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린 1,17-25; 마태 25,1-13
+ 오소서, 성령님
오늘은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나신 성인은, 젊은 시절 이단인 마니교에 빠져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끈질긴 기도에 힘입어 387년 세례를 받으셨고, 391년에 사제가, 5년 뒤에는 주교가 되셨습니다.
성인은 주교 시절인 마흔세 살 무렵, ‘고백록’을 쓰셨는데, 이 책은 어린 시절부터 서른세 살까지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자서전’이라는 문학 자체가 생소했었는데요, 놀라운 것은 성인께서 자화자찬식의 자서전이 아니라 당신의 죄를 이 책에 상세히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의 죄가 후대에도 남겨지고 기억되도록 이런 책을 쓰셨을까요?
성인은 이처럼 죄가 많은 자신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가 그만큼 크시다고 찬미하기 위해 고백록을 쓰셨습니다. 당신의 죄가 클수록, 하느님의 자비가 그만큼 크시다는 찬미가 되기 때문에 당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 받는 것을 많이 부담스러워합니다만, 성인처럼, 나의 죄를 고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성사를 받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교 교의가 확립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셨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된다는 ‘은총론’을 확립하신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말씀을 주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부 철학자들과 논객들은 이 복음의 진리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 안에 서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그것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것을 따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속이고 남들을 속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어리석음과 하느님의 약함이라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앞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고 계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 제대 뒤에, 바로 우리 눈앞에 계시고, 우리가 갖고 있는 묵주에도 계시고, 우리 집에도 계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야 말로 하느님의 어리석음이며 하느님의 약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결혼 풍습은, 신랑과 신부가 먼저 약혼을 한 다음에, 1년쯤 지나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함께 돌아와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요, 오늘 복음은 그렇게 돌아오는 신랑과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던 열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다섯은 어리석고(모라이),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프로니모이).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 막대기에 천을 감싸 만든 횃불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이는 15분 정도가 지나면 꺼지기 때문에, 다시 기름을 적셔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기름이 없다는 것은, 배터리 잔량이 20%도 남지 않은 스마트폰을 들고 한 시간짜리 영상을 촬영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제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거절당하고 상인들에게 기름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 혼인 잔치가 시작되고 문은 닫힙니다.
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태오 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를 마치신 후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프로니모) 사람과 같을 것이다. …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모로) 사람과 같다.”(7,24.2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비교하셨는데요,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오늘 복음의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실천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더러 ‘너의 실천을 나눠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한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기름’이 의미하는 바가 ‘사랑’이라고 주해하십니다. 또한 등은 있었지만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인간 구경꾼들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기름을 꾸려 했던 것은, “다른 사람의 기름으로 빛나는 것, 곧 사람들의 칭찬을 좇으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입니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하느님께 꾸지람 듣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께 칭찬받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셨습니다.
성인께서 고백록에서 하신 말씀으로 맺겠습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안할 길이 없나이다.”
프라 안젤리코, 성 아우구스티노의 회심, 1430년
출처: Fra angelico - conversion de saint augustin - Augustine of Hippo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