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복숭아뼈
물기운이 닿자, 연분홍 뺨에 잔뜩 돋아 있던 솜털이 물결을 타고 눕는다. 손아귀에 쥐어진 둥근 표면은 아슬아슬하게 물렁하다. 흐르는 수돗물 아래서 과육을 쓰다듬다 그만 엄지손가락에 힘이 잘못 실리고 만다. 툭, 하는 미세한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으나, 손끝의 감각은 이미 얇은 껍질 아래 조직이 무너져 내렸음을 감지한다. 어긋난 힘의 방향이 달콤한 살점에 기어이 반달 모양의 멍을 밀어 넣었다. 제 몸을 보호할 단단한 외투 하나 두르지 못한 생명은 찰나의 압력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핏줄을 터뜨린다. 허물어진 자리 위로 맑고 투명한 진물이 배어 나온다. 입안으로 흘러드는 과즙은 상처 깊이와 무관하게 뭉클하도록 달다.
접시에 저며놓은 과육을 바라보다 문득 시선이 바닥을 딛고 선 내 발목으로 미끄러진다. 복사뼈. 우리는 으레 이 돌출된 부분을 복숭아뼈라 부른다. 발목은 인체라는 건축물을 떠받치는 위태로운 주춧돌이다. 체중이 수직으로 내리꽂힐 때, 복숭아뼈는 그 무거운 수직의 폭력을 묵묵히 받아내며 몸의 균형을 수평으로 분산시켜야 한다. 구두의 뻣뻣한 안감과 하루에도 수만 번씩 마찰하며 제 몸을 깎아내는 자리. 그것은 수많은 상처가 덧입혀져 두꺼워진 침묵의 지층이다.
기억의 태엽을 감아 닿은 곳에 아버지의 낡은 구두가 놓여 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구두의 뒤축은 늘 바깥쪽부터 비스듬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구두를 벗고 안방으로 들어와 몸을 뉘던 아버지 발목에는 언제나 탁본처럼 선명한 멍과 굳은살이 엉켜 있었다. 그해 여름, 선풍기 미풍이 더운 공기를 헛되이 휘젓던 저녁이었다. 대야에 찬물을 받아 아버지 발을 씻겨드리던 내 손끝에 돌덩이처럼 뭉툭한 복숭아뼈가 닿았다. 그것은 진열대 위에서 고운 빛깔을 뽐내는 탐스러운 과일이 아니라, 과육을 모두 도려내고 남은 우툴두툴한 복숭아씨였다
복숭아는 제 속내에 깊고 단단한 핵을 품고 있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살점의 중심에는 이빨을 튕겨낼 만큼 억세고 뾰족한 씨앗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삶도 그러했다. 단물 뚝뚝 흐르는 청춘의 연분홍 과육은 서둘러 베어내어 식구들 밥그릇에 다정하게 나누어 담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앙상하고 단단한 씨앗뿐이었다. 가장이라는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아버지는 세상의 날 선 모서리마다 제 발목을 부딪치며 걸어 나갔다. 뼈마디가 시리게 차가운 현실의 바닥을 디딜 때마다, 연분홍빛 꿈들은 멍이 들고 굳은살로 치환되었다. 하지만 그 거친 복숭아뼈가 지렛대가 되어주었기에, 우리 집안의 밥상에는 해마다 윤기가 돌았고 겨울에도 따뜻한 아랫목이 식지 않았다.
걷는다는 행위는 수시로 중심을 잃고 다시 중심을 잡는 일의 연속이다. 발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 순간 인간은 중력에 몸을 내맡긴 채 엎어질 위기에 처한다. 그때, 바닥을 딛고 있는 반대편 발 복숭아뼈가 미세하게 각도를 틀며 무너지는 몸을 꼿꼿이 세워 올린다. 추락하려는 관성을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바꾸어내는 기술, 그 중심에 과일 이름을 훔쳐 온 작은 뼈가 있다. 아버지의 비틀거리던 취중 걸음도, 새벽이슬을 밟으며 문을 나서던 무거운 발걸음도, 결국은 무너지지 않으려는 치열한 삶의 관성이었다. 속살은 누구보다 연약하고 무르면서도, 바깥을 향해서는 한없이 단단해져야만 했던 생의 외피. 아버지는 매일 아침 자신의 부드러운 감성을 구두끈으로 꽁꽁 묶은 채, 복숭아뼈 하나에 의지하여 비탈진 세상을 오르내렸다.
비단 아버지뿐이랴. 길 위를 걷는 모든 이들의 신발 속에는 저마다의 단단한 복숭아뼈가 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어두운 밑바닥에서, 그들은 멍들고 쓸리는 고통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인간 겉모습은 말끔하게 다림질된 셔츠와 번듯한 미소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직립보행의 우아함을 완성하기 위해, 양말 속 복숭아뼈는 하루 종일 비명을 삼키며 현실의 마찰계수를 온몸으로 감당해 낸다. 생의 하중을 덜어내려 버둥거릴수록 뼈는 더욱 굵어지고, 상처가 아무는 자리에 피어나는 굳은살은 세월이 남긴 솔직한 나이테가 된다. 그것은 세상의 폭력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처절한 방어기제이자, 부서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갑옷이 된 과육이다.
관념은 머리에 머물지만, 삶의 무게는 결국 가장 낮은 곳의 뼈에 물상화되어 맺힌다. 사랑, 책임, 인내, 희생. 그 가벼이 날아갈 듯한 추상적인 단어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발목의 돌기는 닻을 내리듯 단단하게 땅을 거머쥔다. 만약 우리에게 이 툭 불거진 복숭아뼈가 없었다면, 우리는 삶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쉽게 발목을 접질리고 길가에 쓰러져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멍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걷기를 포기했다면, 결코 가시밭길 너머 풍경을 마주할 수 없었으리라.
접시 위 복숭아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달콤한 과즙이 혀를 타고 흐르며 입안 가득 여름 향기를 피워 올린다. 부드러움은 단단함의 헌신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무르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가 이토록 황홀한 단맛을 품기까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나무뿌리는 또 얼마나 단단하게 암석을 뚫고 물을 길어 올렸을까.
멍든 과육을 베어 물며 신발 끈을 고쳐 맨다. 삶이라는 거대한 과수원을 향해 내딛는 걸음마다, 굳은살 박인 복숭아뼈가 새 신발의 가죽을 밀어내며 경쾌하게 자리를 잡는다. 부지런히 닳고 부딪히며 오늘을 지탱해 온 뼈들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내일이라는 달콤한 과육을 한입 베어 물 자격을 얻는다. 발목을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깃털처럼 비상하는 순간, 짙은 복숭아 향기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