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נִצָּבִים 니짜빔 & וַיֵּלֶךְ 바옐레크" : 9월 13일 in 5780
신29:10-31:17(To), 사61:10-63:9,사54:11-55:5(Haft), 롬1:10-22,롬10:14-18(Brit), 계5:1-14:20(신약)

니짜빔 - 바옐레크
니짜빔은 주님의 심판석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주님의 심판석 앞에서 누가 설 수 있느냐?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실 주님의 심판석은 내가 주님과 한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우리 몸으로 선악간의 행한 일들을 그 날에 심판 받는다. 왜 몸으로 행한 일을 심판 받느냐? 이 몸이 어떻게 기능하냐는 것이다. 전체 몸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길 원했느냐 아니면 단독자로 기능하길 원했느냐 이것이 주님의 심판석 앞에 설 수 있는 힘이다. 주님의 심판석은 몸의 한 지체들을 전체 몸의 올바른 지체인지 아닌지, 모든 부품들이 전체 몸에 결합하기 합당한지 안한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암세포는 전체 몸을 상관하지 않는다. 이 암세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니짜빔 할 수 없고 다이렉트로 밑으로 내려간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는 것은 전체 몸의 지체가 되길 원하는 길을 걸어온 자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그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할 때 천국 마크를 찍어주시고 (HK) 너는 내 몸의 한 지체다 라고 해서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니짜빔의 파워이다.
니짜빔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준비하는 나팔절이 오기 전에 읽게 된다.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준비하고 우리를 일깨우는 시간들이다. 나는 이 시간을 왜 살고 있는가? 전체와 하나되기 위함인가 아니면 나 단독적인 것을 위함인가? 우리에게 돌이킬 수 있는 시간,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님께서 주신다. 그리고 나면 주님은 바옐레크 하신다.
바예레크 : 그리고 그는 걸었다 / 걸을 것이다
제가 둘로 해석한 이유는, 니짜빔에서 주님 앞에 선 사람은 이미 그 길을 걸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미 완성되어있는 것을 걷게 된다. 니짜빔 앞에서 회개한 사람은 전체의 부분으로 내가 걸어갈 길은 완료되어있다. 그것을 완료형이라고 한다. 단독자는 욕망에 따라서 살기 때문에 완료된 것이 하나 없다. 자기 욕망에 따라서 이리 저리 헤매인다. 정해지지도 않은, 결정되지도 않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계획하지도 않은 것들을 행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승인도 받지 못하고 사라지고 소멸되어진다.
그는 걸었다 : 과거
그는 걸을 것이다 : 미래
그는 다음 한해를 걷게 될 것이다. 미래, 미완료란 생명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 생명이란 그것을 살아낸다. 주님이 완료해놓은 것을 살아낸다. 그것이 미래이다. 우리의 미래란 주님이 다 준비하신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미래를 위해서 모든 천군천사들은 존재한다. 주님의 나라의 모든 파워와 존귀함은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내가 주님이 마련하실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걸을 수 있도록 지키고 예비하는 것이 천군천사와 하나님 나라의 역할이다. 내가 그 길의 끝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한 없이 내려오는 것이다. 네가 그 생명을 살아낼 것이다, 그래서 티슈레이 월에는 기록된다.
경춘이가 만일 니짜빔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섰다라면 전체 중에 하나다 라는 것을 믿는다라면 걸을 것이다. 다음 한해동안 걷는 것을 막는 것이 어떤 것도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믿지 못해서 미래를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짜빔과 바옐레크를 합치지 못한다. 이것은 재앙이다. 단독자의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어제 제자 하나가 와서 울면서 저는 제가 너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원하는 삶이 오지 않아요. 이미 남편도 결정되었고, 내 삶의 수준도 다 결정되어버렸고, 내가 생각했던 삶이 올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펑펑 우는 것이다. 그런 것을 원하면 안된다면서도 내려놓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정한 길을 걸어가고 싶은데 내 속에 원함이 너무 크다고 우는 것이다.
단독자들은 미완료의 비밀을 알 길이 없다. 바옐레크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정하신 삶을 사느냐? 어떻게 미래를 단독자가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서포트 하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어떻게 사느냐? 놀랍게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걸어갔다고 과거형으로 되어있다.
신31:1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모세가 갔다, 이것은 과거형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바옐레크란 미래형이다. 요드가 붙으면 미완료 3인칭이다. 바브는 그리고, 그리고 그가 갈 것이다인데 말이 안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것이다? 동사 형태는 미래 시제인데 왜 과거 시제로 번역을 하는가?
미래 시제가 과거 시제로 전환되고 과거 시제가 미래 시제로 전환되는 독특한 용법이 있는데 그것을 바브 용법 이라고 한다. 바브가 동사에 붙으면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된다. 그것이 바브가 가져오는 파워인 것이다. 바브는 우리 주님을 이야기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못 박혀야 한다. 이 육체가 죽고, 내가 죽는다는 의미는 내가 현재가 되는, 내가 이다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과거에 계셨던 분도 아니고 미래에 계실 분도 아니고 그냥 이다, 현재 이시다. 히브리 말에는 현재 라는 말 자체가 없다. 과거와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점이다. 그냥 역사하고 있는 어떤 분이다. 표현할 길이 없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못이 주님을 의미하는 이유는 자기를 메시아, 현재, 신이라고 하는 자신을 처리하는 단 하나의 빛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과거와 미래를 결정하는 말도 안되는, 자신을 중심으로 시간을 결정하는 말도 안되는 육체, 단독자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미래를 생각한다. 어제 왔던 제자도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봐, 선택한 어떤 것이 나의 미래가 되어버렸다. 자신을 중심으로 시간을 결정한다. 그러나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앞으로 올 시간이란,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앞으로 올 시간이다.
그런데 이 단독자가 죽지 않는 한 이 망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래서 나의 단독자가 죽고, 이 망상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 단독자는 온 세상을 망상으로 처리한다. 허상으로 있지도 않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해석한다. 그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만들어내는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그런 과거, 미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나로 현재로 가지는 우상숭배를 끝내고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현재로 받아들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동사란, 우리의 삶이다. 나의 살아있음이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바브가 결합되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미래와 과거가 바뀐다. 미래가 과거가 되고 과거가 미래가 된다. 어떻게 과거가 미래가 되느나? 하나님이 케뎀에서 이미 완료하신 모든 것들이 미래가 된다. 나의 미래에 하나님이 이미 완료해 놓은 것들이 펼쳐질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자유롭게 왕래한다. 미래는 어떻게 과거가 되느냐? 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이미 하나님이 완료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내 미래가 잘못될까봐 떨려한다. 그것이 불신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내가 잘못될까봐 두려워하는가? 내 육체가 내 현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자체를 내가 만들어낸다.
바옐레크는 물리적 세계의 허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친다.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모세의 나이가 120살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가? 별로 없으실 것이다. 그런데 왜 언급하실까? 모세는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을까? 우리는 바옐레크에서 물리적 세계, 우리의 육체를 현재로 두었다간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세는 120세가 되었다. 이것은 물리적, 육체적인 것을 이야기 한다. 사실 120세란 물리적, 육체적인 것을 넘어서는, 초월하는 나이를 이야기 한다.
바브 용법에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 육체적인 것을 현재로 하지 않았을 때 모세처럼 갈 수 있다. 모세는 그렇다면 미래가 없는 것이냐? 아니다, 모세는 계속 걸어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세의 삶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모세의 미래는 육체의 미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미래이기 때문에 계속 걸어간다. 모세는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영혼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모세는 이미 마지막 날까지 가 있다. 왜? 마지막은 여러분 때이다. 여러분의 마음까지 다 안다고 한다. 모세는 자신의 육체를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단독자를 살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내 삶을 살려고 하다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허상, 망상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란 무엇일까? 모든 실제이다. 이 실제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의 유일함을 영원이라고 하고, 영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물체, 육체를 현재 라고 한다. 이것이 없어지면 시간도 없어지고 다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란 영이다. 현재란 곧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이시다. 주님은 오직 사랑으로만 역사하시고 살아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될 때 주님이 사신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팔절에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 역사해야 한다. 그것만이 모든 과거와 미래를 통합하는 일이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길이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와 하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매일 매일 살 수 있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행하면서, 사랑을 갖고 행한다면 그것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갇혀버리고 만다. 직장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일을 하면서 사랑을 갖고 일한다면 그 속에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면 사랑이 없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은 바로 주님을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이 노래하는 삶을 살게 되어있다.
과거라는 말은 히브리어에는 없다. 문법의 완료시제 라고 한다. 하나님이 미리 완성해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의 노래, 주님의 노래라고 한다.
שיר 쉬르(남성형) : 노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다 완성하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의 신부를 향한 사랑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옴이다. 하늘에서 들리는 사랑 노래이다. 주님이 케뎀에서 다 완성하신 것을 갖고 끊임없이 신부를 향해서 노래한다. 이것을 쉬르 라고 한다. 이 쉬르란, 솔로몬의 아가서 라고 한다. 쉬르 하쉬림 이라고 하면 이때 쉬르는 남성형 형태이다. 왜? 주님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이다. 주님의 노래 소리를 들으시는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노래 소리가 우리에게 있다.
모세가 지금 가르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 두는 이 노래는 쉬라 라고 한다.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한다. 이것은 미완료 시제이다. 바브 용법에서 미완료 시제 라고 하는데 쉬라 라고 한다.
שירה 쉬라 : 신부의 노래, 모세의 노래, 땅의 노래
이것은 하늘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땅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땅의 노래이다. 이것은 우리가 부르는 노래이다. 우리가 신랑을 향한 노래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노래이다. 우주를 움직이는 모든 힘은 노래에 있는데 노래는 이것에 있다.
세상 사람들은 머리가 좋은 것 같다. 요즘 제일 머리 좋은 사람 중 하나가 놀란 감독인데, 테넷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모든 사건의 시작되고 끝나는 사건의 핵심에 노래가 있다. 오페라 극장에서 과거와 미래가 통합되기 시작하고 인버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Opera. 그런데 이 사건의 가장 핵심에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의 삶이 존재하는데 이 여자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이 여자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 Arepo 아레포 이다. 오페라를 거꾸로 하면 된다. 아레포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의 위작이 그 여인에게 전달됨으로 문제가 생긴다. 아레포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노래인데, 그 노래에 의해서 삶이 결정된다. 미래란 정해진 것을 그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신부, 쉬라의 노래란 내가 정해진 것을 그대로 사는 것이다. 신랑의 생명, 신랑의 삶 자체를 살고 있다가 쉬라이다.
이것을 거룩 이라고 한다. 히트 카데쉬, 우리는 끊임없이 거룩해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사람이 거룩해지는데 관심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 흥미, 재미는 다 아레포에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뭐에 흥미가 있는가? 놀랍게도 놀란 감독은 크리스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마땅히 모든 관심과 흥미를 아레포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이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이 신성하게 된다는 것은 카도쉬, 히트 카데쉬, 스스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케뎀에서 정해진 형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가 현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페라란, 쉬르를 영광이라고 한다. 하늘에는 영광이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그분이 다 정해 놨다는 것이다. 신부만이 자신을 거룩케 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에 자기의 모든 눈과 귀와 코와 입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여러분은 뭐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혹시 나의 영광, 과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나의 과거에 온통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네가 나의 과거의 영광을 해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영광스럽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노래 중에 노래를 하신 분이다.
시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쉬르란, 안식일을 위한 것이다. 사실 안식일이란 왕국, 땅, 신부를 이야기 한다. 이것은 주님의 노래인데 그 신부를 위한 노래이다. 주님은 이 노래만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정하신 완료해놓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쉬라를 부르는 것을 통해서, 오직 쉬라를 통해서 완전해진다.
신31:30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עַד תֻּמָּם 아드 투맘 : 끝까지
투맘 : 완전함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길은 쉬라 밖에 없다. 우리는 쉬라에 의해서 완전하게 된다. 쉬라가 아니고는 완전하게 될 수가 없다. 왜 그러냐? 쉬라란 이미 완료되어있는 것을 미래로 여기는 것이다. 완료가 미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내가 걷는 모든 길들이 주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주님의 모든 관심사는 거룩하게 되는 것 밖에 없다. 이 땅에서의 노래, 여인의 노래는 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을 성도 라고 한다. 이 쉬라에 의해서 완전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이 자기 욕망을 위해서 살게 되면, 자기 욕망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지만 불완전함 그 자체이다. 어떤 하나도 영원히 가지 않는다. 우리가 완전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사는 것이 영원히 가야하고 내가 사랑한 것이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게임을 사랑한다면, 게임을 하면서도 왜 맘이 편치 않을까? 그 삶이 영원히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이가 게임 추천을 실수로 나에게 보내버렸다. 그런데 왜 기겁을 하고 놀랐을까? 자기 사랑이 완전치 않음을 안다.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 사랑을 하고 있다. 멸망할 사랑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영원히 가야한다.
아드 투맘, 완전해질 때까지 가르쳐준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 이 노래를 불러운 사람들의 마지막에는 오직 주님만을 노래하는 것이 있다.
계14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오페라, 영광의 소리이다. 거문고를 타는 소리는 하늘의 노래이다.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것은 하쉬라 하다샤이다. 이것은 땅에서 속량 받은 144,000 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다. 이 노래는 신부들의 노래이다. 거문고 타는 소리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로 대단한 소리다. 많은 물 소리와 같다. 주님께서 이미 다 완성해 놓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케뎀에서 주님이 완성하신 것을 듣는다면 정말 행복한 것이다. 경춘이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완성된 노래를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런데 테넷에서 보면 오페라 극장의 소리를 들으려고 온 사람들을 다 잠재운다. 다 자고, 다 죽이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있지 않은 사람들, Attention Stand 해있지 않은 사람들, 사탄은 다 잠재우고 죽은 가운데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살린다. 폭탄을 다 제거한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것을 알고 있는지 정말 놀랄 지경이다.
우리는 주님의 노래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노래 소리와 함께 결합해야 할 소리가 있는데 그것을 쉬라 라고 한다. 마지막 때는 하늘의 노래 소리와 땅의 노래 소리가 결합한다.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테넷, 이것이 결합해야 한다. 흑백, 미래와 과거가 결합한다. 그래서 땅에서 속량 받는 144,000, 신부의 노래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다.
삼하22:1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쉬라를 하시기 위함이다.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함이란, 인류가 이 미래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류가 자기가 시간의 신이 되어서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미래를 사는 것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님은 다윗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다윗이 부른 노래는 하쉬라 하조트인 것이다. 인류에게 하나님이 정해 놓은 모든 것들이 미래이다, 이것이 노래이다. 이것이 다윗을, 사람을 완전하게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평생을 살았다. 어떤 상황이 와도 다윗은 노래했다. 그것은 다윗의 노래가 되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마치 다윗과 같은 노래를 카톡으로 하나 받았다. 제자 하나가 살아가면서 부부 사이에 위기가 오고 어려움이 왔었다. "카톡 내용"
이것을 노래 라고 한다. 다윗이 했던 노래이다. 모든 것은 다윗의 노래가 되었다. 자기가 원수에게 쫓겨 블레셋에 가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짓을 할 때에도 그 이야기는 다윗의 노래가 되었다. 하나님의 노래 소리를 듣고, 그분을 향해서 응답하는 노래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완전한 자가 된다. 144,000명이란,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들인 것이다. 이 쉬라를 부르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꼭 기억하자. 그리고 이 쉬라를 부르면서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자.
사24:16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욥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우리 주님은 밤에 노래를 주신다. 미래란 인간에게 있어서 깜깜하다. 그런데 주님은 밤에 노래를 주신다. 미래의 영역 속에 미래를 주신다. 쉬라는 다 미래의 영역속이다. 사람이 타락을 하면 자기의 욕망의 미래가 밤의 때가 아니라 낮의 때가 된다. 그것이 선명해진다. 그것을 자기가 보는 줄 안다. 환한 낮의 때인 줄 안다. 그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은 미래에 대한 것인데, 깜깜하지 않고 자꾸 환하게 보인다. 그런데 주님은 쉬라를 밤에 주신다. 미래가 밤이여야 한다. 밤은 라일라, 훈련하는 때이다. 밤의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노래를 주신다. 왜 밤의 때에 노래를 주시느냐?
사람이 밤에 거룩한 결합을 해야 한다. 밤에 신랑과 신부가 거룩한 결합을 할 때 그 소리가 쉬라의 노래 소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둠의 사자들에게 먹히고 말 것이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돌아다니는 어둠의 사자들에게 먹히고 말 것이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생명, 계획이 있고 나의 미래란 하나님 손에 달려있고 나는 오직 하나님을 노래하리라, 이것이 밤에 고백하는 사람의 쉬라이다. 사람이 자신의 욕망에 의한 밤의 결합을 한다면 사람은 사탄에게 다 먹혀 버리고 만다. 사람이 밤에 쉬라를 통해서 자신의 정욕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닌 내 속에 완전한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거룩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해서 태어나신다. 거룩한 아이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아이는 이 땅에서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님을 찬송하는 쉬라가 울려 퍼진다. 시므온의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안나의 찬송 소리, 스가랴의 찬송 소리, 이 모든 것들은 아래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스가랴, 시므온, 안나의 노래 소리다.
이 쉬라를 배우는 사람은 이 땅에서 완전해진다. 내 안에 완전한 생명이 있음을, 주님의 완전한 계획이 있음을, 바브이신 주님을 여러분들에게 받아들이시기를 바란다.
* 기도
주님 내 평생에 주님을 노래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주님을 노래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이미 완전한 계획과 우리의 완전한 구원, 구속을 이미 가지고 계심을 노래하지 않겠는가? 내가 사는 모든 삶은 원수를 무찌르는 주님의 손임을 노래하지 않겠는가? 매일 완전의 길을 걸어가서 완전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꿈꾸지 않겠는가?
주님, 나의 삶을 노래로 창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 노래임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에게 내 입에 이 노래를 두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히 이 노래의 말씀을 읽고 낭송하고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내 자신의 육체를 현재로 만들어서 나 스스로 신이 되어서 끊임없이 나의 영광을, 나의 거룩을 내가 만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고 밤의 때에 음란을 행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 밤의 때에 나를 거룩하게 하여 쉬라의 노래를 부름으로 나의 욕망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닌 주님이 정해 놓은 것이 미래에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