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성, 취미(거창마라톤클럽) 22-18,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꽂아 둔 책 한 권에 눈길이 간다.
괜히 꺼내서 뒤적뒤적, 펼쳤다 닫았다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마구잡이로 읽는다.
지난해, 이보성 씨를 지원하며 쓴 정합성 평가서다.
‘담 주는 꼭 나가야긋네’, 책 제목이 무언가 말하는 듯하다.
“쌤, 드럼 가요? 몇 시 차 타고 가는데요? 네 시? 네 시 맞죠? 확실하죠?”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바라는 것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오래 기다렸던 드럼학원에 간다고 신발을 제대로 신었는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달릴 때도 있었고,
몇 번을 번복한 끝에 새 운동화와 운동복을 쇼핑하고도 마라톤동호회에 나가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이보성 씨가 자기 일로 감당하기 바랐습니다.
마음껏 기대하고 실망하고 아쉬워하기 바랐습니다.
이보성 씨는 스물여덟, 청년입니다.
음악과 운동을 좋아합니다.
여전히 드럼학원 수강생, 마라톤동호회 회원이고 막내입니다.
「담 주는 꼭 나가야긋네」 4쪽, ‘인사 글’ 발췌
책에는 새해를 시작하는 이보성 씨 희망도 있고, 이보성 씨를 돕는 사회사업가의 다짐도 있다.
인사 글도, 아버지의 축하 글도, 소개 글도 실려 있다.
가족, 드럼학원, 마라톤동호회, 입주자자치회 총무, 집안일…, 이보성 씨 한 해가 기록되어 있다.
플림프턴: 그렇다면 선생님은 본인 작품을 다시 읽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수정하고 싶다는 생각 없이요?
헤밍웨이: 가끔은 글 쓰는 게 힘들 때 기운 내려고 읽습니다. 그러면 글쓰기는 늘 힘들었고 때로는 거의 불가능했다는 걸 기억하게 되거든요.
『헤밍웨이의 말』 발췌
이보성 씨가 이런 말을 했던가? 이렇게 살았지.
내가 이런 글을 썼던가? 이렇게 일했지.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지난날 기록이 문득 생경하게 다가온다.
이보성 씨를 지원하는 날이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이보성 씨는 당신 삶과 당신 일로,
이보성 씨를 돕는 나는 나의 사회사업과 나의 일로 함께하는 일의 끝이 눈앞에 다가왔다.
함께해서 즐겁고 좋았다고, 덕분에 많이 웃고 많이 배웠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힘들고 지치거나 밉고 외면하고 싶은 시간도 적지 않았지만, 이건 내 마음에 꾹 남겨 두어야지.
이보성 씨라고 다르지 않을 테니까.
아쉬운 마당에 우리 함께해 서로 좋았던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러고 싶다.
다시 책을 읽는다.
지난해 기록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 힘이 되는 글을 이곳에 옮겨 적는다.
1.
“선생님!”
“선생님 아니고 엄마.”
“엄마! 이 사람 누군데요?”
“선생님. 선생님이지.”
“정진호. 정진호 선생님, 맞죠?”
경험으로 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좋아서 묻는다는 걸.
엄마도, 지금 이 순간 같이 온 직원도.
「2021년 10월 29일 금요일 일지」 발췌
2.
“아무튼 보성이 잘 좀 봐 주십시오. 매번 귀찮은 일만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얼른 아버지 말에 대답한다. 말하면서 절로 손사래가 쳐진다.
“아이고, 아닙니다. 보성 씨한테 필요한 일은 당연히 도와야지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덕분에 보성 씨가 올해 대구 큰 병원 치과도 가고 신경과 진료도 받았습니다.
아버지 없이도 어떻게든 갈 수는 있었겠지만, 때마다 먼 걸음 함께해 주셔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겁먹을 일도 없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건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치료만 잘 마치면, 치과도 신경과도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고 몇 달에 한 번,
드문드문 가면 되니까 보성 씨도 수월할 겁니다.”
「2021년 12월 29일 수요일 일지」 발췌
3.
“그럼요. 일단은 즐기는 게 우선이고…. 한 박자 뒤에 ‘이어서 해야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딱 될 것 같은데….
보성아, 한 번 더 해 보자.”
“한 번? 발, 손, 발, 손, 다다다다, 다닥! 됐죠? 됐죠?”
한 번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돌려 반응을 살핀다. 눈이 마주친 김창석 선생님이 웃는다.
“그래도 혼자서는 안 해도 옆에서 이야기하면 발은 계속하니까, 지금은 발을 계속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게 좀 익숙해지고 나면 또 연습해 볼 수 있겠죠.”
선생님이 페달 밟는 이보성 씨 발이 손만큼 익숙해지는 게 우선일 것 같다고 말한다.
박자가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페달 밟는 발에 힘이 잔뜩 실려 있다.
이보성 씨 흥에 못 이겨 그동안 몇 개나 교체했다는 학원 의자가 생각난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부서져라 밟는 게 낫다.
그래 보인다.
「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일지」 발췌
4.
“어때요, 보성 씨? 이제 책 기억나죠? 보성 씨 책인 거 알겠죠?”
“네, 네! 확실합니다. 이거 책 맞죠? 이보성.”
“그럼요. 보성 씨죠. 그래서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책이 나오고 나서 그동안 많은 분이 이 책을 읽었대요.
같이 보면서 공부하기도 하고요.”
“그래요? 아이구.”
“군산이라는 곳에서도 선생님들이 이 책을 읽고 공부도 하셨다는데, 제가 와서 이야기를 더 나눠 주면 좋겠다고 하시네요.”
“저? 저요? 정진호. 정진호 선생님.”
“네, 저요. 정진호. 제가 가서 보성 씨 동호회 이야기를 더 해 주면 좋겠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보성 씨한테도 물어보는 거예요. 가도 좋을지, 어떨지요.”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는지 진지한 얼굴로 한참 말이 없다.
“어 …, 나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가는 게 좋을지, 안 가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네, 네. 그렇죠.”
“보성 씨 생각에 가는 게 좋으면 ‘잘 다녀오세요’ 인사해 주면 좋고, 아닌 것 같으면 ‘안 가면 좋겠다’ 하면 되죠.”
“아니, 뭐요? 쌤, 잘하고 오세요.”
“오! 방금 동의한 거죠? 가도 된다는 거죠?”
“내가 뭐요! 몰라요, 몰라. 이거 책 볼래요.”
응원한 게 쑥스러운지 얼른 말을 돌린다.
이보성 씨가 이쪽저쪽 책장을 넘겨 가며 책을 읽는다.
「2021년 10월 9일 토요일 일지」 발췌
5.
이보성 씨가 낙선했다.
재선의 뜻을 품고 자진 출마한 입주자자치회 총무 자리였다.
내가 나간 것도 아닌데 막상 떨어지니 아쉬웠다.
표정을 숨기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결과 발표 후에 이보성 씨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나왔다.
자기 이름이 많이 나와 관심이 갔던 모양인데,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항의처럼 보여 아쉬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재선의 희망도, 낙선의 아쉬움도 온전히 이보성 씨 몫이기 바란다.
개표에 앞서 정기 총회 진행을 맡았다.
한 해 살림을 보고하는 것부터 내년 계획을 안내하는 것까지 총무 일이 많다.
총무가 나설 첫 순서에 앞으로 나와 인사하고, 순서에 맞추어 프레젠테이션 자료 넘기는 일을 잘 감당했다.
상황을 보아 이때다 싶은 순간 살짝 이야기하면 키보드를 눌렀다.
전자기기를 능숙하게 조작하는 이보성 씨 강점이 빛났다.
나중에는 낙선했다고 마냥 슬퍼하지 않고, 맡은 역할 끝까지 즐겁게 해내는 이보성 씨를 보며 안도했다.
2년 고생했으니 이쯤에서 아쉬운 마지막, 아름다운 인수인계를 그려 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
본인 뜻이 중요하겠지만 2년 후, 뜻이 있어 다시 출마한다면
오늘 이 낙선이 이보성 씨 스토리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총무 이보성입니다.”
이보성 씨 인사가 귓가에 맴돈다.
임기 마무리까지 이보성 씨가 주인 되게 잘 돕고 싶다.
어떤 결과에도 이보성 씨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2021년 12월 10일 금요일 일지」 발췌
2022년 12월 14일 수요일, 정진호
아, 헤밍웨이의 말에 위로와 도전을. 선생님의 기록 방법과 사용하는 단어들이 가끔 ‘생경’한데, 그럴 때 참 좋아요.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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