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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언(彙言) - 상촌 신흠
《서경》에 나오는 고(誥) 체제의 글은 당시의 방언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로서는 구두조차 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전(二典 요전(堯典)과 순전(舜典))ㆍ삼모(三謨 고요모(皐陶謨)ㆍ대우모(大禹謨)ㆍ익직(益稷))ㆍ이훈(伊訓)ㆍ열명(說命) 같은 제편(諸篇)은 곧 군신간에 문답한 말이기 때문에 문자가 순탄하게 놓여져 한번 보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모르는 자들은 도리어 방언을 가지고 문장의 작법(作法)을 삼아 일부러 이해하기 어렵도록 까다롭게 만들고 있다.
주(周) 나라 태왕(太王) 때에 은(殷) 나라가 쇠퇴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망할 정도의 혼란상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수(受주(紂)의 이칭)의 악행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이미 상(商) 나라를 뒤엎을 뜻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이 무왕(武王)을 비난한 것도 대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장공만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라 주자양[朱紫陽 주희(朱熹)]도 언급하였다. 그러고 보면 태백(泰伯) 같은 이야말로 지극하고 진선(盡善)한 분으로서 인륜의 귀감이 된다 할 것인데, 성인께서 지덕(至德)으로 그를 일컬으신 것도 뜻으로는 이회(理會)하면서도 다 말씀하시지 못한 것이다.
-주) 태백은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였는데, 태왕이 막내 아들인 계력(季歷 : 문왕의 아버지)에게 뜻을 두고 그의 아들인 창(昌)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자, 동생인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 땅으로 도망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태백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1천여 가(家)나 귀의하며 오태백(吳泰伯)으로 칭송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卷四, 13》 성인은 공자를 가리키는데 《論語 泰伯》 첫 장에 “태백은 지극한 덕의 소유자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하였다.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는 공자가 목욕하고 토벌하기를 청한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중니는 그 일에 대해 군사를 먼저 출동시킨 다음에 보고했어야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임금을 시해한 적(賊)은 아무나 잡아 죽여도 된다고 말을 하지만, 공자는 당시에 단지 치사(致仕)한 일개 대부(大夫)에 불과한 몸이었다. 임금의 권한이나 방백(方伯)ㆍ연수(連帥)의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먼저 출동시킨 다음에 보고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대부의 신분으로서 제후의 일을 행하여 먼저 출동시킨 다음에 보고한다면, 어찌 후세에 표문을 올리는 즉시로 출동하는 폐단을 열어 주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의리로나 형세로 볼 때 모두 안 될 일이다. 그런데도 호씨는 이와 같이 주장했으니, 잘못되었다 하겠다. 호씨가 이전의 역사를 논한 것을 보면, 대부분 억측으로 비평을 가하면서 전후 좌우의 상황은 다시 살피려 하지 않았으니, 선유 중에서도 지나치게 과격한 자라 할 것이다. 반드시 정자(程子)가 논한 것과 같이 된 뒤에야 옳다 하겠다.
-주) 공자가 목욕하고 토벌하기를 청한 일 : 제(齊) 나라 대부인 진성자(陳成子)가 임금인 간공(簡公)을 시해한 일이 발생하자, 당시 노(魯) 나라에서 치사(致仕)하고 머물고 있던 공자가 목욕 재계한 뒤 애공(哀公)에게 나아가 진성자를 토벌하기를 요청한 일임. 《論語 憲問》
-주) 표문을 올리는 즉시로 출동하는 폐단 : 표문만 띄우고 그에 대한 명령도 받지 않은 채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함. 《晉書 宣五王 新野莊王歆傳》에 “공은 변방을 지키는 책임을 지고 임금으로부터 중한 신임을 받고 있는 처지인데, 표문만 올리고 곧장 행동으로 옮긴다 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하였음.
탕왕이나 무왕이 없었다면 생민이 못살게 되었을까? 걸(桀)의 후손 중 어찌 재질이 중간쯤 가는 종성(宗姓)이라도 없었겠는가. 그리고 주(紂)의 시대에도 기자(箕子)와 미자(微子)같이 위대한 현인이 있었는데, 그들을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일찍이 맹자가 도응(桃應)의 물음에 대해 대답한 것을 의심했는데, 이는 세상에 행할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가르쳐서도 안 되는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임금이 만든 것이다. 임금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임금을 낳아 주신 분이다. 이 세상에 임금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는데, 임금이 아버지로 모시는 분이라면 아무리 군상(君上)이라는 칭호는 없다 하더라도 신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맡겨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하가 어떻게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며, 임금이 어떻게 금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법을 만드는 자가 임금인데, 신하가 자기의 아버지를 잡도록 들어 주다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신하가 그를 잡으면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고 임금이 금지시키지 않으면 아버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인데,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무시하면서 자신들은 법을 지켰다고 한다면 될 일이겠는가. 몰래 등에 업고 도망친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자기 아버지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한 채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고요(皐陶)의 입장이 된 사람은 어떤 신하가 될 것이며, 순(舜)의 입장이 된 사람은 어떤 임금이 되겠는가. 법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한 채 그 아버지로 하여금 일개 유사에게 용납받지 못하게 한다면, 부모의 뜻을 따르는 자라 하겠는가. 그리고 일단 나라를 버리게 되면 순도 하나의 필부에 지나지 않는데, 아무리 바닷가로 도망쳐 산다 해도 고요의 입장에 있는 자가 유독 그만 잡을 수 없겠는가. 천자의 아버지도 혹 잡을 수 있다면 일개 필부의 아버지를 잡는 것쯤이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임금이 있고 난 뒤에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고 난 다음에 법이 있는 것이다. 아들이 되어서 그 아버지도 보호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종묘의 주인이 되어 나라를 세울 수 있겠는가. 성인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상황이 정상적일 경우엔 상도(常道)를 고수하지만 비정상적일 경우엔 권도(權道)로써 제어하니, 팔의(八議)를 마련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신하가 되어 천자의 아버지가 존귀하다는 것을 모르고, 아들이 되어 아버지를 마땅히 죽음에서 면하게 해 드릴 줄을 모른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법을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법은 아버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나라에서 행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주) 도응이 묻기를 “천자인 순(舜)은 아비 고수(瞽瞍)가 살인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맹자가 대답하기를 “법을 맡은 고요(皐陶)로 하여금 그대로 집행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순은 원래 천하를 헌 신발 보듯 하는 사람이니, 아비를 업고 해변가로 도망가 종신토록 천하를 잊고 흔연히 생활을 즐길 것이다.” 하였다. 《孟子 盡心上》
-주) 팔의(八議) : 죄를 감면해 주는 재판상의 은전(恩典)을 말하는데, 친(親)ㆍ고(故)ㆍ현(賢)ㆍ능(能)ㆍ공(功)ㆍ귀(貴)ㆍ근(勤)ㆍ빈(賓)의 여덟 가지 대상이 그것으로, 《周禮 小司寇》의 팔벽(八辟)과 같다.
이상 몇 가지 설에 대해서 선유들이 자세히들 설명해 주고 있지만, 내가 듣기에는 저으기 의혹스럽기만 하다.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修))이 《오대사(五代史)》를 편찬하면서, 시세종[柴世宗 후주(後周)의 제2대 임금으로 성명은 시영(柴榮)]이 그 아버지가 살인한 사건을 불문에 붙인 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법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았을지언정 아버지와 자식간의 도리는 온전히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확론이라 할 것이다. 어쩌면 진(秦) 나라의 분서(焚書) 사건이 일어난 뒤로 경서(經書)가 어긋나고 잘못되었는데, 마치 《서경》 무성(武成)편의 “절구공이가 둥둥 떠다닐 정도로 피바다가 되었다[血流漂杵].”는 것처럼 후세의 유자들이 이 한 장(章)을 끼워넣은 것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마치 “죽으면 빨리 썩는 것이 제일 좋다[死欲速朽].”는 공자의 말처럼 맹자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발언한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이 점을 살피지 못하고서 정론으로 단안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팔의(八議)의 법이야말로 주공이 만든 것으로서 천리와 인정을 근본으로 하여 절충한 것이니, 만세토록 지남(指南)이 된다 할 것이다. 어찌 의롭지 못한 것을 주공이 말했겠는가.
-주) 공자가 송(宋) 나라에 있을 때, 환사마(桓司馬)라는 자가 자신이 죽은 뒤에 쓸 석곽(石槨)을 만들면서 3년이 지나도 아직 완성을 보지 못하는 것을 목도하고 말하기를 “정말 사치스럽기도 하구나. 죽으면 빨리 썩는 것이 제일 좋은데 …… ”라고 하였다는 고사로 일종의 방편 설법을 말함. 《禮記 檀弓 上》
요와 순은 현인에게 천하를 물려 주었는데 어찌하여 우는 아들에게 물려 주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답변하면서 그 이유를 모두 하늘에 돌렸다.
-주) 《孟子 萬章上》에 내용이 상세하다.
그 뒤에 한유(韓愈)가 그 말을 토대로 분석하여 말하기를 “우가 아들에게 전해 준 것은 후세에 어지러워질까 염려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이 두 주장 모두 그렇게 말을 한 본뜻이 있긴 하나, 사씨(史氏)의 전(傳)을 깊이 고찰해 보지 못한 것이다. 우가 생전에 진정 익(益)을 하늘에 추천했고 보면, 우의 마음 역시 천하를 공적인 물건으로 보아 현자에게 전하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우가 죽은 뒤에 구가(謳歌)하며 조근(朝覲)하러 익에게 가지 않고 계(啓 우의 아들)에게 간 것은 우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일 뿐더러 우가 미리 알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들에게 물려 준 것은 계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우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 어찌하여 우가 아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계의 시대쯤 되면 덕(德)이 이미 시기적으로 낮아진 때인데, 어떻게 천하를 모두의 물건으로 보는 공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하늘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고, 후세가 혼란해지는 것 역시 꼭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염려했다고 볼 수도 없다. 세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맹자》 가운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선부정제기(先簿正祭器) 1장이다.
이것은 그 사이에 말이 빠진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데도 선유가 억지로들 해설을 하는데, 뜻이 지리멸렬하기만 하니 일단 의심만 두고 빼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 《孟子 萬章下》에 나온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oja&logNo=220507959446
현인과 군자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살아 있을 때는 밀어내고 배척하여 오직 하루라도 조정에 있게 될까 두려워하고, 심한 경우에는 간당(姦黨)이나 반역죄로 지목하여 임금이 듣고 동요하게 하면서 기필코 옥에 가두고 죽이는 등 온갖 곤욕을 끝까지 당하게 한 뒤에야 그만두는데, 현인과 군자가 죽고난 다음에야 비로소 포숭(褒崇)하고 찬미하며 사람들에게 아양을 떠니, 하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역시 어쩌면 소인들과 같은 것인가.
소인들의 마음 씀씀이야말로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데, 그 품부 받은 재능 또한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 시기를 엿보고 위세에 편승하여 임금의 마음에 들도록 아첨을 떠는 정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때는 군자를 부여잡고 관계(官界)에 진출했다가도 그 세력이 커지게 되면 거꾸로 물고 뜯으며 사람들을 부추겨 포학한 행위를 자행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귀한 신분의 권세가에게 아첨을 부려 행동을 같이할 것을 도모했다가도 세력이 커지게 되면 임금을 누르고 그 지위를 빼앗기도 하니, 아, 정말 참혹하다 하겠다. 임금이 처음에는 자기 뜻을 맞춰 주는 것을 이롭게 여겨 지위를 올려주려 하고, 그 다음 단계가 되면 그와 일을 같이 하면서 그에게 기울어져 뭣이든 허락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장차 그에게 찬탈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수족이나 이목을 그에게 칼 씌우고 결박당한 채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육친(六親)마저 그에게 해를 당하고 위복(威福)의 권한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하나의 예로 한(漢) 나라 헌제(獻帝)나 진(晉) 나라 혜제(惠帝)는 그 처와 어미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서글프게 되었단 말인가.
-주) 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생모 왕미인(王美人)은 하황후(何皇后)에게 살해당했으며 하황후는 동탁(董卓)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 뒤 조조(曺操)가 황후 복씨(伏氏)를 죽이고 그 일가를 멸족하였으며, 두 명의 황자(皇子)도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귀인(貴人) 조씨(曹氏)를 황후로 맞았으나 뒤에 조비(曺丕)에게 천자를 내주고 산양공(山陽公)으로 격하되어 살다가 54세로 죽었다. 《後漢書 9, 孝獻帝紀》 서진(西晉) 제2대 혜제(惠帝)의 경우, 황후 가씨(賈氏)가 황태후 양씨(楊氏)를 죽였는가 하면, 그 자신도 황태자 휼(遹)을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태자의 어미 사씨(謝氏)를 죽였다. 혜제는 또한 맹꽁이 울음소리의 공(公)과 사(私)를 따진 어리석은 질문과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고 한 일화로 유명하기도 하다. 《晉書 4》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고서도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던 자는 순경(荀卿)에게서 배운 이사(李斯)와 정자(程子)에게서 공부한 형서(邢恕)와 귀산(龜山 양시(楊時))의 문인이었던 육당(陸棠)이다.
거가(巨家)와 세족(世族)은 나라의 보루이니, 거가와 세족이 보전되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도 따라서 종식되고 만다. 제(齊) 나라는 고국(高國 2경(卿)이 었던 고자(高子)와 국자(國子)임)이 멸망당하자 전씨(田氏)가 일어나 병탄했고, 진(晉) 나라는 공족(公族)이 없어지자 삼경(三卿)이 참칭(僭稱)하게 되었다.
세상의 도는 하나뿐으로서 이(理)도 하나이고 기(氣)도 하나인데, 그 도를 그대로 말한 사람이 공자와 맹자이고, 뒤집어서 말한 사람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이다. 활에 비유해 보건대, 활의 앞쪽에서 잡아당기면 활을 활용할 수 있지만 뒷쪽에서 잡아당기면 활의 쓰임이 없는 것과 같은데, 그래도 활은 하나이다. 뒷쪽에서 잡아당기면서도 앞쪽에서 잡아당겨야 유용하다는 것을 안다면 활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것이다.
노자는 정묘하고 장자는 분방(奔放)하나 무(無)에 귀결된다. 그런데 무는 유의 근본이 되고 유는 무를 드러내는 것이니, 유와 무야말로 상호 작용을 한다 하겠다.
옛날에 이른바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고 한 것은 대체로 화복과 영욕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 《莊子 逍遙遊》에 “그런 인물은 외부의 어떤 것도 상하게 하지를 못하니, 하늘까지 닿는 홍수가 범람해도 빠지지 않고, 쇳덩어리와 바위가 녹고 산이 타들어가는 대한(大旱)에도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좌(靜坐)는 하루낮 동안에 해야 할 사업이요, 정와(靜臥)는 하룻밤 동안에 해야 할 사업이다. 정좌하게 되면 신(神)이 모이고, 정와하게 되면 정(精)이 단단해진다.
다스려지는 세상이라고 해서 소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다스려지면 소인이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고 해서 군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군자가 뜻을 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군자가 소인을 다스릴 때는 항상 여유를 두기 때문에 소인이 틈을 엿보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소인이 군자를 해칠 때에는 늘 참혹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도 남김없이 멸절되고 만다. 그러다가 쇠퇴한 세상이 되고 보면, 소인을 제거하는 자도 곧 소인으로서 하나의 소인이 물러나면 다른 소인이 나아오니, 이기고 지는 자들 모두가 소인일 따름이다.
군자는 진출했을 때의 모습이 물러가 있을 때와 같은 데 반하여, 소인은 물러가 있을 때의 모습이 진출할 때의 그것과 같다. 군자는 말을 할 때의 모습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와 같은데, 소인은 아무 말 않고 있을 때도 말할 때의 태도와 비슷하다.
주(紂)가 옥으로 술잔을 만들고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箕子)가 탄식을 발했고, 주가 구리 기둥에 낙형(烙刑)을 가하자 사가(史家)는 포학하다고 평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후세에 내려 오면서 옥으로 된 술잔과 상아 젓가락이 사부(士夫)들의 일상 용품이 되고 쇠를 달구어 포락형(炮烙刑)을 가하는 것이 임금이 으레 시행하는 형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아무리 조가(朝家)의 퇴폐 풍속이라 하더라도 말세의 사치 풍조나 가학 행위보다는 순진한 점이 있었다 하겠다.
-주) 《史記 宋世家》에 “주가 처음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가 탄식하기를 ‘저 자가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필시 옥 술잔을 만들 것이고 술잔을 만들면 필시 먼 지역의 진귀하고 괴이한 물건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수레나 궁실 등을 화려하게 할 조짐이 여기서부터 엿보이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하였음.
-주) 조가는 현재의 은허(殷墟)로서 퇴폐 풍속 지역의 대명사로 일컬어짐. 《史記 樂書》에 “주가 조가 지방의 북쪽 음탕한 음악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淮南子 說山訓》에는 “묵자가 음악을 비난하여 조가 고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음.
군자 중에 재질이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왕도정치를 일으키는 보좌역이 될 수 있지만, 소인 중에 재능이 있는 자는 나라를 망치는 신하가 되기에 안성맞춤이다.
국가가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길러온 자가 국가의 어려움을 구하기 위해 꼭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국가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꼭 국가로부터 자기의 몫을 향유한 사람만도 아니다.
양(陽)은 사람의 속성이고 음(陰)은 귀신의 속성이니, 낮은 사람의 세상이고 밤은 귀신의 세상이다. 양이 우세하면 음이 소멸되고 사람이 승하면 귀신이 없어진다.
안정되게 하는 것은 군자의 속성이고 혼란되게 하는 것은 소인의 속성이니, 청명한 조정은 군자의 세상이고 혼란한 조정은 소인의 세상이다. 군자의 힘이 자라나면 소인의 자취가 없어지고 소인이 진출하면 군자가 쫓겨난다.
사악(四嶽)이 순(舜)을 하늘에 추천하면서 “그들의 덕이 진보되게 하여 간악한 행위에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蒸蒸乂不格姦].” 하였으니, 순이 일반 백성의 신분일 때 고수(瞽瞍)가 이미 심복하여 따른 것이 된다. 그렇다면 만장(萬章)의 질문이나 그 물음에 대한 맹자의 답변 모두가 순의 현덕(玄德)이 요 임금에게까지 알려진 뒤에나 해당되는 일인데도 둘 다 순의 사적(事迹)을 모른 채 자기 본위로 헤아렸던 것이 되는 것이다. 사악이야말로 순과 동시대의 사람인만큼 이 말에 신빙성을 둔다면 ‘어버이에게 알리지도 않고 장가들은 것[不告而娶]’에 대한 이유나 ‘도군(都君 순을 가리킴)을 생매장하려고 꾀한 공[謨蓋都君]’을 자랑하는 상(象)의 문제나 ‘임금된 순에게 요 임금과 고수가 신하로서 인사를 드렸다[北面而朝].’는 것에 대한 사항들은 모두가 물어볼 성질도 못 되거니와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들인 셈이다.
-주) [蒸蒸乂不格姦] : 《書經 堯典》에 나오는 말로, 그들이란 순의 아버지와 의붓어미와 이복 동생을 말한다.
상촌선생집 제42권 외집 2 / 휘언(彙言) 2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