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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의 평면 Plane of Immanence 内在性平面
생각에 잠긴 플라톤은 ‘장미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스승과 제자의 문답은 끝이 없었고, 제자는 마침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장미’는 장미의 본질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현실의 장미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이데아(idea, 관념)의 세계에 본질의 장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이분법은 동서양 철학의 오랜 주제였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 현실, 실제, 실재란 무엇인가?’로 바꾸어 물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사유하는가?’로 고쳐 물어야 한다.
원래 초월(transcendence)이란 종교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신의 존재를 의미한다.
반면 내재(immanence)는 현실 그 자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리얼리즘이다.
이 개념은 인도의 브라만사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 기독교나 유태교 등 여러 종교에서도 중요한 주제였다.
이 두 명제의 길항은 끝이 없을 것인데 들뢰즈(G. Deleuze, 1925 - 1995)와 가타리(F. Guattari, 1930 - 1992)는 현재, 실재,
실제, 사실은 그 자체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천개의 고원]에서 공속성,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내재성이라고 표현했다.
스피노자가 개념화한 속성을 강조한 내재성이란 모든 것의 속성이 중요하고 그 속성에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금, 현재, 여기, 의식’은 모두 실재이므로 이에 근거하여 ‘나는 실재이고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 자유로운 사유의 장(場)이 바로 내재의 평면이다.
내재의 평면에서 사유는 종횡으로 내닫는가하면, 수직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무한 질주를 하다가 아주 느리게 흐르기도
한다.
마치 준마가 주름진 계곡을 만나서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질주할 수 있는 초원과 같이 부드러운 공간이다.
또한 무한히 열려 있으면서 무수한 차이를 존중하는 무질서한 혼돈(chaos)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현기증 나는 내재의 평면 위에서는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사유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의 평면에서는 자기의 속성(屬性)을 잃지 않으면서 파괴와 혁명의 급진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이 유연하면서도 급진적인 주체는 수목적 국가제도와 정신분열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진지(陣地)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일관된 공속성(consistency)이라는 개념을 내재성과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고원의 잔디밭을
내재의 평면이라는 지형학(topology)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곳은 무한한 가능성의 평면이므로 고정된 수목적 사유를 떠나서 역동적인 리좀의 유목적 사유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고와 질서를 해체하는 탈영토와 탈주의 비상선(line of flight)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내재의 평면과 같은 자유공간에서의 사유를 철학의 최고행위(supreme act) 또는 철학 이전의
철학이라고 하며 ‘무엇이 되는(Becoming)’ 우주 작동의 기계원리라고 명명한다.
그 원리가 바로 모든 것을 종단하고 횡단하는 철학의 근본이자 역동성을 가진 자기 조형의 평면이다.
수직적 초월의 평면(plane of transcendence)이 아닌 수평적 내재의 평면에서는 사물이나 존재가 가진 속성이 그대로
발휘된다.
따라서 자기-되기가 가능하지만 타자-되기도 가능한 것이고 타자의 속성이나 본질도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고, 개념을 사유하며,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개념에는 개념화된 논리구조와 역사가 있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런 고정의 개념을 해체하는 내재의 평면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될 수 있고, 모든 것은 새로울 수 있으며,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그것은 근본부터 새롭게 사유하는 힘인데, 그 힘은 왕복운동으로부터 시작하는 가속성과 가변성에서 나온다.
이런 역동성, 변이성, 차이, 혼돈 등은 인간을 인간 그 자체의 긍정적인 존재로 보는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초월(超越)과 달리 내재는 삶을 긍정하는 철학이며 개별 개체의 차이와 특성을 존중하는 다양성의 사유라는 점
에서 철학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사유다.
(충북대교수 김승환)
* 다양체 (위키백과)
위상수학과 기하학에서, 다양체(多樣體, 영어: manifold 매니폴드[*])는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닮은 위상 공간이다. 즉, 국소적으로는 유클리드 공간과 구별할 수 없으나, 대역적으로 독특한 위상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원은 모든 점에 대해서 국소적으로 직선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원은 1차원 다양체이다.
매끄러운 다양체
미분기하학에서, 매끄러운 다양체(영어: smooth manifold) 또는 미분 가능 다양체(微分可能多樣體, 영어: differentiable manifold)는 미적분학을 전개할 수 있는 구조가 주어진 다양체이다.
매끄러운 다양체 위에서는 함수의 미분과 적분 및 벡터장이나 미분 형식과 같은 해석학적 대상들을 정의할 수 있다.
"원이나 구, 다각형, 다면체등은 (성질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다양체이다."
다각형 다면체는 미분가능하지 않은 점이 있으므로 다양체가 아니죠? Ugha 2008년 3월 7일 (금) 04:22 (KST)
'다양체'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사용하냐에 따라 다릅니다.
다각형이나 다면체는 위상다양체(topological manifold)지만 미분다양체(differentiable manifold)는 아니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가 갖고 있는 두권의 미분다양체 교재는 manifold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topological
manifold', 'differentiable manifold'라고 부르더군요.
‘구체적 보편자’인 다양체
유체와 대칭 파괴적 사건
고체와 유체. 그리고 유체의 밀도
순수 수학적 cascade. 대칭이 파괴되지 않는 과정들. 메커니즘-독립적인 것.
메커니즘-독립적이라는 이야기가 뭐냐면 이 계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되던 간에 관계없이 그것의 대칭성과 대칭
파괴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거죠.
이게 상당히 중요한 거고 그만큼 추상적인 레벨에서 파악 가능하다는 거죠.
그만큼. 그런데 그런 것이 물리적으로 실현될 적에는 물론 수학처럼 이상적으로 되지 않죠.
예컨대 정육면체가 물에 있을 때, 공기에 있을 때가 다를 거고, 주변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 다를 거고, 수학적 공간에서의
회전과 물리적 공간에서의 회전은 물론 같을 수가 없죠.
방금 든 예, 열과 같은 경우는 밀도 그레디언트(gradient)라는 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밀도(density). 유체(流體, fluid)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밀도 아니에요. 밀도. 유체라는 게 참 재미있죠.
유체라는 대상이 베르그송 철학을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고체와 유체의 대비거든요.
그래서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intelligence)라는 것은 고체(solid)의 논리를 갖고 있다.
우리가 1+1=2라고 본다던가, 전체를 반으로 자르면 같은 대칭이 된다거나, 우리가 갖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은 고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거죠. 그것도 등질(等質)적인, 질적으로 homogeneous한.
생각해보면 맞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런 이미지를 그리면서 보거든요.
그런데 유체로 이야기하면 저런 이야기와 같아질 수가 없죠.
그래서 베르그송이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존의 인간 intelligence는 고체의 논리이고,
우리가 지속하는 삶은 유체적이라는 거죠.
베르그송의 그런 식의 생각이 상당히 많은 영향도 주고, 특히 시론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런 베르그송의 지적을 뛰어넘는 과학사적인 것 중의 하나가 유체의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거죠.
과거에는 유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보면 거의 수학의 저편이었어요. beyond mathematics.
수학에서 고체는 아주 잘 다루잖아요.
고체는 얼마든지 다룰 수 있죠. 그런데 유체라는 것은 흐르는 거라서 수학적으로 어떻게 다룰 거야.
그런데 지금은 유체역학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이 발달했어요.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 유체라는 것은 항상 고체에 의해 모양 지어진 유체죠 물론.
댐 같은 것을 만들 때 유체역학 물론 당연히 중요하죠.
강의 흐름 같은 것, 수질 같은 것 조절할 때도 중요하고. 유체역학이 의학에서도 중요해요. 혈관속의 피의 흐름이라던가.
고혈압, 저혈압이라는 게 그런 거 아냐, 결국은 피의 압력문제, pressure가 얼마나 미치느냐 그 문제입니다.
피 만이 아니라 온 몸에 흘러 다니는 게 온갖 것이 많으니까.
의학에서도 물론 초보적인 정도지만 유체역학이 상당히 중요한 것 중의 하나고.
예컨대 옷 같은 것을 만들 때도 섬유 같은 것을 쏴서 만들잖아요.
그걸 뭐라고 하더라. 방적은 짜는 것이고.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게 있어서 액체를 만들어서 조그만 구멍으로 쏴요.
그럼 실이 만들어지는 거지.
이것의 오차가 0.0001만 나도 이게 잘 안돼요.
두꺼워지거나 끊어지거나 하는데, 엄청난 기술이 필요한데 그것도 유체역학이죠.
그래서 지금은 유체역학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완전히 유체라는 것은 수학에서 금단의 땅이었는데 지금은 유체역학이
상당히 발달해있는데. 재미있어요. 나는 많이 공부하진 못하고 초보적인 것만 했는데 재미있어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 대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경우가 사실은 어차피 유체를 고체에 담지 않으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혈액도 혈관 안에 있으니까 일정하게 흘러가는 거 아냐, 댐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다 그렇죠.
어차피 고체의 틀이 일정하게 전제가 되는 거죠.
그래도 유체역학이라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는데, 그 유체를 다룰 때 가장 기본적인 factor 개념이 뭐냐면 밀도죠.
density.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viscosity라는 게 있어요. 점도.
쉽게 말하면 얼마나 끈끈하냐는 거죠. 그런 게 상당히 중요하죠.
그것의 gradient. 이것은 미적분 할 때 기울기의 변화입니다.
밀도 gradient라는 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들뢰즈의 생명철학과 생물학
그래서 임계점에 도달하면 상당히 다른 상황이 다시 도래합니다. 아까 물 끓이는 것처럼.
그 다음에 구드윈(Brian Goodwin) 이야기를 인용했는데 브라이언 구드윈이 생물학계에서는 약간 비주류죠.
그런데 무시할 수 없는 비주류죠.
오히려 이쪽 주류 세력보다, 그 때의 주류라는 것은 신 다위니즘(neo darwinism)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현대 생물학의 주류가 “분자생물학 + 신 다위니즘”이거든요.
그런데 늘 그렇듯이 주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나름대로 많고, 구드윈은 어찌 보면 저것을 비판하러 나온 사람입니다.
린 마거리스(Lynn Margulis)도 그렇고. 그런 사람 많죠.
아주 골수 주류가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라든가 그런 사람입니다.
구드윈 같은 사람은 피어슨(Keith Ansell Pearson)이 들뢰즈 생명철학을 이야기할 때도 가끔 인용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생물학에서도 유체역학 쪽의 사고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과정을 수력학적 성질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지나친 기계론적인 발상이고, 하기도 힘듭니다.
개념적으로 볼 때 잠깐 읽어보면, “많은 유형-산출적 과정들”, 어떤 타입이 산출되어야 할 거 아니에요.
“발생하는 유기체들과”, 이 때 발생한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해요.
오역에 관한 여담
여담 비슷하지만 내가 옛날에 번역에 관련된 논문을 한 권 쓴 적 있거든요.
그 논문 쓸 적에 한 절이 뭐였냐면 오역에 대한 거였어요.
오역이 몇 가지 패턴이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이공계 학문을 잘 몰라서 오역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패턴이에요. 고
대어를 몰라서 오역하거나, 희랍어, 라틴어를 몰라서 잘못하는 경우도 있고. 순수 어학적인, 순수 관계 대명사를 잘못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고.
몇 가지 패턴이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은 지금 이것이 인문계열이라고 하잖아요.
자연 계통이 낯서니까 거기서 오는 오역이 하나의 유형이에요.
제가 논문 쓰면서 샘플을 몇 개 뽑았어요.
오역 순위. 오역의 순위 1위가 뭐냐면 이거였어요, development. development가 역사에서는 ‘발전’ 내지 ‘진보’라는 의미죠.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개발’이라는 말로 합니다.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생물학에서 development의 뜻은 정확히 ‘난자가 수태가 되어서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기 까지’ 과정
이 생물학적 의미에서 development입니다.
embryo의 역사지. embryo가 어떻게 변해가는 가의 과정이 embryo입니다. ‘발생’으로 번역해야 해요.
그 외에도 많아요. function같은 거 ‘함수’인데 ‘기능’이라고 한다거나, analysis는 ‘해석’이라고 해야 하는데 ‘분석’이라고 한
다거나. 약간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데 order는 ‘순서’가 더 적합한데 ‘질서’로 한다거나.
제법 몇 개 있지. 그 뉘앙스를 정확히 머리에 그리고 이것을 봐야합니다.
대칭 파괴적 사건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되는 게 아니고, progressive하게 unfolding하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데.
수력학적 예에 있어서 처음에는 매끄러웠던 유체의 흐름, smooth한 유체 흐름이죠.
이 smooth하다는 표현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무슨 뜻일까?
smooth하다. 똑같은 단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철학적으로 표현하고.
마치 아까 태풍의 눈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무(無)이듯이.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잖아요.
smooth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미분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smooth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말하면 미분가능하다는 말이에요.
뾰족하다거나 끊어졌다는 표현은 수학적으로는 ‘미분불가능’하다는 말이에요.
대칭 파괴적 사건을 엄청 많이 통과해야 우리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죠.
들뢰즈의 생명철학과 생물학
그래서 임계점에 도달하면 상당히 다른 상황이 다시 도래합니다. 아까 물 끓이는 것처럼.
그 다음에 구드윈(Brian Goodwin) 이야기를 인용했는데 브라이언 구드윈이 생물학계에서는 약간 비주류죠.
그런데 무시할 수 없는 비주류죠.
오히려 이쪽 주류 세력보다, 그 때의 주류라는 것은 신 다위니즘(neo darwinism)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현대 생물학의 주류가 “분자생물학 + 신 다위니즘”이거든요.
그런데 늘 그렇듯이 주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나름대로 많고, 구드윈은 어찌 보면 저것을 비판
하러 나온 사람입니다.
린 마거리스(Lynn Margulis)도 그렇고. 그런 사람 많죠.
아주 골수 주류가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라든가 그런 사람입니다.
구드윈 같은 사람은 피어슨(Keith Ansell Pearson)이 들뢰즈 생명철학을 이야기할 때도 가끔 인용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생물학에서도 유체역학 쪽의 사고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과정을 수력학적 성질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지나친 기계론적인 발상이고, 하기도 힘듭니다.
개념적으로 볼 때 잠깐 읽어보면, “많은 유형-산출적 과정들”, 어떤 타입이 산출되어야 할 거 아니에요.
“발생하는 유기체들과”, 이 때 발생한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해요.
오역에 관한 여담
여담 비슷하지만 내가 옛날에 번역에 관련된 논문을 한 권 쓴 적 있거든요.
그 논문 쓸 적에 한 절이 뭐였냐면 오역에 대한 거였어요. 오역이 몇 가지 패턴이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이공계 학문을 잘 몰라서 오역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패턴이에요.
고대어를 몰라서 오역하거나, 희랍어, 라틴어를 몰라서 잘못하는 경우도 있고. 순수 어학적인,
순수 관계 대명사를 잘못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고.
몇 가지 패턴이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은 지금 이것이 인문계열이라고 하잖아요.
자연 계통이 낯서니까 거기서 오는 오역이 하나의 유형이에요. 제가 논문 쓰면서 샘플을 몇 개 뽑았어요.
오역 순위. 오역의 순위 1위가 뭐냐면 이거였어요, development. development가 역사에서는 ‘발전’ 내지 ‘진보’라는 의미죠.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개발’이라는 말로 합니다.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생물학에서 development의 뜻은 정확히 ‘난자가 수태가 되어서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기 까지’
과정이 생물학적 의미에서 development입니다.
embryo의 역사지. embryo가 어떻게 변해가는 가의 과정이 embryo입니다. ‘발생’으로 번역해야 해요.
그 외에도 많아요. function같은 거 ‘함수’인데 ‘기능’이라고 한다거나, analysis는 ‘해석’이라고 해야 하는데 ‘분석’이라고
한다거나.
약간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데 order는 ‘순서’가 더 적합한데 ‘질서’로 한다거나.
제법 몇 개 있지. 그 뉘앙스를 정확히 머리에 그리고 이것을 봐야합니다.
대칭 파괴적 사건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되는 게 아니고, progressive하게 unfolding하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데. 수력학적 예에 있어서
처음에는 매끄러웠던 유체의 흐름, smooth한 유체 흐름이죠.
이 smooth하다는 표현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무슨 뜻일까?
smooth하다. 똑같은 단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철학적으로 표현하고.
마치 아까 태풍의 눈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무(無)이듯이.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잖아요.
smooth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미분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smooth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말하면 미분가능하다는 말이에요.
뾰족하다거나 끊어졌다는 표현은 수학적으로는 ‘미분불가능’하다는 말이에요.
대칭 파괴적 사건을 엄청 많이 통과해야 우리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죠.
◆ 비선형성과 구체적 보편자인 다양체
‘비선형(non linear)’의 의미
non linear하다는 거 설명한 적 있죠? 비선형적이다.
독일에 어떤 공장주가 어떤 발상을 했느냐면, 공장을 굴리잖아요. 생산량을 늘리려고 그 공장을 확장했어요.
그 큰 모델을. 여러분들이 차 타고 가다보면 큰 공장들 있잖아요.
벽제 같은 곳에 가다보면 라면공장들 있죠. 공장이 있는데, 이 공장주의 생각으로는 새롭게 건축하면 돈이 많이 들어
가니까 기존의 건축을 그대로 사용해서 불린 거죠.
아주 단순한 생각이죠. 실린더가 있으면 그걸 지름 두 배로 하고, 길이를 두 배로 하고.
마치 뻥튀기 한 것처럼 해놓은 거죠. 그런데 웬 걸? 생산량이 두 배가 된 것이 아니라 공장이 망가져버렸어요.
왜 그럴까?
만약에 조그만 애기가 똑같은 모든 부분이 똑같은 길이로 두 배 커졌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좀 이상한 게 되겠죠.
그렇잖아요. 우리가 옆으로 길어지는 비율하고 위로 늘어나는 비율은 다르잖아요.
만약에 애기가 똑같이 늘어난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아주 재미있는 모양이 되겠죠.
우리 몸을 생각해봐.
이게 다 똑같은가 하면 이게 아주 골치 아프죠. 아기 보면 얼굴이 좀 뚱뚱하잖아요.
전부다 사람이 동그랗게 될 거 아니에요. 터키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많죠. 골치 아프겠지.
수학적으로 이걸 이야기하면, ‘차수(次數)’가 다른 거예요. 예컨대 라는 방정식이 있다면 x가 늘어난다면 각 항의 늘어
나는 정도가 다를 거 아니에요.
차수가 없는 것을 linear하다고 그래요, 수학적으로. 그런데 대부분의 방정식은 차수가 있지 당연히.
1승, 2승, 3승 그렇잖아요. 당연히 차수가 있죠. 우리 몸을 생각해보세요.
눈, 코, 입, 귀, 뭐 이런 팔. 팔은 길쭉해야 좋은 거고. 팔에다 몸에다, 그 안까지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한 거예요.
그게 linear한 방정식으로 되어있으면 어떻겠어요?
차수가 다 다른 거죠. 그 공장이 두 배로 늘렸는데 생산량이 두 배가 된 것이 아니라 공장이 폭삭 망해버렸죠.
실제 있었던 이야기에요. linear하다,
non linear하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겠죠. non linear하다는 것이 되게 중요해요. 비선형성.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같은 사람이 이것을 연구 많이 했지.
노벨상도 타고. 프리고진도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에요.
프리고진이 러시아 사람인데, 스스로도 이야기하지만 베르그송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거든.
어찌 보면 들뢰즈의 화학적 분신을 보는 것 같아요.
chemical 버전인 거지. 베르그송의 ‘ontology-upgrade version’이 들뢰즈고,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chemistryversion ’이
프리고진이야. 너무 비슷해요. 프리고진도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죠.
이 사람이 주로 많이 연구한 것이 이 비선형성이죠.
non linearity.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거죠.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닌데, 언급만 하는데, 엔트로피의 법칙을 이
사람이 깼다는 거예요.
그게 엄청난 거죠. 깼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것은 깬 것이 아니라 단지 좀 복잡하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완전히 엔트로피 법칙을 극복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해석이 좀 다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 막강한 엔트로피 법칙에 상당한 변혁을 갖고 온 사람이 프리고진이거든요.
오히려 그게 철학적으로 훨씬 중요하고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죠. 나중에 그런 맥락이 오면 다뤄보겠습니다.
그것은 우주론하고도 연관되고. 아무튼 그것은 그냥 하는 이야기고.
▲ 공간적으로 주기적인 패턴의 분기와 곤충(昆蟲)
그러니까 곤충들, 곤충하고 포유류하고의 아주 중요한 차이가 몇 가지 있잖아요.
곤충하고 포유류하고. 포유류는 우리하고 친척관계인데 곤충은 좀 딴 동네 애들이랄까.
일단 우리는 더듬이가 없잖아요.
곤충들하고 포유류 동물하고 가장 중요한 차이는, 우리는 허리 마디가 없잖아요.
마디가 없죠. 포유류들은 한 통으로 내려가잖아요.
곤충들의 특징이 뭐냐면 몸이 다 절지, 마디가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허리 가는 여자를 보면 개미허리라고 하잖아요. 개미, 벌, 떠올려 봐요.
곤충은 다 마디가 되어있어요. 다 절지, articulate가 되어있죠.
그게 굉장히 중요한 차이에요, 곤충들하고 우리. 그런데 마디가 하나만 있는 놈도 있고, 벌이나 개미 같은 놈도 있고,
아주 마디가 많은 지네 같은 것도 있고. 옛날 어릴 때 농담 따먹기 할 때, 그런 거 있잖아요.
파티를 했는데 지네가 안와서 왜 안 오나 화를 냈더니 그때까지 신발을 신고 있더라는 이야기.
발이 하도 많으니까 신발이 하도 많아서. 그게 절지동물이죠. 그런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어요.
비선형성과 계기하는 분기들과 형태(morphe).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단어 하나하나가 다 전문용어라서 좀 어려울 거 같아요.
단어가 다 어렵지. 이런 이론적인, 생물학이든 철학이든, 이론적인 텍스트를 읽을 때 참 중요한 것은 부품들을 하나하나
다 잘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다 잘 읽히거든요.
자동차를 만들 적에 부품을 다 만들어놓고 조합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런 딱딱한 책을 읽을 때 되게 어려운 이유가
간단한 거죠. 하나하나가 다 어려운 거니까.
분기, 표현, 발생, 비선형성, 절편...모두가 다 전문용어잖아요.
공부할 적에 개념적인 부품들을 하나하나 다 잘 만들어놔야 해요.
나중에 알면 참 재미있죠. 부품을 다 아니까, 우리가. 컨셉들을 좀 하나하나 마스터해 나가는 연습을 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어려운 책도 재미있게 읽죠.
형태를 발생시킨다는 게 참 흥미로운 거죠.
그래서 현대 건축 같은 데서 사용하는 기법이 있는데, 그것과 비교해보면 조금 더 이미지로 쉽게 들어올 거 같은데.
과거에는 집 같은 것을 지을 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morphe를 사용하죠.
가장 단순한 morphe가 뭐야? 지금 우리의 모더니즘 건축이죠. 정육면체.
대개 직육면체겠죠. 이게 가장 심플한 모델이죠.
더 심플한 것이 이글루가 있거든요.
직육면체가 가장 간단하고, 르 꼬르비제(Le Corbusier)라는 사람이 만든 모더니즘 모델인데, 포스트모더니즘 들어가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morphe들을 넘어서려 합니다.
그때 사용되는 기법이 이것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같은 사람도 그렇고.
로봇 얼굴 만들 때 쓰는 물질 같은 게 있거든요. <바이센테니얼맨>이라는 영화 봤죠.
로빈윌리엄스 말고 뚱뚱한 애가 있었죠. 로봇을 만든 사람.
그 사람이 로빈윌리엄스에게 보여주면서 하는 건데, 꼭 밀가루 반죽 같은 걸 탁 치니까 그게 퍼지는데 흩어지진 않고.
조몰락거리면서 모양을 만드는데, 나중에 쇠 얼굴에 붙여서 주무르잖아요.
그게 너무 흘러내리지도 않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그 ‘사이’라는 게 정교한 거거든요.
흉내 낼 수 없는 게 생명체의 살인데. 아무리 잘 만들어도 만지면 탄로 나잖아요.
눈은 속여도 촉감은 못 속이잖아요. 어려운 거예요. 도저히 못 만드는 거죠.
생명체는 못 만드는데, 그런 물질이 있어요.
그걸 랜덤하게 조작을 해요. 그게 나중에 형태가 나오는데 우리가 기존에 전혀 모델링할 수 없는 형태가 나오는 거죠.
그 형태가 나올 때, 물론 그것은 심플한 거고, 지금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죠.
지금 말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는 걸 이야기하니까 무한히 복잡한 거고, 이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단순
소박한 거죠.
하여튼 그 morphology가 계속 나오는 거죠.
새로운 morphology가 계속.
그런데 그 morphology를 참조해서 건물을 만들죠.
사람들이 비판도 많이 하죠. 뭐 대단한 좋은 건물이 나오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을 연상하면 무슨 이야기
인지 좀 알 거 같아요.
다양체 - ‘구체적 보편자’
다양체들의 보편성.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든 유지가 되는 보편자인데. 그게 어떤 과거에 말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본질들이 아니라
지금까지 쭉 이야기했던 변화들, 차이점들, 우연들, 변종들을 다 말하자면 끌어안을 수 있는 구체적인 보편자들이다.
즉 분기들에 의해 함께 묶이는 끌개들의 구체적인 집합이다.
구체적인 보편자라는 것을 재정의 하면 ‘분기들에 의해 함께 묶이는 끌개들의 구체적인 집합들’이죠.
이렇게 되겠지. 끌개들의 집합들인데. 쉽게 말하면.
또는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특이성들의 집합들인데.
그러니까 들뢰즈가 말하는 다양체 또는 보편적, 구체적 보편자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로 되어있어요.
하나는 특이성, 하나는 강도intensity입니다.
강도 이야기는 아직 많이 하지 않고 있는데. 3장에서 말할 겁니다.
공간적, 구조적으로 말하면 특이성이 되고. 물론 그때 공간이라는 것은 굉장히 추상적인 의미죠.
시간적, 질적으로 말하면 intensity.
이 『차이와 반복』이 단순화해서 말하면 4장이 특이성singularity이고 5장이 강도intensity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생각의 가장 심층적인 부분이죠.
그래서 예컨대 본질주의에서는 본질로부터 그 본질과 닮은 어떤 구현체가 나와야하는데, 이 경우는 뭐냐면, 하나의
다양체에서 상당히 다른 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거죠.
왜냐면 다양체 자체가 이미 mechanism-free한 차원에 있기 때문에 그 다양체가 현실화 될 적에는 동그란 비누 구형이
될 수도 있고, 소금 결정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보편자이고, 일종의 이데아이고.
들뢰즈와 플라톤
우리가 들뢰즈를 플라톤과 대비시키기만 하면 안 되거든요.
오히려 플라톤과 정확히 대비되는 사람은 니체예요.
니체와 베르그송이죠. 화이트헤드나 들뢰즈는 어떻게 보면 이미 이것을 거쳐서 사실은 이 사이에서 뭔가 만들어낸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들뢰즈는 이데아라는 말도 써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념으로 번역을 하는데, 이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데아라는 것을 이념으로 번역하면 누구의
뉘앙스에요? 칸트지 칸트. 칸트 뉘앙스로 보는 것이고, 이데아라고 번역하면 플라톤 뉘앙스야. 상당히 달라요.
이데아는 존재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고 이념은 칸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오히려 들뢰즈는 이데아인데 전혀 다른 이데아인 거죠.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라는 말을 쓰면서 그 내용을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버린 거죠.
그래서 우리가 플라톤과 단순하게 들뢰즈를 대비시키는 것은 좋은 전략은 아니에요.
오히려 어떻게 보면 플라톤적인 수학적 생각과, 니체 베르그송의 생성론적인 생각을 차라리 조합했다고 할까요.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정확하죠.
그래서 들뢰즈 이야기할 때, 몇 번 이야기했지만 너무 생성, 욕망을 강조하면 그럼 니체와 들뢰즈가 무슨 차이가 있나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건 이미 니체가 너무너무 잘 해놓은 이야기인데. 그래서 주석도 상당히 중요해요.
이걸 너무 또 지나치게 수학, 자연과학적으로만 해석해 놓아서 좀 그렇긴 한데 어차피 모든 면을 다 볼 수는 없는 거니까.
어차피 한 면을 보면 다른 면은 못 보는 거니까.
그렇긴 한데, 3가지를 다 봐야지. 이렇게 아주 이론적인 ontology하고, 흔히 말하는 정치적인 것, 또 하나 문화?예술적인
3가지를 다 봐야 해요. 그래야 전체가 다 보이는 거죠.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많이 소홀하게 다루는 게 4,5장을 소홀하게 다루는데. 소홀하게 했다기보다는 어려워요.
못하는 거지 안하는 게 아니라.
그걸 이 사람이 상당히 멋지게 풀어놨어요. 그래서 덧붙여 말하면 사건event론 같은 경우도 그냥 사물과 사건, 본질과
사건을 단적으로 무조건 대비시키는 것만은 아니죠. 대비되는 것도 있고. 사건이 또 반복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사건의, 아직은 플라톤이 들으면 희한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사건의 이데아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홈런’ 자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홈런은 수없이 많지만.
‘아이온(Aion)의 시간’에 나오는 홈런. 그러니까 platonic한 것과 anti-platonic한 것이 같이 있다고 봐야 해요.
그렇게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