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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막1:1-13절)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
신문이나 방송사에서 일반 국민들에게 속히 알려야 할 긴급 뉴스가 있을 때는 그 핵심 내용만 간단하게 *속보*로 보내게 됩니다. 예전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톱-뉴스 *속보 중의 속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언제나 긴가민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너무나도 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무엇인가 인간들과 다른 면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들과 똑같았습니다. 즉 인간들과 똑같이 잡수시고, 대화를 나누시고, 피곤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거나 능력을 나타내실 때는 완전히 인간들과 달랐습니다. 즉 예수님은 도저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나면, 예수님은 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다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예수님에 대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여러 복음서 중에 가장 뉴스 속보에 가까운 복음서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은 복음서 안에 많은 교훈과 논쟁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방송에 비유하면, 정규방송과 같은 것입니다.즉 그 복음서를 쓴 저자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복음서를 구상하고,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짜임새 자체가 치밀하고, 예수님의 교훈과 논쟁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그런 교훈과 논쟁들은 최소한도로 줄이고, 가급적이면,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능하면, 빨리 예수님이 누구시며, 복음이 무엇인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짜임새 자체가 치밀하고, 예수님의 교훈과 논쟁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치명적인 장애는 언제나 마태복음이었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언재나 마태복음의 그늘에 가려져서 제대로 빛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내용이 거의 비슷한데다가 마태복음에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마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을 더 중요시 하게 되었고, 많은 경우 마가복음이 마태복음의 요약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네 개의 복음서를 다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한 고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예전 사람들에게는 우리같이 완성된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나누어진 서신서나 복음서들이 쪽 복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너무나 불완전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위해서는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헬라인들을 위해서는 의사 누가가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을 위하여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네 개의 복음서를 다 가지게 되었고, 사실은 복음에서 엄청난 대박 즉 부자가 된 셈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가장 간단하고 요약된 형태로 기록된 마가복음이 천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즉 독일의 라크만은 *마가복음이 가장 원초적인 복음서이고, 마태나 누가는 이 마가복음을 참고로 해서 자신들의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라크만이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확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주장 이후로 마가복음이 마태복음의 요약판이라는 억울한 누명은 좀 벗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이유는 복음서 하나하나마다 기록된 배경이 다 있는데, 그 배경은 무시하고, 한자리에 놓고 선후를 따지다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마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중언이 있습니다. 즉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으로서 로마에서 베드로를 따라다니면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순교를 당해 죽게 되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마가에게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즉 *당신이 통역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해서 전도할 수 있도록 문서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가는 자신이 통역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기억해서 이 마가복음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실제로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었고,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태나 누가나 요한 같이 복잡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거의 이야기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전 사람들은 이야기 중심의 가르침에 굉장히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내리터브(narrative)라고 하는데, 예전의 이야기식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마가복음을 많이 연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옛날 사람들은 마가복음 같은 것은 그 전체를 모두 암송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창(昌)을 하는 사람들이 흥부전이나, 춘향전을 다 암송해서 전수한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나 마가나 초대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의 어떤 뉴-스 보다 중요하며,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시간이라도 빨리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Ⅰ.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의 시작은 아주 단호한 선언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1:1절)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마가복음 서두부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에 대한 말씀은 복음이라는 데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은 모두 로마의 위대함에 도취되어 있었고, 로마 황제를 *신(神)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듣는 기쁜 소식이라면, *로마가 어느 야만족을 점령했고, 얼마나 많은 금(金)이나 노예들을 빼앗아 오느냐?* 는 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런 세상적인 생각에 대해 분명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충격을 받아야 할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방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면,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예를 들어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어느 나라에 로마 황제의 아들이 방문했다면, 이것은 보통으로 엄청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번은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에 로마 황제가 방문했습니다. 그때 아테네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로마 황제를 환영했고, 모두 그 황제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했습니다.(우리나라 교황이 방문했을 때처럼...)
그곳에서 로마 황제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그때 아테네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을 했든지, 그 다음에 황제가 하는 소리를 전혀 들을 수가 없었고, 심지어 아테네 사람들이 너무나도 황제에게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사람들에게 깔려 죽지 않도록 빨리 피신시켜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반대로 로마 황제가 그 현장에서 아테네 사람들을 모두 노예로 삼는다고 하든지, 전쟁을 선포했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오셨다면, 모든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은 그냥 방문하고 가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고 가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의 다른 어떤 이야기들보다 먼저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아마 사람들 중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서 드라마를 보지 못하면, 궁금해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재방송을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작*이라는 것은 *복음이 처음 시작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곳에 엄청나게 큰 지진과 핵폭발이 일어났다면, 과학자들은 그 폭발이 일어난 위치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충격과 에너지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어 주변으로 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이 가장 먼저 터진 곳은 광야였습니다. 즉 복음의 신앙은 로마의 수도가 아니요, 또 그리스의 아테네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폭발이 일어난 곳은 놀랍게도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였습니다.
아무도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은 시작되었습니다. 즉 엄청난 영적 지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굳어있던 땅들이 갈라지게 되고, 옥문이 열리게 되며, 사람들은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그 복음의 능력이 이제는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마가나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로마는 복음의 시작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로마는 복음으로 치면,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고,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이렇게 보냈습니다.
벧전5:13절)...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이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곧 로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가나 베드로가 갖고 있는 인식에 의하면, 당시 로마에서 가장 잘 살고, 가장 성공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바벨론의 성공입니다.
결국 로마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기꺼이 바벨론의 영광과 출세를 버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후에 그들이 찾아간 곳은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갔던 광야는 물도 없는 곳이었고, 양식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또 거기는 집도 지을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철저한 불모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광야로 들어갔을 때, 모세에게 속은 줄 알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그곳에서 죽이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8:3절)...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까지 사람들은 먹는 양식(빵)으로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수입이 필요합니다. 만약 지속적인 수입이 없으면, 우리는 언젠가 집을 떠나야 할 것이고, 결국 거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복된 말씀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틀림없이 빵이나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도 않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라는 이상한 양식을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만나는 서리같은 고운가루)
광야는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가계도 없고, 백화점도 없고, 마트나 커피숍도 없습니다. 광야는 너무나도 덥고, 또한 너무나도 추운 곳입니다. 광야는 *내일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대책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인간의 마음이 가난해질 수 있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는 어디일까?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물질적으로 궁핍한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있는 사람 팔 복중에서 첫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바벨론이나, 애굽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갖출 것을 모두 다 갖추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광야로 가는 것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즉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 적응하여 뿌리를 내려서 평범하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뿌리를 뽑으셔서 아무도 없는 광야로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연구하고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1:2-3절)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예전에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먼저 사신이 갔습니다. 그래서 길에 행인들이나, 잡상인들을 통제해서 왕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게 하고, 길이 막혀있으면, 길을 뚫어서 지나가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은 도시에서 일하지 않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광야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또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조차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광야 길을 처음 가는 사람은 반드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길을 물어봅니다. 즉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데, 제대로 가는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광야에 사신을 보내셨습니다. 즉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길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서 외치는 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덕 위에 한 사람을 세워 놓아 거기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 길을 안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이고, 곧은 길을 만드는 자입니다. 즉 그 전에는 아무리 길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고, 계속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외치는 자를 만나고 난후부터는 그 길이 지름길이었습니다. 여기서 곧은 길이란 가장 빠른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분주한 세상은 바벨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내 영혼을 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 광야는 출세의 길도 없고, 성공의 길도 없고, 부자가 되는 길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끝없는 불모지만 계속되는 곳입니다. 여기서 우리 인생은 망한 것 같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패한 것 같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광야에서 방황한 기간은 완전히 낭비한 시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느 한 순간 길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그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잡으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곧은 길이 생기게 됩니다. 즉 하나님과 나 사이에 고속도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4-6절)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우선 성경은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던 그리스에 유학을 가서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성공한 정치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광야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세례 요한은 낙타털로 짠 옷을 입었다고 했는데, *낙타털 옷은 아마 그 당시 가장 거칠고, 찔긴 천으로 된 옷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한번 입으면, 10년 이상 입을 수 있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띠도 가죽 띠었기 때문에 10년이나 20년 이상 얼마든지 쓸 수 있는 허리 띠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먹는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잘못하면 *세례 요한은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기인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가끔씩 산에 올라가서 도(道)를 닦느라고,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도 자르지 않고, 몇 년씩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단순히 세상과 담을 쌓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철저한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세례 요한이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그를 붙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거기는 양식도 없고, 수도 시설도 없고, 백화점이나 편의점도 없습니다.
거기서 세례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하나만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옛날 이스라엘의 만나가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메뚜기를 잡아먹고, 들 꿀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목이 마르면, 밑에 내려가서 요단강물을 손으로 퍼마시면서 철저한 광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면, 거의 미치게 됩니다. 즉 사람 혼자 산에 둔다든지, 들판에 두면, 너무나도 사람들이 보고 싶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그리워서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출세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지 모릅니다. 세례 요한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상당한 시간 광야에서 하나님 생명의 말씀 하나만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세례 요한이 붙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였습니다. 즉 *생사(生死)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외치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아마 세례 요한은 *처음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붙잡고 성경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광야는 사람 사귀기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우리가 도시에서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를 하면, 전부 길을 가기가 바빠서 이아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귀찮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남는 것이 시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만나서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누구나 쉽게 사귈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나가는 한 두 사람을 붙잡고, 성경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광야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길을 발견했습니다.
즉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구원의 길을 광야에서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구원받으려면,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즉 *부동산투기니, 주식투자니, 승진이니, 하는데서 떠나서 광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스스로 광야로 들어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것을 붙잡으면, 안 됩니다. *살아있는 순수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들의 위로나, 인간들의 정을 잡으면 안 됩니다. 오직 능력의 말씀을 붙잡을 때, 거기서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곧은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Ⅲ.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증거 했습니다. 하나는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더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죄와 부패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니까 이 세상의 삶에서 부패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정신과 감정과 영혼과 육체와 모든 것들이 썩어 있었고, 부패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완전히 죄를 씻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 세례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교만했고 잘난 체 했으며 죄가 아닌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뇌를 끄집어내 씻어서 다시 넣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도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것은 이것을 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어놓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제가 잘난 줄 알았고. 제 마음대로 제 멋대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 영혼을 씻어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입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7-8절)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이 했던 엄청난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고, 그 샌들 끈을 매고 푸는 것은 가장 낮은 하인이 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가장 낮은 하인도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지위와 능력과 영광이 세례 요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피조물인 인간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의문스러운 것은 과연 이때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을까? 입니다. 아마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물을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동이로 물을 뒤집어쓰면, 물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뒤집어쓰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교회나 교인들은 오랫동안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일어나고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 세례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처음 부어 주셔서 중생하게 하시든지, 성령 체험을 하게 해서 충만하든지,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시는 것 자체가 성령 세례입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 안에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더러운 것이 있으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즉 몸이 더럽다든지, 옷이 더러우면, 물로 씻으면 됩니다. 그러나 금(金) 원석(原石)안에 있는 불순물이나, 철광석안에 있는 불순물은 물로 씻어서는 안 되고, 불로 녹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형체 자체가 변하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이 빠져나가고, 순수한 금(金)이나 철(鐵)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죄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은 불같이 임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녹이고,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 세례는 단순한 도덕적인 결단이나 각오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이 진정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죄의 사슬은 끊어지고, 능력의 종이 됩니다. 즉 우리는 죄를 이기고, 사탄을 물리치는 능력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내면속이 시원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성령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는 죄로 인한 답답함과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떤 일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매일같이 독(毒)을 몇 사발씩 마시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독약을 마시면, 우리의 속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성령은 이 고통을 깨끗하게 치료합니다. 우리가 예수 영접하여 믿기 전에는 성격이 거칠고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후는 공격적인 기질들이 모두 온유하게 변하게 됩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성령에 충만할 그때입니다.
이것은 기계로 치면, 최고의 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수천 억짜리 이상의 가치있는 자가 됩니다. 즉 우리 안의 무궁무진한 가치가 모두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도저히 계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가진 천사 이상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공급됩니다. 성령의 세례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성령의 축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짜로 이 어마어마한 복(福)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1:9절)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인의 대표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광야로 가셔서 광야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1:12-13절)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도 광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만나를 먹지 못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은 40일을 그냥 굶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시험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낮아지지 못하게 하려고 했고, *하나님을 시험하게 하려 했고, *세상 영광을 사모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모두 거부하시고, 목숨을 걸고 말씀을 붙드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들짐승과 같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은 시작에 불과했고, *예수님은 3년 후에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 죄는 죽어야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면서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먼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즉 인간의 상태는 절대로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며, 죄는 점점 더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 인간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으로 세례받기를 바랍니다. 충만한 능력과 기쁨을 받기를 바랍니다.아-멘
▣직분도 반드시 *필수과목*을 필하고 *세례를 받아야*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전 천주교인 포함). 찬송가 184장 *불길 같은 주 성령*
site/Kakao 선교회 안내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운 가정과 영생을 위하여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대상 : ▷불신자 ▷개종자 ▷코로나시대 바빠서 교회출석 못하는 자 자발적인 전화 신청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 ▷영생 받고 사망 후 천국 가길 원하는 자. 즉▷허무에서 가치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권태에서 행복으로, ▷염려에서 기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저주에서 풍요로, ▷종교인에서 주님의 제자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불 땔감에서 천국 맨션(mansion)을 원하는자.
물론 각자 의지와 기질과 순종여부에 따라 차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21:8절)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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