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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가치surplus value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다. 〈투하된 자본의 초과분〉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는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고찰해보자. 상품은 기계 설비[불변자본]과 그 설비를 움직이는 임금 노동[가변자본]의 결합으로써 생산되고, 부르주아는 이 두 자본의 소유주이자 구매자이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만큼의 임금을 결코 측정해주지 않는다. 100원을 넣어 100원을 얻으면 이윤이 0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시장에서 가격을 후려치건 혹은 임금보다 많은 노동력들을 요구, 즉 〈착취〉하건 간에 어떤 식으로든 잉여가치를 생산하려고 부단히 시도한다. 100원을 넣어서 얻어낸 200원 속에 포함된 100원의 여분이야말로 투자된 원금 회수를 넘어서는 이윤이기 때문이다.
라캉 정신분석의 주요 개념인 잉여향유plus-de-jouir은 잉여가치와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무의식적 주체에게 확실한 것은 현실[상징계]에 대한 불만인데, 아무리 아버지의 법을 잘 지켜도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인 주이상스는 충족된다)
여기서 무의식적 주체는 마치 임금 고용된 프롤레타리아처럼 자신이 노동력을 투하해서 생산한 상품, 즉 현실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몫을 빼앗아갔다고 느끼게 된다. 물론 그것은 앞서 살펴봤듯 부르주아가 일방적으로 독점하는 잉여가치이다. 같은 맥락에서 무의식적 주체는 상징계를 넘어서는 무언가, 상징계로 환원하고서도 남는 잉여(혹은 잔여)를 갈구하게 된다. 좀 더 정확히는, 그 잉여 속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바가 있다고 믿게 된다. 정신분석 용어로 다시 번역하자면, 상징계를 뜻하는 대타자A(프랑스어로 타자를 뜻하는 Autre의 앞 글자를 따온 것)로 환원되지 않는 소문자 a, 즉 〈대상a〉에게 욕망의 몫이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질서의 잉여물인 대상a는 기꺼이 향유된다. 마치 노동력의 잉여를 탐닉하는 부르주아처럼 말이다.
물론 잉여향유는 일종의 환상이다. 대상a 자체가 환상의 구성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주체에게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건, 반복컨대 본인이 느끼는 현실[상징계]에 대한 불만뿐이다. 상징계는 결코 완벽하지 않고, 또한 완벽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상징계에서 중요하게 치부하지 않았기에 소외된 대상이나 혹은 상징계의 반례 같은 것들에 환상이 투여되는 것이다(“저곳에 구원이 있을 거야!”). 그렇게 환상으로서 구성된 대상a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원인으로써 규정된다. 물론 이는 소위 〈객관적인 것〉을 생산하고 독점하는 정상 세계를 왜곡한 결과물이다. 즉 왜상歪像, anamorphosis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설명을 인용해보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욕망 자체가 단정하는 대상인 대상 소문자 a(objet petit a), 즉 욕망의 대상-원인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욕망의 역설은 그것이 소급해서 그 자신의 원인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즉 대상a는 욕망으로 ‘왜곡된’ 응시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는 대상, ‘객관적인’ 시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대상a는 언제나 정의상 왜곡된 방식으로 인지된다. 이러한 왜곡을 벗어나서는 대상a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a는 바로 이 왜곡, 즉 욕망이 소위 ‘객관적 현실’에 도입한 혼돈과 불안의 이와 같은 잉여의 구현이자 물질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a는 변혁의 가능성인가? 대타자의 바깥(이웃)이란 점에서 분명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보수성이 더 강조되는 편이다(정신분석엔 비관주의가 지배적이다). 이를테면 고전적인 예시인 독일의 제3제국 시절을 떠올려보자. 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 앞에 무능한 1930-40년대 독일이란 상징계는 분명 불만족스럽다. 따라서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상상된 반유대주의가 발흥한다. 이때 바이마르 헌법에 반유대주의가 명시됐던가? 아니다. 반유대주의는 나치추종자 및 인민 일반에 오랫동안 뿌리내려있던 왜곡된 시선에 불과하다. 대상a로서의 유대인은 일시적으로나마 불만을 만족시키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결국엔 독일 사회를 파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대상a는 현실을 봉합시키는 은밀한 조력자로서 기능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상a는 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되레 뚜렷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선 대상a를 경유하지 않고서 세계 그 자체, 즉 실재le réel를 바라보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랬다간 인간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리게 된다고 본다. 정신병적 우주를 향유했던 유아기로 퇴행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정신병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다.」앞선 예시를 다시 가져오자면, 바이마르 시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근본 원인이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뜯어고쳐야만 하는데, 이는 몇 해 전 무자비하게 살해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사례처럼 기득권과의 전면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반유대주의의 발흥은 당대 독일 시민사회의 조악한 정치적 역량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적으로 번역하자면, 현실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마주할 바엔 반유대주의라는 달콤한 환상을 택했다는 뜻이다.
1. 슬라보예 지젝, 김소연·유재희 역,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 32쪽.
2. 위의 책, 33쪽. 「(……)사물을 분리하는 경계는 일종의 “병리적인 균열”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정신병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응시에 미치는 상징적 질서의 효과이다. 언어의 출현이 현실 속에 구멍을 만들며 이 구멍이 우리의 응시의 축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언어 자체 속으로, 그리고 비스듬히 보이는 왜상적 응시로써만 채워질 수 있는 사물the Thing의 공백 속으로 반향시키기redouble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