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셋째날
이제 북경을 떠나야 하는 날. 그러나 밤 9시 비행기라 오늘도 몇 군데 더 돌 수 있겠다. 먼저 찾아간 곳은 청 왕조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이다. 아편전쟁 때 북경까지 밀고 들어온 서구 열강들은 이곳 이화원에 들어와 온갖 재화를 약탈했다고 하지. 서태후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 거주할 정도로 이곳에 애착을 가지며 이화원의 재건에 힘쓰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화원을 재건하기 위하여 해군 예산을 유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맞이하는 곳은 인수전(仁壽殿)이다. 서태후가 이곳에서 집무를 하였다고 한다. 인수전을 나서니 곤명호의 넓은 호반이 먼저 펼쳐진다. 이화원의 3/4을 차지하는 곤명호는 넓이가 2.2평방킬로미터나 된다고 하는데, 이 넓은 호수가 다 사람의 힘으로 땅을 파내고 물을 채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낸 흙은 저 곤명호 옆에 솟아있는 만수산을 만들어 낸 것이고... 그 옛날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이 넓은 곳을 순전히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으로만 팠을 것 아니겠는가? 만리장성도 그렇지만 이 곤명호 또한 이 넓은 호수를 만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땀과 피가 들어갔을까?
곤명호 오른쪽의 만수산에서는 불향각(佛香閣)이 당장 눈에 들어온다. 부처의 향기가 나는 전각이란 뜻이니 보나마나 불교 건물이겠지. 또 인화원 내에 이런 불향각이 있다는 것은 서태후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얘기일 테고... 그런데 60m 높이의 만수산에 비해 불향각을 너무 크게 지어 어째 조화가 잘 안 맞는 것 같다. 원래 우리나라 절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좀 돈이 있다싶은 절에서는 커다란 부처를 세우고 화려한 전각을 세우고... 혹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불향각이 있는 만수산 뒤로는 멀리 진짜 산이 보인다. 인화원은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대 가까이에 지어진 여름 궁전인 것이다.
호수가를 따라 곤명호 오른쪽으로 나아가니 긴 회랑이 이어진다. 길이 728m에 이르는 장랑(長廊)이라는데, 머리 위로 보니 그림들이 계속 나타난다. 중국 고전 문학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이라는데 이 장랑에 1만 4천여 점이 그려져 있다고 하네. 장랑을 따라 가다가 불향각이 보이는 앞에 멈춰 섰다. 불향각으로 올라가볼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원래 이화원은 잠시 스쳐 지나가자고만 하였기에 불향각을 바라보고 뒤로 돌아선다. 호수가로 나가면서는 운휘옥우(雲輝玉宇)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지난다. 시간이 없어 여기서 배를 타고 곤명호 반대편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유람선이 우리를 내려준 곳은 남호도라는 조그만 섬. 섬에는 함허당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서태후가 여기서 해군의 수상훈련을 관람하였다고 한다. 남호도는 아치가 17개라는 십칠공교로 반대편 호반과 연결되어 있다. 십칠공교를 건너면서 서쪽을 바라보니 가느다란 제방이 호수를 건너고 있다. 서쪽에 있는 제방이란 뜻의 서제(西堤). 그 서제 너머의 호수는 서호(西湖)다. 서제는 항주 서호에 있는 제방을 본 따 만든 것이란다. 어쩐지 저 가느다란 제방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하였더니...
17공교를 건너오니 호수가에는 구리로 된 소가 네다리를 꿇고 앉아 호수 건너 불향각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 구리소는 홍수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공호수 곤명호에 홍수가 날 일이 있을까? 그런데 구리소 등에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에는 건륭제가 썼다고 하는데, 무슨 뜻일까?
시간이 없어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돌아서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는데 한 남자가 양손에 기다란 붓을 들고 물을 묻혀 바닥에 동시에 글씨를 쓰고 있다. 양쪽에 신경을 분산하며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을 텐데 꽤나 잘 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말라 없어질 물로 쓰는 글씨. 저 남자는 지금 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글씨 쓰는 사람들을 다른 곳에서도 만났다. 단지 글씨 연습하기 위해 이런 데 나오는 것일까? 글쎄...
점심을 먹고 유리창으로 향하다가 북해공원 앞에 잠깐 멈춘다. 잠시라도 북해를 바라보고 가고자 함이다. 북해 앞에 서니 바라다 보이는 곳은 전설에 나오는 선경(仙境)을 본 따 만든 섬, 경화도라는데, 섬 꼭대기에는 하얀 탑이 서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청나라 순치제 8년(1651)에 축조한 라마탑이란다. 작년에 티벳에 갔다 왔더니 멀리서 봐도 라마탑의 양식을 사용하였음을 알겠다.
유리창(琉璃廠)에 왔다. 그런데 유리창을 돌아보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유리를 제조하는 곳은 보이지 않고, 옛그림과 글씨, 그리고 이를 위한 붓과 벼루, 책 등만 파는 가게들만 자리하고 있다. 유리창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등장하는데, 이미 그 당시에도 유리 제조 공장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오늘날과 같은 문방사우에 관련된 가게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그래서 북경에 사신 일행이 간다고 하면 주위에서 책이나 좋은 벼루 붓 등을 사다 달라는 부탁이 많았다고 한다.
유리창을 돌면서 이곳이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붓이면 붓, 벼루면 벼루 등 오직 한 가지만 취급하는 상점이 많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방에 들어가니 그림 그리는 방법을 설명한 책자가 꽃, 동물, 풍경 그림 등으로만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꽃그림에서도 꽃의 종류에 따라 또 각각의 책자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풍경인데 중국이 그만큼 땅덩어리가 크고 사람이 많다 보니까 이렇게 전문화된 상점이 있고 책자가 팔리는 모양이다. 지금 내가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박지원이 이곳 유리창에 들렀을 때 느낀 문화적 충격도 대단하였을 것이고, 그런 데서 열하일기라는 명품 여행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돌다 보니 옛날 여인네들이 전족에 신던 신발도 있다. 성숙한 여인이 저렇게 조그만 신발에 발을 담아야 했다면 과연 그 조그만 발로 제대로 걸을 수나 있었을까? 여인들이 그렇게 조그만 발로 아장아장 걷는 것을 보면서 남정네들은 섹시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런 남정네들의 호색함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여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장영이라는 중국 작가가 자기 할머니부터 자신까지 여인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을 쓴 ‘대륙의 딸’이란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장영의 외할머니 유방이 전족으로 고통 받는 모습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 책에 의하면 유방은 2살 때 전족을 위해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모든 발가락을 발바닥 밑으로 구부려 넣고 흰 천으로 발을 칭칭 감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발 위에 큰 돌을 올려놓고 내리눌렀단다. 그러면 자라나는 발가락이 발바닥을 파고들고 뼈는 부러지고... 이것을 자랄 때까지 계속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유방이 아파서 비명을 지르면 그녀의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에 헝겊을 쑤셔 넣었다. 중국의 슬픈 전족의 역사. 그렇게 책에서만 보던 전족 신발을 눈앞에서 보니 애잔한 느낌이 올라온다.
유리창을 끝으로 이제 우리는 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관장에게 전화를 한다. 이관장은 아트페어가 다 끝나고 전시 작품을 포장하여 국내로 다시 보내는 등 잔일까지 처리하려면 아직 더 북경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이관장님! 덕분에 북경 구경 잘 했습니다. 아트 페어에서, 따산즈에서 현대 미술을 보고, 마지막 날 유리창에서 고미술도 보는 등 덕분에 제 눈이 대륙의 넓은 문물로 식견을 넓히기도 하였습니다.” 이관장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북경 공항을 향해 교통 체증으로 고생하는 북경 거리를 조금씩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