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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초상 | |
출생 | |
사망 | |
성별 | 남성 |
국적 | |
본관 | |
별칭 | 호 다산(茶山) |
학력 | 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
직업 | 문관, 실학자, 저술가 |
종교 | |
부모 | |
형제 | |
배우자 | 풍산 홍씨 부인 |
자녀 | 슬하 6남 3녀 |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1]
生涯(생애)~
마재 鄕里(향리)에서의 幼年(유년)
父親(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
1762년 8월 5일(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므로, 현재 남양주시에서는 정약용이 남양주시 출신임을 지하철 광고 등으로 선전하고 있다.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약용은 넷째 아들이었다.
글을 쓰다.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내었다.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이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서모 또는 새엄마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의 진료로 인하여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승지 혼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靑年期(청년기)
1776년 결혼하던 해에 부친 정재원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5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 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大科 及第(대과 급제)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成均館(성균관)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 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 부사 등을 지냈다.
이계심의 조세저항 운동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 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천주교 박해 연루
신유박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00년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 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 [3] 과 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써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 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4]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末年(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家系(가계)
조부: 정지해(丁志諧, 1712년~1756년), 자는 우경(虞卿)
조모: 풍산 홍씨(1712년~1753년), 홍길보(洪吉輔)의 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년~1792년), 자는 기백(器伯)
전모 : 의령 남씨(1729년~1752년), 남하덕(南夏德)의 딸
이복 형님 : 정약현(丁若鉉, 1751~1821) : 자는 태현(台玄), 이벽(李檗, 1754~1786)의 누이와 혼인, 3남 6녀를 두었으며 맏딸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 1773~1848)는 황사영 백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黃嗣永, 1775~1801)과 결혼하여 아들 황경한(黃景漢)을 둠.
생모: 해남 윤씨 윤소온(尹小溫, 1728~1770) : 윤덕렬(尹德烈)의 딸, 윤두서의 손녀, 윤선도의 오대손녀
형님 : 정약전(丁若銓, 1758~1816) : 자는 천전(天全), 물고기 이야기인 자산어보를 썼다.
형님 : 정약종(丁若鍾, 1760~1801) : 자는 양중(養重), 신유박해 때 순교자로 장남 정철상(丁哲祥, ?∼1801)도 같이 순교. 후처 유소사(柳召史, 세실리아, 1761~1839), 후처소생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과 정정혜(丁情惠, 1796~1839)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
본인 : 정약용(丁若鏞)
누이 : 이승훈(李承薰)에게 출가
누이 : 채홍근(蔡弘謹)에게 출가
누이 :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
서모 : 김씨 (金氏, 1754~1813) : 생모 해남 윤씨 별세 후 정재원의 소실로 들어와 정약용 형제를 양육함.
이복 동생 : 정약횡(丁若鐄, 1785~1829) : 자는 규황(奎黃)
숙부 : 정재운(丁載運) : 할아버지의 아우인 정지열(丁志說)의 양자로 출계
숙부 : 정재진(丁載進)
부인 : 풍산 홍씨(1761~1839) :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혼인하였으며 10번 잉태하여 첫 잉태 때 유산하고 6남 3녀를 낳았지만 4남 2녀가 요절하였는데 요절한 자녀들은 대부분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장녀 : 4일만에 사망(1781.7 ~ 1781.7)
장남 : 정학연(丁學淵, 1783.9.12~1859) : 아명은 무장(武䍧) · 무아(武兒), 초명 후상(厚祥), 자는 치수(穉修)
손자 : 정대림(丁大林, 1807.5.28~1895) : 진사, 현감. 자는 사형(士衡)
손녀 : 청풍 김씨 김형묵(金亨默)에게 출가
차남 : 정학유(丁學游, 1786.7.29~1855) : 아명은 문장(文䍧) · 문아(文兒), 초명은 학상(學祥), 자는 치구(穉求)
며느리 : 청송 심씨 심오(沈澳)의 딸, 예조판서 심각(沈瑴)의 증손녀
손자 : 정대무(丁大懋, 1824.5.18~?) : 참봉, 현감. 자는 자원(子園)
손자며느리 : 청송 심씨 심동량(沈東亮)의 딸, 예조판서 심각(沈瑴)의 고손녀
손녀 : 풍천 임씨 임우상(任祐常)에게 출가
손녀 : 해남 강씨 강은주(姜恩周)에게 출가
삼남 : 천연두로 사망(1789.12.25~1791.4.2), 아명은 구장(懼䍧) ·구악(懼岳)
차녀 : 천연두로 사망(1792.2.27~1794.1.1), 아명은 효순(孝順) · 호동(好童)
삼녀 : 정씨 (丁氏 1793~?) : 친구 윤서유(尹書有, 1764~1821)의 아들 윤창모(尹昌模, 1795~1856)와 1812년 혼인함.
사남 : 천연두로 사망(1796.11.5~1798.9.4), 아명은 삼동(三童)
오남 :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연두로 사망(1798~1798)
육남 : 천연두로 사망(1799.12.2~1802.11.30), 아명은 농장(農䍧) · 농아(農兒)
첩 : 남당네 : 유배 생활을 함께 한 첩으로 한시 《남당사》의 저자로 추정
서녀 : 홍임
정약용이 등장한 작품~드라마
《소설 목민심서》(KBS2, 2000년, 배우:이진우)
《이산》(MBC, 2008년, 배우:송창의 (67회~77회))
《조선추리활극 정약용》(OCN, 2009년, 배우:박재정)
《성균관 스캔들》(KBS2, 2010년, 배우:안내상)
《구르미 그린 달빛》(KBS2, 2016년, 배우:안내상)
뮤지컬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2012년, 배우:천보근, 송중기)
정약용의 사상~정약용의 철학사상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예론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원시 유학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이이·유형원·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시대의 새 학문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천명을 정치적으로는 인심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주자의 천리설(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토지정책
1755년 사형당한 유수원 선생이 <우서>에서 비판한 대로, 다산 당시 농토의 100%를 사대부가 독점하여 평민들은 모두 소작농이었다. 이 상태는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다. 1944년 일제의 통계는 전국 농토의 64%가 소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6%는 사대부가 머슴들을 부려 직접 경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 사대부 계층이 일제와 협력했다는 증거다. 다산의 <전론>에 따르면 당시 인구 800만 추정(백골포 징수로 사망신고를 해도 산 사람으로 처리하여 세금을 징수 하는 등으로 정확한 투정 불가) 농토가 800만결이었다. 일 가구당 1결이 되어야 굶어죽지 않는다. 다산의 추정에 따르면 사대부 1인이 평균 990명분의 농토를 차지하였고,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는 3990명이 소유할 농토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소작인에게 세금까지 부담시켰다. 소작료는 평균 소출의 25%였으나 30%까지 올랐다. 당쟁과 홍경래의 난 등으로 당재에 패한 양반들과 난에 가담한 평민들이 노비계층으로 떨어져 헌종 때는 노비의 인구비중이 35%에 달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노비제도가 없어져 노예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빈곤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리승만의 토지개혁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라 할 수 없듯, 다산의 정책건의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부를 수 없다.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공동 분배를 함으로써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한 사회주의 토지 정책인 여전론과 정전론을 상상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전론은 토지를 우물 정(井)으로 나누면 모두 9구역의 땅이 나오는데, 이중 8구역은 8명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1구역은 공동 노동을 하여 국가공동체의 복리를 위한 비용인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전론은 여(이문 여,閭)를 농민들이 공동 노동, 공동 분배하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다. 그렇지만 일한 만큼 나눠주는 정책이니 현재 북한과 같은 토지정책은 아니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점진적인 방법이 1819년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를 할 때에 상상한 정전론이다.
청렴하고 평등한 경제
다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과학기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 관계이기도 하다.
評價(평가)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 |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 ” |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著書(저서)
牧民心書(목민심서)
經世遺表(경세유표)
欽欽新書(흠흠신서)
3대 저서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저술한 책 이다.
《흠흠신서》 :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경세유표》 :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기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 정약용이 회갑을 맞던 해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일대기이다.
《맹자요의》
《춘추고징》
《상서고훈》
《매씨서평》
《주역사전》
《역학서언》
《대학공의》
《대학강의》
《중용자잠》
《중용강의》
《아언각비․이담속찬》
《문헌비고간오》
《소학주관》
《소학기언》
《심경밀험》
《상례사전》
《상례외편》
《상의절요》
《제례고정》
《의례문답》
《상례작의》
《악서고존》
《시경강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대동수경》
《풍수집의》
《마과회통》
《삼미자집(三眉子集)》 :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
편지모음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장기와 강진에서의 유배길에 올랐을 때에, 두 아들(학유,학연)에게 보낸 편지, 부인이 결혼할 때에 입은 치마에 써내려간 시(히피첩), 따님에게 보낸 시화집을 창비에서 출판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창비)
기타~노론의 적개심
생전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다. 저작들의 대부분은 유배생활 19년간 집필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까지도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이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 ...(이하 중략)...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윤치호일기, 1935년 7월 17일자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에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조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
정약용 탄생 250주년 기념 테마전
“다산 정약용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오는 10월 30일(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는 테마전 “다산 정약용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를 개최한다.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제1683호) 등 보물 2점을 비롯한 총 43건 142점의 유물을 통해, 역경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고민했던 대학자 다산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그 인간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정약용의 생애를 시간적 흐름과 그가 처했던 상황, 학문 연구와 저술 등을 중심으로 몇 단계로 나누어 주제화하였다. 먼저, “고향, 그리고 한양의 새로운 공부”에서는 태어나 자란 고향(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인근의 풍광과 혼인 후의 한양 생활에서 접하게 된 성호 이익의 학문과 서학西學에 대해 알아본다. 다산 생가에서 가까운 한강변의 모습을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과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비롯한 당시 유통된 천주교 교리서 들이 전시된다.
이어 “성군聖君을 만나: 정조와 정약용”에서는, 28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그 해에 바로 규장각 초계문신에 발탁된 정약용이 수원 화성 축조 공사의 설계 등을 맡는 등 정조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던 관료 시절을 다룬다.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도」와 정조가 하사한 철제 은상감 척尺, 『화성성역의궤』, 그리고 그가 지은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 등의 유물을 볼 수 있다.
한편 “살아남아 세운 뜻, 학문의 길”과 “세상을 바루려는 뜻, 1표 2서”에서는, 천주교에 연루된 죄로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기의 학문 연구와 저술을 살펴본다. 주역 해설서인 『주역사전周易四箋』와 『경세유표』·『목민심서』 등이 관련 편지와 함께 전시되어 학자이자 개혁사상가로서의 다산의 업적을 말해준다.
이 시기 다산의 일상과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유배지 강진의 생활”에서 엿볼 수 있다. 초의 선사가 그린 다산초당 그림, 다산초당 주변 네 곳의 경치를 다산 자신이 읊어 쓴 시를 모은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제1683호), 선비 화가인 외증조부 윤두서尹斗緖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서 제작한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보물 제481-3호), 흑산도의 형 정약전에 대한 걱정을 담은 편지와 승려·제자 등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딸에게 그려 준 「매조도」(부인 홍씨가 혼인 30주년 기념으로 보내온 빛바랜 치마폭에 다산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넣은 것) 등을 초상화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고향 마재로 돌아와서”에서는 무려 18년에 걸친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의 저술과 학문적 교류, 그리고 노년의 일상과 소회 등을 전시한다. 이 시기에 쓴 형사 사건 지침서 『흠흠신서欽欽新書』, 대표적 경학 연구서의 하나인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다산이 제시題詩한 「산수도」와 「어도魚圖」, 그리고 만년에 쓴 편지들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약용, 사후 재평가”에서는 사후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이 개항 이후의 시대 변화 속에서 재조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기에 다산을 크게 소개하기 시작한 「황성신문」과 교사용 교과서 『유년필독석의幼年必讀釋義』, 그리고 다산의 타계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적인 모금으로 간행된 활자본 『여유당전서』와 그 출판사의 영수증, 다산을 높이 평가한 「동아일보」 등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18년간의 유배라는 큰 어려움 속에서도 깊이 있는 유학 연구를 바탕으로 방대한 규모의 저술로써 제도 개혁과 민생 개선의 방향을 제시했던 위대한 사상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그가 몸담은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해, 쉽고 편안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고향은 한강변이다. 경기 남양주시 능내리(옛이름 마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팔당호수의 물이 그의 생가 바로 앞에까지 들어차 있다. 그러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다산의 고향은 멀리 떨어져있다.
땅의 끄트머리에 가까운 전남 강진이다. 그는 신유사옥(1801년)의 여파로 머나먼 강진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가 살았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지식 발전소로서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을 살았다. 목숨만 부지한 채 이 곳에 쫓겨와서는 8년간을 동문 밖 주막에서 지냈다. 그의 곤궁한 모습을 보다 못한 해남 윤씨 일가가 산 기슭에 작은 집을 지어준 후에야 다산은 객방 신세를 면했다. 다산은 이 초당에 들어 "이제야 생각할 겨를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다산초당(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은 만덕산 기슭에 앉아 호수같은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구에서 초당에 오르는 200여㎙의 길은 대나무, 향나무, 동백나무의 터널이다. 물들지 않는 상록수여서 숲에 들면 계절을 혼동하기 쉽다. 동백나무는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초당은 모두 3동의 건물과 1개의 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정약용의 거처였고, 양쪽의 동암과 서암은 그의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곳이다.
본채에서 왼편 언덕으로 20㎙를 오르면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에서의 조망이 장관이다. 발아래 잔잔한 강진만에는 작은 섬 죽도가 드리워져 있고 멀리 부용산과 천태산의 돌봉우리가 구름에 가릴 듯 말 듯 눈에 들어온다.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간 형 약전과 고향 땅을 그리워했던 곳이다.
초당은 이 땅의 차문화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이웃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사상을 교유하면서 차에 심취했다. 중국에서 들여 온 차가 아닌 우리 차에 매력을 느꼈고 국산차를 예찬하는 '동다기(東茶記)'를 쓰기도 했다. "…나무도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애오라지 차 얻고자 할 뿐이요. …목 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선물을 아끼지 말기를…" 차를 구걸하는 내용의 '걸명소(乞茗疏)'는 차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다산은 찻물을 얻기 위해 초당 오른편에 약천이라는 샘을 직접 팠고, 그 물을 끓이기 위해 솔방울을 지필 수 있는 넓적한 돌(다조)을 앞마당으로 옮겨놓았다. 약천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고, 다조에는 불을 놓았던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1818년 57세의 나이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갔다. 그는 귀향해서 18년을 더 살다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의 18년간 그는 또 하나의 고향인 강진을 항상 그리워했다고 한다.
▶ 다산초당 가는 길 ◀
강진 버스터미널에서 해남 방면 18번 국도를 약2㎞ 달리다가 추도 3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시멘트로 포장한 완도 방면 군도 2호선을 타고 7㎞를 가면 초당입구에 닿는다.
버스는 강진 터미널에서 귤동행 시내버스가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7시20분까지 9차례 운행한다. 초당 인근에는 민박을 제외하고는 숙박시설이 없다. 만덕슈퍼(061-432-5460), 만덕상회(061-432-0459), 다산슈퍼(061-432-0098)등에서 민박을 친다.
강진에는 다산초당 외에도 영랑 김윤식 생가, 청자도요지, 까막섬(천연기념물 제 172호)등 둘러볼 명소가 많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경기마을기록사업의 일환으로 남양주 마재마을지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를 발간했다.경기마을기록사업은 역사·문화적으로 의미가 깊은 경기도내 마을을 찾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마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사업이다.이번에 나온 결과물은 지난해 경기도문화원연합회와의 협업으로 조선 정조때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 남양주 마재마을을 대상으로 했다.다산 정약용 선생의 일가가 마재마을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 숙종 때 정시윤(丁時潤, 1646~1713)부터이다.입향조인 정시윤은 당시 마을의 모습을 “그 땅을 살펴보니 동쪽에는 두 물이 새로 모여서 여울물이 잔잔하지 않고, 서쪽에는 골짜기 입구가 처음 갈라져 바람이 모이지 않았다”라고 표현했다. 또 다산 정약용 선생은 아름다운 마을의 풍광을 그리워하였는데 고향에 돌아와 읊은 시구, ‘南遊數千里, 何處得玆丘-남녘땅 수천리를 노닐었으나, 이와 같은 지역은 찾지 못했네’에 그 마음이 드러나 있다.
▲ 남양주 능내리 항공사진 ▲ 하지만 예전 마재마을은 수려한 자연풍광과는 다르게 마을 내 농토가 부족해 마을 사람들은 배에 소를 싣고 강을 건너 농사를 지으러 다녀야했다. 을축년(1925년) 대홍수와 1950년 6·25 전쟁으로 원래 마을의 모습은 사라졌으며 팔당댐 건설로 이 마을의 주 생업이던 채석장이 사라지자 많은 가구가 마을을 떠났다. 이번 마재마을지에는 이런 역경 속에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재단 관계자는 “도시화에 따라 혹은 자연재해에 의해 원래 마을들이 지니고 있던 모습이 많이 변해가고 있다”며 “이번 사업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흔적과 기억을 수집하여 옛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생활문화를 전승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NZvc_Poa4
https://www.youtube.com/watch?v=Vg_kuAuvXjU
https://www.youtube.com/watch?v=ikDpYVwROZE
https://www.youtube.com/watch?v=b_vpFwNo3ZE
https://www.youtube.com/watch?v=09tZAVEy6XE
https://www.youtube.com/watch?v=IQcsEhoPW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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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일 2020-08-23 오전 2:31
남양주 능내리 항공사진 사진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