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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판결문은 어떤 관계일까. 판사는 명(名)판결을 뛰어넘어 명판결문을 쓰기 위해 기꺼이 며칠 밤이라도 새울까. |
최근 서울중앙지법이 판사들에게 판결문 작성 지침서를 만들어 돌렸다. (참조 《조선일보》 2월 12일자 A10면)
판결문에 마침표를 찾기 어려워 ‘시루떡 같다’는 지적, 일본식 용어가 많아 ‘외계어 같다’는 탄식은 오랜 한국 법조계의 얽은 자화상이다. 이번 지침서는 판결문을 쉽게 쓰자는 판사들의 다짐을 담은 반성문이라고 《조선일보》는 전한다.
이 기사를 접하며 기자는, 지난 2000년 무렵 변호사 엄상익씨가 정을병(1934~2009)과 만났던 일이 새삼 떠올랐다. 소설가 정을병은 5·16 쿠데타 당시 ‘국토건설단’에 끌려가 경험했던 강제노역 실상을 소설로 썼다가 문인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정을병이 겪은 옥살이에 대해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고 2년 후 대법원은 이미 세상을 떠난 그에게 사건 37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생전 그는 엄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판사들이 내면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법문학부(法文學部)라고 해서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을 함께 공부시켰는데 지금은 왜 법만 외우게 해 수학답안지 같은 판결문을 쓰게 할까요?”
정을병의 말은 판결문이 법조문(法條文)의 복잡한 공식에 따라 풀어내는 수험생들의 획일적인 답안지와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무죄(無罪)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이 아닐까요?”
무죄 판결이 적은 이유는…
기자는 두 사람의 대화 중 정을병이 언급한 ‘무죄가 안 나오는 이유가 판사들의 문장력 부족 때문’이란 말에 주목하게 됐다. 그 말이 사실일까.
직접 판사들의 판결문을 구해 읽어 보았다. 그리고 변호사와 전현직 판사들을 두루 만났다. 그들에게 판결문 쓰기와 관련한 질문을 여럿 던져 보았다.
소설가에게 글은,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일기단필(一騎單匹)의 경기병(輕騎兵)과도 같다. 소설가는 매일 수많은 적(敵)에 둘러싸여 전쟁을 치른다. 그의 적은 출판사이고, 무시무시한 평론가이며 매스컴의 위력을 등에 업은 기자다. 또 그의 적은 냉혹한 독자들이다.
그렇다면 판사와 판결문은 어떤 관계일까. 둘의 관계는 전투적 긴장관계로 맺어진 대상일까. 판사는 명(名)판결을 뛰어넘어 명판결문을 쓰기 위해 기꺼이 며칠 밤이라도 새울까.
유감스럽게도 취재 과정에서 접한 판결문은 전사(戰士)로서의 글쓰기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법무관 출신 A 변호사는 기자에게 “소설가의 작품이 감동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獻身)의 결과나 또는 모든 걸 버리는 살신(殺身)의 노작(勞作)이라면 판사의 근엄한 판결문은 메마른 회색빛 심판을 거칠게 쏟아낸 잿빛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일까.
몇 해 전 법원 내부 정보통신망(코트넷)에 오른 <해외사법소식(46호)>에 아주 이색적인 판결문 한 편이 실렸다. 캐나다 출신 배리 데이비스(Barry Davies) 판사가 시(詩)로 쓴 판결문이었다. 이 판결문은 서울북부지법 최영헌 부장판사가 번역해 올렸다고 한다. 현재 그는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변호사로 재직 중이다.
<코프리노호(號)는 작은 목조 바지선을 이끌고서 케이프 빌을 벗어나 서녘으로 향했다.
두 척의 배는 바람을 타고서 순조롭게 조용하고 평온한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바지선과 본선을 잇는 견인선이 시야에서 벗어날 줄 모르며 함께 밤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카마나를 지났을 때 거센 바람이 불자 바다는 더 이상 예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작은 바지선은 이내 가라앉고 말았지만 코프리노호는 가라앉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바지선을 전복하게 하였을까?
갑판원이었을까 아니면 갑판의 풍우방책이었을까?
또 다른 의문은…보험 측면에서 볼 때 과연 누구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을까?>
이 판결문은 바지선과 본선 사이에 벌어진 전복사고의 배상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 번역문이긴 하나 전혀 판결문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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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
판사, 맹아자(盲啞者)가 되다
이에 대해 엄상익 변호사는 “한국 판결문의 경우 일본식 용어와 문체가 판사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사법연수원에 가면, 일본 판사들이 100년 전 쓴 일본식 문장이 하나의 문례(文例)가 되어 예비 법조인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피고인은 ○○에 종사하는 자인바…’ 식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으며 판검사들은 점점 우리말과 우리글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맹아자(盲啞者)가 되어 갑니다. ‘법’은 지켜도 ‘문법(文法)’은 외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왜 있잖아요, 미국 가서 어설프게 영어 배워 귀국한 사람의 말 속에 튀어나오는 영어단어처럼 말이에요.”
서울중앙지법 정재훈 판사는 ‘법원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대학시절, 대법원 판결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고, 용어가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역시 문장이 너무 길어서였던 것 같다. 그때 느낀 것은 ‘역시 대법원 판결을 쓰신 분들은 내공이 고강하셔서 유난히 호흡이 길고, 그래서 이렇게 긴 문장을 쓰시는구나’라는 희화적인 소감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일심법원 B 판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판결문 쓰기 교육을 이렇게 회고했다.
“만약 사법연수원 교수가 ‘소송 당사자가 읽기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애당초 연수원 교육부터 판결문은 무색투명하게, 감정의 개입 없이 쓰도록 교육받았어요. 심지어 단문(短文)이 아니라 ‘~고, ~며’로 길게 써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렇게 안 쓰면 연수원 평가에서 감점을 받게 됩니다.”
작고한 서울대 국어교육과 김광해 교수는 판결문이 어렵고 난해한 이유를 ‘판사들의 국어실력과 작문능력 미숙이 원인’이라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문법(文法)’이라는 말의 뜻은 현대국어의 문장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곧 ‘말에 관한 법’이라는 뜻이다. 법조계가 모름지기 법을 관장하는 기관이라면 특히 현대국어의 문장구성 원리인 ‘문법’도 솔선해서 잘 지켜야 할 것이다.>(논문 <법조계의 글쓰기에 대한 진단과 대책> 중 일부)
김 교수는 생전 “안개 같은 생각들을 조리 있는 문장으로 바꾸는 기술이 바로 국어문장 구사력”이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판결문들은 내용이 난해해서라기보다 국어 문장으로서의 완성도가 미진한 까닭에 정확한 뜻을 알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장 앞에서는 그 어떤 독자라도 안개 낀 들판을 헤매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판결문 고쳐 쓰기의 例
김광해 교수는 “판결문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황”이라고 규정하며 대법원 판결요지를 국어 어법에 맞게 고쳐 쓴 일이 있다. 다음은 2003년 4월 22일 자 대법원 판결요지다.
<의료법은 제30조 제2항에서 의료인이나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아닌 자의 의료기관개설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제66조 제3호에서 이를 위반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의료법이 의료의 적정을 기하여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위 금지규정의 입법취지는 의료기관 개설자격을 의료전문성을 가진 의료인이나 공적인 성격을 가진 자(이하 의료인 등이라고 한다)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의료질서를 확립하고, 영리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국민 건강상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이는 점이다.(이하 생략)>
긴장하여 읽지 않으면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김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쳤다.
<의료법은 제30조 제2항에서 의료인이나 의료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아닌 자가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같은 법 제66조 제3호에서는 이를 위반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둔 취지는 이러한 의료법 규정을 두어 적정한 의료 혜택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국민의 건강을 보호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위 금지규정의 입법 취지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자격을 의료 전문성을 가진 의료인이나 공적인 성격을 가진 자(이하 의료법인 등이라 한다)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의료질서를 확립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국민 건강상의 위험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판사는 인문학과 종교적 품성을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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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
서울행정법원장과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역임한 ‘법무법인 충정’의 이우근 대표 변호사는 법조계 주변에서 ‘인문학 전도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한때는 문학도였고 판사 시절, 야간 신학대학을 다녔으며 오케스트라 지휘자, 칼럼니스트, 예술의전당 이사라는 다양한 직함도 갖고 있다.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시절, 연수원가(歌)를 직접 작곡했고 명예신학박사답게 교양서 《톨레랑스가 필요한 기독교》와 두 권의 묵상집을 펴냈다.
이 변호사는 “빼앗긴 자유,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으려는 이웃의 호소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법률가는 분쟁당사자들에게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법의 사도(使徒)”라고 한 종교법학자 한스 동부아(Hans Dombois)의 말을 자주 되새긴다. 그의 말이다.
“법은 사실을 추구합니다. 법률 용어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언어인데, 이때 실체적 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문학은 그걸 뛰어넘는 삶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현실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 객관적 사실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 인간관계의 진실을 파악하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법만으론 부족합니다. 판사는 인문학과 종교적 품성을 갖춰야 차원 높은 판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예로 들었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두 사람은 사형수와 창녀다. 둘 다 사회의 암적 존재인 셈이다.
“법이 파악한 사실만 따진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반(反)사회적 인격의 만남이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지고지순의 연인입니다. 문학은 비록 허구지만 그 속에 녹아든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세계를 보려면 법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고교시절, 문예반에서 교지를 만들며 시와 소설을 썼고 대학시절에는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도 이청준, 도스토옙스키,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의 소설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판사 시절, 퇴근하며 사건기록을 한 보따리 챙겨 와 판결문을 썼다. 문장은 간결하게, 만연체 같은 긴 문장을 피했고 주어와 술어를 분명하게 썼다. 불필요한 우회적 표현도 삼가려 노력했다. 후배 판사들에게도 간결한 문장쓰기를 강조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판결문에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표현을 ‘해야 한다’로 고쳐 썼어요. 다 일본식 문장이거든요. 후배 판사들의 판결문에 ‘위 김갑동’은 어쩌고, ‘위 김갑동’은 저쩌고 하는 표현이 수두룩하기에, ‘위’자를 하나만 남기도 다 지웠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김갑동이란 이름은 하나의 고유명사인데, 도대체 판결문 속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몇 명 등장하느냐’고요. 그런 글은 아무도 안 읽습니다. 저는 길게 이어진 문장을 7~8개 단위로 끊어 쓰려 했고, 주술(主述)관계를 명확히 하려 했어요.”
―판사들의 땀과 고뇌가 담긴 판결문을 기대할 순 없나요.
“판사가 삶의 진실을 고뇌하고 이를 판결문에 담을 수는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면 설익은 것이 돼 오히려 진실을 흐리게 만들 수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판결은 절대 훈시가 돼선 안 됩니다. 일간지에 ‘판사가 피고인을 준열히 꾸짖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꾸짖을 수야 있지만, 그게 도가 지나쳐 인격에 대해 판단까지 해선 곤란합니다.”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커리큘럼에 인문학, 문학 포함해야
이우근 변호사는 “법학은 이론과학이 아니라 경험과학”이라며 “경험이 많을수록 좀 더 익은 판결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군대 안 간 사람은 20대에 단독판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변호인은 물론 사건당사자들도 불안합니다. 속으로 ‘저 사람이 뭘 알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판결에는 축적된 경험과 안목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이론만으론 부족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법령이나 법조문, 판결문을 국어어법에 맞게 고쳐야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며 “판사들은 법률용어를 순화시킬 우리말을 모르고, 국어학자들은 우리말은 알지라도 법을 모른다”고 했다.
“양쪽을 아우르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 가곡은 참 아름답습니다. 시인이 쓴 시도 주옥 같아요. 그런데 시는 우리 운율, 곡은 서양기법으로 작곡하니 시에다 곡을 붙이기가 까다로워요. 서양의 음악전문학교에 가 보세요. 성악과나 작곡과는 실기만 가르치는 교수만 있는 게 아니라 시학(詩學)을 가르치는 시인교수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야 시의 운율과 음악의 선율이 일치하는 곡을 부를 수 있고 작곡할 수도 있어요. 슈만이나 슈베르트가 왜 당대 최고일까요? 바로 시적 운율과 음악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변호사는 “로스쿨과 사법연수원 커리큘럼에 인문학과 문학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판사가 법 기술적 판단만 잘해선 곤란합니다. 인격적 고뇌가 담긴 판결과 판결문을 쓰기 위해선 인문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판결문은 법 문서이지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문학적 향기를 담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선 곤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