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엘로헤이스라엘
(33: 18 - 34: 31)
요약
야곱이 하나님과 약속한 벧엘에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무르므로 큰 시험에 빠지게 된다.
세겜신앙이란 육신을 좇는 기복주의와 안일주의 신앙을 가리킨다. 야곱은 이곳에 머물러야 할 많은 이유가 있었듯 시험은 충분한 이유를 들어 접근한다.
야곱이 서원을 잊고 말씀을 정당 시 했듯 시험도 믿음의 각성이 풀릴 때 온다. 그리고 레아의 실족사건 역시 그의 잘못보다는 야곱의 잘못 때문이었듯 세겜신앙에서는 세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세상 역시 우리를 붙잡으려고 감언이설로 다가오지만 유혹임을 알아야 한다.
강해
오늘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편리한 대로 신앙 생활하다가 큰 시험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 출생지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건만 세겜에서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안일을 좇는 적당주의 세겜신앙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생명 바쳐 경외하는 벧엘의 신앙입니까?
세겜의 신앙이어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대로 야곱이 불순종한 결과 얼마나 큰 시험을 당합니까?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에 격분한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이는 살인죄일 뿐 아니라, 온 가나안 족속에게 벌집 쑤시듯 자극하는 일이요, 할례 받은 언약 백성을 죽였으니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디나의 강간 사건을 우리 신앙에 적용한다면 세상에 마음 빼앗기는 것이요, 할례 받은 세겜 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은 정죄의 칼날에 죽어지는 죄악된 심령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이 자극받아 일어나는 것은 마음에 악성이 살아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겜에서 이런 상태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상태에 있다면 오늘 말씀 들으시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심령 죽은 것을 큰 사건으로 여기지 않고 육신적으로 별 일 없다고 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행복이 없는 것만큼 큰 불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시험은 어떻게 옵니까?
1. 충분한 육신적 이유를 가지고 옵니다.
33:17-18에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랬습니다.
메시야의 조상이 될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 믿음의 사람 언약의 사람인 야곱이 왜 이렇게 숙곳에 머물고 말았는가? 표면적으로 보면 얼른 이해가 안 되지만 본문의 배경을 연구해 보면 그가 숙곳과 세겜에 머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직접적인 이유는 창34:21이 암시하는 대로 그 들판이 넉넉하고 목초가 많아 살기가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목자에게 좋은 목초지는 욕심나는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나안의 젖줄 요단강에서 불과 2-5km밖에는 떨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초지가 발달된 곳이겠습니까?
간접적인 원인은 18절에 “평안히”라고 했듯 모든 시련이 다 사라지고 평안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고생시키던 라반에게서 해방 되었지요. 자기를 죽이려던 형의 원한도 풀었지요. 사랑하는 아내와 디나까지 열 두 자녀 모두 무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대한 재산에 거기다 살기 좋은 곳까지 만났으니 야곱에게 무슨 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럴 때 가장 영적인 위기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씀처럼 야곱 자신을 바라볼 때도 충분한 핑계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수십 년간 쌓여 밀려오는 스트레스와 에서를 맞아 극도의 긴장으로 그 마음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야곱은 백발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었습니다(창42:38, 창44:31). 무슨 큰일을 만나고 나면 불과 한 두 해 사이에 검던 머리가 흰머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천사와 씨름하다 위골된 다리로 한 발짝 전진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에서 지친 소와 양떼 등 생각해 볼 때 숙곳에 멈춰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만합니다.
그리고 대개 야곱을 청춘으로 알고 있지만 나이 또한 적지 않아요. 학자들은 야곱이 라반 집에서 20년 후 귀경을 결심하던 때를 97세로 보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삭이 야곱을 60세에 낳았고(창25:26) 축복할 때 이삭의 눈이 멀 만큼 늙어 나이가 137세였으니 야곱이 집을 나설 때가 77세였습니다. 그 노구의 몸으로 엄청난 일을 했고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기에 좋은 땅을 만났으니 쉬고 싶은 충분한 이유가 안 되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되는데 아주 정착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학자들은 6-7세였던 디나가 처녀가 되었던 것을 보아 야곱이 숙곳에서 10-15년가량 상당 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봅니다. 야곱이가 숙곳에 머물만한 이유만도 열 가지가 넘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충분한 육신적인 이유를 들고 나올 때 사람들은 거기 속아 그 덫에 걸리고 맙니다. 피곤하다. 아프다. 바쁘다. 돈이 없어서, 돈이 많아서, 핍박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나이 많아서, 나이 어려서, 혹은 전통이 그래서, 혹은 이래 살아도 그런 대로 편하게 살아 왔으니까, 혹은 이렇다 저렇다 그럴듯한 이유로 우리 신앙의 열심을 앗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믿음의 긴장을 늦추는 것은 큰 시험인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이 너무도 분주할 때 한적한 곳에 가서 잠시 쉬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몸은 쉴 수 있어도 믿음의 긴장과 근신의 자세를 해체시키는 것은 사단의 시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시험은 말씀을 잊거나 적당 시할 때 옵니다.
33:19-20에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했습니다.
여호와께 제단 쌓는 본문만 보면 야곱의 신앙이 참 좋구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창28장을 보면 20년 전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창28:20-22) 마음 바쳐 서원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돌아왔음에도 그 서원을 망각함은 물론이요, 창31:13에 여호와께서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신 그 명령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 때 시험이 옵니다.
그리고 그가 머문 숙곳은 본래 “오두막집들”이라는 뜻으로 잠시 거쳐만 가야할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땅을 사서 영구 거주할 집과 우릿간을 지어 세겜에 이르기까지 생활기반을 확대해 가며 머물렀습니다.
본래 유목민들은 장막을 짓는데 창세기 기자가 야곱이 집을 지었다고 표현한 것은 거기 정착하려 했던 야곱을 질책하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은 일백 개로 산 땅을 볼 때 영주 거주할 마음을 가진 것을 봅니다. 그리고 벧엘에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세겜에 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한 것을 볼 때 벧엘에 올라가기를 포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안일을 좇는 적당주의 신앙입니다. 그들의 하나님 섬김은 허울 좋은 형식일 뿐 은 일백 개가 암시하듯 세상에다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벧엘의 교인이 아니라 세겜의 교인이란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겜에서 부르는 엘엘로헤이스라엘이란 주여! 주여! 부르는 소리만 있을 뿐이지 다 자기 욕망을 채우는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벧엘 신앙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께만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을 우리 신앙의 모델로 삼아야 하고 안디옥교회를 사명의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이 신앙을 닮지 않았다면 아직 바로 섬기고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바다는 명경지수처럼 보일 만큼 잔잔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적당주의 신앙은 마귀가 주는 가장 무서운 시험입니다.
3. 시험의 원인은 더 깊은 이유 때문에 옵니다.
34:1-2에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사건으로만 보면 100% 디나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모두 아버지 야곱의 잘못입니다. 벧엘에 올라감에 불순종하는 야곱 때문에 가정에 우환이 닥쳐오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 여자들을 보러 갔다가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우리는 디나가 그 땅 남자가 아닌 여자를 보러 나갔다는 말씀을 통해서 다나의 미적인 관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이로 보아 딸 디나는 한참 자기를 가꿀 청춘의 때입니다. 이 때 여성들은 미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강간 혹은 상심한 디나를 세겜이 위로했다는 용어 속에서도 디나가 자기를 아름다움에서 지키려는 마음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자의 마음을 누가 꺾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시험의 원인을 더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 갖고 흠모하게 되는지 진정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가 그랬던 것처럼 벧엘 신앙의 결여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죄악에 행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실로 회개하여 벧엘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4. 시험은 세상의 유혹 때문에 옵니다.
3-4절을 보면 얼마나 세겜이 디나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이처럼 세상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아닌 한 사람 하나 속화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육체와 마음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겠다고 마음 속 깊이 속삭입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세상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공급자이시지 세상이 우리의 공급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세상의 것은 실재 가져 봐야 모두 별거 아닙니다. 돈 많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이 얼마나 아름답게만 보이는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만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야곱의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신앙이 초대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면 분명 타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명이 안디옥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면 역시 불충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과 양태는 다를지라도 그 중심은 같아야 합니다. 그럴듯한 이유로 다가와 적당주의 세겜신앙으로 믿음을 죽이는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항상 깨어 예배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벧엘의 아름다운 신앙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