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 4장 공소시효 끝나다 ② |
[검찰 측 수사 요원의 수기] 내가 범인으로 믿었던 두 사람(下)
한증탕 속의 복역수
5월14일경. 그날은 근하 군의 외삼촌인 최형욱을 연행하러 갔다. 초량동 그의 집 앞 골목에서 대기하다가 崔의 도주로를 차단하는 게 나의 임무였다. 그러나 별 탈 없이 근하 외삼촌을 임의동행의 형식으로 검찰청 4호 부장실로 데려올 수 있었다. 김태현 검사는 그에게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등 평범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김 검사는 갑자기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 세상에 자기 조카를 죽이는 사람도 있는가”며 타이르듯 말했다. 崔 씨가 당황한 듯 머뭇거리며 무엇이라고 말을 꺼내려고 하자 金 검사는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로 고함을 꽥 질렀다.
“이 세상에, 이 세상에 새 발의 피 같은 어린 조카의 가슴에 칼을 꽂는 그런 놈이!”
최형욱은 얼굴빛이 노랗게 변한 채 “아닙니다”를 연발했다.
“수갑 채워!”
金 검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얼마 전 동네 주민과 싸웠던 사실이 있어 우선 그 건으로 구속을 시켰다.
한편 정대범은 군 복무 중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부산에 있는 모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나는 이따금 헌병대로 그를 데리러 가기고 했고, 그의 애인이 면회를 오면 입회를 하기도 했다. 정대범은 면회 온 애인에게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야! 걱정마라. 내가 조그만 애 하나 죽인 덕분에 간첩들을 일망타진하게 되었는 기라. 결과적으로 나는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이고, 여자 간첩 두목을 잡게 되면 상금도 타게 된다 말이다.”
정대범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김이수(김기철)와 함께 300번지 사창가에 갔더니 북에서 내려온 여자 간첩이 책상에 칼을 꽂으면서 100만 원을 줄 테니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뒤에 김금식은, 그 여간첩은 단순한 창녀에 불과하며 단지 자기가 정대범을 이 사건에 끌어들이기 위해 돈을 주고 그런 연극을 꾸몄다고 나에게 말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했다.
한쪽 팔에 수갑을 나누어 차고 다니다 보니 어느덧 나는 빵모자 사나이 김금식과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완전 삭발된 죄수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빵모자, 죄수복 대신 걸친 기성복, 당당한 체구, 그리고 정답게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형제같이 위장한 만큼 친밀도도 빨랐다.
“형! 도망가고 싶지 않아? 형이 도망치면 내 팔은 어떻게 되지?”
“짜식아! 도망가려면 못갈 줄 알아? 걱정하지 마.”
이렇게 스스럼없이 농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근하 군 유괴 사건이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김금식의 귀띔에 따라 간첩선이 접근할 것이라는 광안리 해수욕장 일대를 사전답사한 뒤 우리 일행은 해운대 극동호텔 한증탕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實刑(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죄수가 일류 호텔 한증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그에게 슬며시 한 번 물어보았다.
“금식이형! 지금 징역을 사는 거요, 기분을 내는 거요?”
“야 임마! 누가 듣는다. 내가 슬슬 불어야지 이런 식으로 그럭저럭 징역을 때울 게 아니냐.”
아무튼 그의 정보에 의해 5월27일 밤엔 對간첩작전이 펼쳐졌다. 수영비행장에는 각종 기관의 차량 수십 대가 몰려들었고, 요소요소에 병력이 배치되어 간첩의 출현을 기다렸지만 또 허탕이었다. 이 對간첩작전에서 나는 김태현 검사로부터 또 하나의 색다른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
“덕수야! 너는 만약 총알이 나에게로 날아오면 몸으로라도 그것을 막아야 한다.”
경호원이라기보다는 총알받이의 역할까지 주어진 셈이었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날 나는 다시 한 미치광이 노인의 정신 감정을 재주껏 해내야 했다. 아마 작전 실패의 원인이 고정간첩에 의한 사건 정보탐지 때문이었고, 그 당시 XX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움막을 짓고 ‘天王寺(천왕사)’란 간판을 달아놓고 좀 정신 나간 짓을 하던 노인이 있었는데 그가 고정간첩의 용의선상에 올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함정 수사의 미끼 역할
한편 이 무렵 박영태란 의문의 사나이가 근하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 되고 있었다. 김금식에 의하면 그는 이북을 몇 차례나 왕복한 사실도 있으며 권총까지 소지하고 북괴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김금식의 진술에 따라 우리는 대구로 향했다. 밤 12시가 넘어 대구역에 도착하니 연락을 받은 대구검찰청 수사관들이 지원차 나와 있었다. 그들과 합세한 우리 일행은 김금식의 안내를 받으며 대구시 비산동의 주택가에 들어섰다. 박이 살고 있는 집의 구조가 김금식에 의해 그려졌다. 박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내가 살짝 담을 넘어 들어가 대문을 열고 일행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고요히 잠든 이 동네 사람들에게 도둑 소동을 일으키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박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뒤였다.
우리의 일행―金 검사, 具 씨, 김금식과 그의 호송 책임을 맡은 교도관 두 명, 그리고 나는 대구 역전 근방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김금식과 나와 具 씨 세 명이 한방을 썼는데 具 씨는 이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김금식은 담배 종이를 수갑의 톱니에 물리고 두어 번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수갑을 풀어버렸다. 나는 그가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처럼 서로를 연결한 수갑을 풀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김금식 일당이 범행을 모의했다는 대구시 서구 달성동 부엉이집과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갔다는 자갈마당 앞 사창가, 노동회관 등을 돌며 예비 현장검증을 한 뒤 여관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행동이 수상했던지 여관 주인이 112에 신고,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이 출동하여 여관을 포위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날의 예비 검증에서는 근하의 외삼촌이 김이수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 위해 대구로 올라왔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매일 밤 뭇 사내들을 상대하는 창녀들이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사창가인 자갈마당을 찾아가 하룻밤을 지내면서 “나는 부산에 사는 김이수다”는 말을 되풀이해 ‘김이수’란 이름만을 기억시켜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듯한 어느 날, 김 검사는 보따리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며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덕수 너 이 사람(부산시경의 형사)과 함께 대구로 가서 박영태의 거주지를 알아내도록 해라. 그리고 네가 그 집을 다녀왔다는 증거를 남겨둘 필요가 있으니까 그 집 아이들과 얼굴을 익혀두도록 하고, 이 보따리는 박의 처에게 팔든지 맡겨두든지 해라.”
보따리 속에는 김금식의 변장에 사용했던 옷가지와 라디오 한 대가 들어있었다. 동행한 ㄱ 형사가 박의 딸이 다니는 국민학교를 알아내었기 때문에 학적부를 뒤져 대구 대봉동에 있는 박의 집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박의 집은 소방도로에 인접한 조그만 구멍가게였다. ㄱ 형사와 나는 일단 가까운 여관에 여장을 푼 다음,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나 혼자 박의 집으로 향했다. 손님도 없이 어두컴컴한 가게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나는 큰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잠시 후 박의 처로 보이는 여인이 촛불을 켜 들고 나오며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줌마, 내 모르겠는교? 나요 나.”
나는 아는 체하며 열려진 방 문턱에 걸터앉았다.
“누군교? 나는 모르겠는데….”
“아이고 아줌마도! 비산동 살 때 아저씨 밑에 있던 학규를 모르겠는교?”
나는 시침을 뚝 떼고 얼렁뚱당 둘러쳤다. 집안에 다른 사람은 없는 듯했다.
“닷새 전에 출감했는데 갈 곳도 없고 해서 아저씨한테 인사나 하려고 찾아왔는데…. 아저씨 어디 갔는교?”
“그 사람이야 항상 밖으로 나돌아다니니 집에 붙어 있을 날이 있어야제.”
박의 처는 마지못해 대답은 하면서도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뜯어보았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일단 여관으로 돌아왔다. 내 자신이 생각을 해도 나의 연극이 그럴싸했다는 느낌이 들어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다시 박의 집을 찾아갔다. 중학생 정도의 남자 아이와 국민학생인 듯한 계집아이 둘이서 집을 보고 있었고 박의 처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 어디 갔노?”
애들을 살살 구슬리며 물어보았더니 비산동에 있는 이모 집엘 갔다고 했다. 혹시 그곳에 박이 숨어 있을지 몰라 주소를 알아낸 다음 가까운 공중전화로 여관에서 기다리는 ㄱ 형사에게 우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박의 가게로 돌아와 쓸데없는 장난을 해가며 아이들과 한참 놀고 있으려니까 박의 처가 돌아왔다. 뚱뚱한 어떤 여자와 함께였다.
“아줌마! 아저씨도 없고 하니 내사 고향으로 내려갈라요. 차비하게 돈 있으면 만 원만 빌려주소.”
박의 처는 돈 가진 게 없다고 했다. 모르는 여자도 있고 해서 이 정도로 물러서기로 했다. 그날 오후 10시경 나는 김 검사가 준 보따리를 들고 다시 박의 집으로 갔다 보따리를 박의 처 앞에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이 보따리는 뭔교?”
“아저씨도 없이 아줌마 혼자 사는데 차비 얻어 쓰기가 미안해서 여관 옆방 손님 걸 슬쩍해왔수다.”
박의 처는 펄쩍 뛰었다. 한동안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하룻밤만 보관시켜두었다가 다음날 찾아가기로 했다. 함정 수사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보따리는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생떼를 써 억지로 맡긴 것이었다. 만약에 그녀가 신고를 하면 나는 절도죄로, 그녀는 장물 취득죄로 엮어 넣어 박의 소재를 추궁할 계획이었다. 다음날 내가 다시 박의 집을 찾아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으려니까 30대의 한 사나이가 가게로 들어섰다. 인상착의로 보아 박은 아닌 듯했다. 그는 박의 처와 반말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대뜸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젊은 친구. 내가 BBS에 넣어줄 테니 구두나 닦아보지 그래.”
내가 싫다고 하자 그는 보따리를 받아들고 나의 허리띠를 움켜쥐더니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태웠다. 알고 보니 그는 대구 동부경찰서의 형사였다. 경찰서에서 그는 나를 꿇어앉게 하더니 발길질을 했다. 나는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명함을 꺼내 집어던지면서 내뱉었다.
“여기 전화 좀 걸어주시오.”
그 명함은 같이 온 부산시경 ㄱ 형사의 것이었으며, 뒷면에는 “수사상 행동하는 사람이니 협조 바랍니다”는 글도 씌어 있었다. 명함을 보더니 이 친구의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여갔다.
“형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이제는 순서가 바뀌었다. 나는 책상을 꽝꽝 치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그 여자와 어떤 관계요? 가만히 보니 무슨 뒷거래가 있는 모양인데 당신 관직, 성명 적어주시오. 당신 때문에 수사상 차질이 생기게 되었으니 우리 영감이 날 추궁하면 난 당신한테 그 책임을 전가하겠소!”
생각지도 않던 역습을 당해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형사를 계속 몰아붙이다가 그를 데리고 여관으로 갔다. ㄱ 형사에게 대강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그 대구 형사를 소개시켜주었다. 대구 형사는 박이 자기의 고모부라고 했다. 친고모부가 죽고 난 뒤 큰 사업을 하고 있다는 박에게 속아 재혼을 했는데 자신이 뒷조사를 해보았더니 전과 5범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이미 애까지 생겨나 할 수 없이 여지껏 살고 있노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는 그를 통해 박이 살고 있는 부산의 주소까지 확인한 다음 부산으로 되돌아왔다. 박영태의 집 주변에서 우리는 잠복을 계속했으나 박은 집을 나가 어디를 쏘다니는지 나타나질 않았다.
정말로 무죄일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근하 군 유괴범 일망 타진’이라는 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을 가득 채웠다. 내가 알기로는 부산지검장의 승진발령 축하 선물로써 미궁에 빠진 근하 군 유괴 사건 해결을 계획보다 빨리 발표했다고 했다. 具 사범은 박영태도 못잡은 상황에서 너무 빨리 사건 해결을 발표했다고 투덜댔다. 物證(물증)이나 범인 조직 등 여러 가지 증거가 완전히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떠들썩하게 공개된 것이었다. 범인 체포가 알려진 후 대신동 근하 군 집 앞에서의 현장검증 때는 구경꾼들로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때부터 나는 정대범을 묶은 포승을 잡고 따라다녔다.
대구에서의 현장검증을 위해 대구역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정대범이 나에게 “야 덕수야, 내가 신호를 하면 포승줄을 늦추어다오. 기자 새끼들 카메라 몇 개 박살낼 테니까”고 소근대었다. 포승은 엮은 끝 부분을 풀어내면 4미터 가량 늘어날 수 있었다. 역에 내려서자 대기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정대범이 손짓을 했다. 나는 슬쩍 포승을 늦추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대범이의 얼굴에 초점이 맞추어진 어느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향해 2단 옆차기가 터져나갔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둥그러진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며 정대범이 싱긋 웃어보였다.
대구역에서 대구교도소로 향하는 현장검증 팀의 뒤로는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경찰 사이카를 선두로 구경 인파를 정리할 기동대 차량, 지프, 각 신문사의 깃발을 높이 매단 승용차, 방송국 차량 등 마치 카 퍼레이드라도 벌이는 듯했다.
“덕수야 임마! 너 우리 덕분에 출세했다. 언제 이렇게 칸보이를 받아가며 드라이브를 해보겠나?”
대범이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배짱이 세면 저럴까, 생을 포기한 상태면 저렇게 되는 걸까,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최형욱과 김기철(김이수의 본명)은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나는 김금식 및 정대범과 친해지면서 따로따로 범행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는 서로가 일치하는 것이었다.
후에 나는 그들이 모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김금식이 대구 역전의 어느 여관에 누워서 한 말이 떠올랐다.
“때에 따라 나는 사건을 180도 돌릴 수 있다. 나의 머리는 法典(법전)을 다 왼다.”
정대범이 “아무래도 당신들은 범인이 아닌 것 같은데…”하고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도 떠올랐다.
“나는 이미 사형을 각오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무죄가 되는 경우 두 번 다시 이런 사건이 안 나도록 내가 저들(최형욱과 김기철)을 죽이겠다. 그 자식들이 나를 이용해 요꼴로 만들었다.”
김금식이나 정대범과는 이상한 인연으로 정이 들었다. 그들이 무죄 선고를 받고 나와 같은 하늘 아래서 산다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나는 아직도 의문을 못 버리고 있다.
무죄 확정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내가 증인으로 못 나간 것이 한스럽기까지 했다. 김태현 검사가 김금식의 각본에 얹혔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金 검사는 누구에게 속임을 당할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남자답고, 무서우면서도 잔정이 많은 호탕한 집념의 인물이었다. 신문을 할 때의 그의 말투는 상대방의 허점과 폐부를 찌르는 섬뜩한 맛이 있었고 아랫사람들을 무섭게 다루면서도 농담도 곧잘 했으며 특히 범죄 세계의 俗語(속어)들을 잘 구사하여 ‘과연 명검사구나’라는 인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김 검사가 김금식의 함정에 빠졌다니! 나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 뿐이었다.
이제 1982년 10월17일로 그 사건도 공소시효가 끝난다니 언젠가 김금식과 대범이를 만나 막걸리 한잔이라도 나누면서 옛날 얘기로 돌려야 할 그날의 진실을 알아보아야겠다.
금식형, 그리고 대범이, 만약 이 글을 읽거든 나에게 연락 한번 주길 바라오.―‘검찰 측 수사 요원의 수기’ 끝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