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윽하고 사랑스러운 글로 지은
이 시대 가장 빛나는 동시 창작 참고서
“손가락 깨우기
손가락이 알아서 쓸 수 있게
머리보다 가슴보다 먼저
손가락만으로 쓸 수 있게”
“우리에게 허락된 부사는 어쨌든
서술어는 쓴다
주어는 나예요.
어쨌든×나는×쓴다.”
이안 시인의 동시론집 『따라 읽다가 저절로 동시 쓰는 법』이 걷는사람에서 출간되었다. 이안 시인은 많은 어린이와 어른 독자를 가진 시인이자 격월간 『동시마중』, 월간 『오디오 동시마중』, 동시마중 주간 레터링 서비스 『블랙』, 웹진 『땅감나무』를 펴내는 편집자이다. 그의 강의와 강연은 즐겁고 섬세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자신을 “맨 앞에서 맨 뒤까지” “동시 노동자”이자 “동시 생활자”라고 소개하기 전에 이미 독자들은 그가 한국의 동시를 얼마나 정성껏 탐구하며 고군분투했는지 잘 안다. 동시론집 『따라 읽다가 저절로 동시 쓰는 법』에서는 이안 시인의 동시 사랑, 깊은 사유와 시력의 힘을 느낄 뿐만 아니라 한국 동시의 역사, 동시의 의미와 정의, 현대 한국의 가장 뜻깊은 동시들을 만나 즐길 수 있다.
이 책은 90인(어린이 8인)의 작품 203편(어린이 시 5편)이 전문 인용되었고, 필사용으로 74편(어린이 시 3편)을 축제처럼 독자에게 펼쳐 준다. 동시로 서로 만나고 동시로 웃고 동시로 살면서 어느덧 독자는 동시를 사랑하고 스스로 쓰고 싶어진다. 시인이 머리말에서 이 책은 “자신의 백수를 동시라는 백지 위에 자면서도 받아 적으며 살아온 사람의 기록”이며 이 책에 목표가 있다면 “우리가 함께 일구어 온 앎을 공유하며 각자의 모름을 향해 새롭게 나아가기. 그리고, 사랑을 아껴 쓰는 일에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라고 말한 것을 새록새록 경이로움으로 음미할 수 있다.
1장 태도와 방향에서는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도록 현실 그 너머이자 그 이상의 말들을 독자와 함께 탐험해 나간다. 어떻게 하면 “말하기 전엔 있는지조차 몰랐던 이 세계의 표정/인물/사물/문장이 당신을 통해 발견”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며 “그렇게 발견된 이 세계의 표정/인물/사물/문장을 통해 독자가 다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찬찬히 밝혀 간다. 2장 말과 글자의 세계는 우리말의 소리와 형태에 주목해 말의 의외성으로 새로운 감각과 인식의 세계를 여는 동시 읽기와 쓰기로 안내한다. 문자 순서 바꾸기, 두음 전화, 잰말놀이, 구조 실험 등 단어들의 우연하고 자율적인 결합만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3장 어린이·동심·독자에서는 “어린이를 향해 놓인 시”인 동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놓이고 무엇을 돌파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공상은 어린이의 내면 현실”이며 “공상과 현실은” “동시에 공존하는 현실”이다. “직관적으로 감응”하고 감각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경험과 지식과 감각과 전망을 총동원해서 쓰는” 것이 동시다. 이와 함께 3장에서는 동심의 세계를 사유한다. 4장 스타일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작가가 되기까지의 노력과 단계를 다양한 동시 스타일리스트를 통해 읽고, 스타일을 가진 후 새로움이라는 과제를 풀어 가는 내공도 고민해 본다. 시를 “더 밀고 나갈 수 없는 한계”까지 밀고 나가는 과정을 겪지 않고 한 편의 시는 완성되지 않으므로 퇴고는 “불가능한 완성을 향한 욕망이고 미흡함을 못 견뎌 하는 결벽의 합작품”이다. 그런데도 “언어와 시인과 독자”가 “다른 존재의 차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퇴고의 문제를 5장에서 다룬다.
목차
1장 태도와 방향
2장 말과 글자의 세계
3장 어린이·동심·독자
4장 스타일
5장 퇴고
같이 보면 좋을X동시X찾아보기
인용작 목록
책 속으로
떠오르는 대로 다 쓰기보다
하나나 둘쯤 덜 쓰는 게 좋아요.
다섯 개 떠오르면
둘쯤 놓아주는 거지요.
시인이 빠뜨린 걸 독자가 떠올릴 수 있게.
끝까지 쓴다는 건
떠오른다고 다 주워섬기는 게 아니에요.
시는 절제를 보여 주는 거예요.
---p.34
오로지 애씀을 통해 어떤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외경합니다.
시를 잘 쓰는 일이
떡볶이를 잘 만드는 일보다
더 큰 기여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떡볶이는 아무리 고난도의 레시피라 해도
일단 완성하고 나면
반복 생산이 가능하지요.
시는 그럴 수 없어요.
시의 레시피는 한 편 한 편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레시피의 완성을 통해 떡볶이 연구자는 부자가 되고
시인은 또다시 무無로 돌아갑니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김수영의 말은
시인은 영원한 가난의 부자임을 일깨워 주지요.
내일의 노을은 오늘의 노을과 다른 것이어야 해요.
---p.41
짧음, 단순성, 천진성 같은 동시의 기본 형식과 내적 자질이 여전히 존중되는 가운데 다양성과 복잡성의 구조를 수용하고 옹호하는 식으로 동시 장르의 재구조화가 이루어질 거예요. 한마디로, 동시라는 구조의 건축으로 나가는 거지요. 동시가 구조이고 건축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다른 길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어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동시는
어린이에게 꼭 맞게 그려 주는
시의 사슴뿔이지요.
어린 사슴에게 그려 주는 뿔이
꼭 맞지 않게 크면 얼마나 덜그럭거리고 불편하겠어요.
꼭 맞게 다시 그려 줄 숙제는
우선 시인의 몫이에요.
---p.62
흘러넘치는 것보다
살짝 덜 말한 듯 쓰는 게 좋아요.
속이 훤히 보이는 꽃 사진은
꽃에게 못 할 짓을 한 거잖아요.
가장 비싼 말은
아직 이해되지 않은 말이에요.
---p.104
시가 잘 안될 때는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파타카차자아사바마라다나가,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안 긴 기린 그림이다 같은 잰말놀이(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반복해 발음하기 어려운 문장을 빨리 읽는 놀이)로 감각과 인식의 근육을 먼저 풀어 주면서 시작해 보라는 말이 있지요. 안 촉촉한 나라의 안 촉촉한 초코 칩이 촉촉한 나라의 촉촉한 초코 칩이 되려고 촉촉한 나라를 찾아갔더니 촉촉한 나라의 촉촉한 초코 칩이 “넌 안 촉촉한 초코 칩이니까 안 돼”라고 해서 안 촉촉한 초코 칩은 안 촉촉한 초코 칩 나라로 돌아갔다나 뭐라나 하는 이야기도 있지요.
다음 작품은 ‘기리다(기억하다)’와 ‘기르다’를 기린(명사)의 활용형처럼 새롭게 포함하면서 동물원 기린-화자의 실향의 삶과 동물권을 환기합니다.
---p.227
우리 삶의 하루하루가
생활의 최전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동시도 그렇게 이루어져요.
돌아보면 내 어린이는 일곱 살 때도 여덟 살 때도 자기 생의 맨 앞에 있었어요. 내 어린이의 하루하루는 매번 최전방에서 치르는 전투 같았어요. 어린이가 구사하는 언어는 결코 미지근한 후방의 언어가 아니에요.
차가운 겨울 낮에 나뭇가지를 만져 보면 죽은 나뭇가지는 햇볕을 받아 미지근하지만 산 나뭇가지는 아주 차가워요. 산 것의 피가 차갑게 흐르고 있으니까. 나는 생명이 지닌 이런 본성 같은 것, 생기를 믿어요. 내가 아는 어린이의 온도는 겨울 나뭇가지처럼 차갑고, 차가워서 생기롭고 삼엄해요.
---p.262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이 그때라고, 이때를 놓치지 말라고.
시 쓰기는 사람살이를 닮았어요. 첫 행에서 다음 행으로, 또 다음 행으로 이행해 가는 시 쓰기가 사람살이의 걸음걸이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짧게 끊어야 할 때가 있고 길게 이어 가야 할 때가 있지요. 단절과 도약, 낙차를 두어야 할 때가 있고, 느슨하게 풀어 주어야 할 때와 단단히 홀쳐 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매 순간
놓아줌과 붙잡음
물러섬과 나아감
끊음과 이음
말과 침묵 사이에서 머뭇거립니다.
다 보여 주어야 할 때와 조금만 보여 주어야 할 때, 아예 감추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해 보려 해도 끝내 할 수 없는 말 앞에서 돌아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보여 주는 척 안 보여 주고, 안 보여 주는 척 보여 주어야 할 때도 있지요. 선을 넘어서려는 욕망과 넘어선 안 된다는 윤리 사이에서 시의 기율과 기품이 만들어집니다. 가야 할 때 가고 보내 주어야 할 때 보내 주면 개운하지만 그때를 어기면 시에도 인생에도 변비가 와요. 그러나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때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처신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요.
---p.306
가장 좋은 말은,
당신이 재능 이상의 시인으로 성장해 갈 것이며
마침내
힘껏 실패하는 시인이 될 거라는 말이에요.
좋은 동시 쓰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세요.
---p.326
오래 비가 안 와 흙이 바짝 말랐는데 풀을 뽑으려면 힘들지요. 뿌리가 물기를 찾아 악착같이 땅속으로 뻗쳐 있으니까요. 반대로 비가 흠뻑 내린 다음 바로 뽑으려 들면 발은 질척거리고 손도 호미도 흙 범벅이어서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아요. 가장 좋은 때는 비가 흠뻑 내린 다음 물기가 가라앉을 즈음이에요. 그때가 되면 뿌리와 흙 사이에 긴장이 없어져요. 서로에 대해 느슨해진 거예요. 그사이에 뽑은 풀뿌리에는 붙어 온 흙도 적고 떨어내기도 쉬워요.
또 고들빼기가 잎만 나왔을 땐 잘 뽑히지 않고 여린 잎이 톡톡 끊기며 뿌리를 내주려 들지 않아요. 그렇지만 꽃대를 쭉 밀어 올리고 꽃을 피운 다음에는 뿌리가 맥없이 뽑혀 나와요. 가진 기운을 모두 꽃대와 꽃으로 올려 보냈으니 이제 뿌리가 뽑혀도 괜찮다는 거예요.
접시꽃 꽃대는 어른 키보다 훌쩍 더 높이 자라서 비바람이 분 다음에는 둥그렇게 휜 채 자빠져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며칠 지나면 위로 방향을 틀어 올리는데 방향을 트는 바로 그곳에서부터는 아직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들이 줄줄이 맺혀 있게 마련이에요. 피울 꽃이 남았으니 이대로 자빠져 있지 않겠다는 꽃의 의지인 거지요.
오래 시가 안 써지거나 어떻게 고쳐 봐도 맘에 들지 않을 때 해 보는 생각이에요.
---p.41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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