물속의 소금이 그러한 것처럼 형체도 사라지고 그 본질마저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1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