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여는 감사(룻2장8-12)
인생의 지혜서인 잠언은 31:11~31에서 현숙한 여인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현숙한 여인의 값을 매긴다면 진주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성서를 읽으면서 현숙한 여인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보았다. ‘마리아? 드보라? 에스더? 요게벳? 한나?’ 그들은 모두 민족과 역사 앞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영향력을 끼친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정말 현숙한 여인에 해당되는 자를 꼽는다면 나는 룻을 들고 싶다. 추수밭의 주인이신 보아스는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인이라고 불렀다.
룻3:11을 보면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도성의 사람들이 다 현숙한 여인으로 인정하였다. 룻은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현숙한 여인으로 칭송받는단 말인가?
1. 신앙의 고백이 분명한 사람이기에 (룻1:16)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기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기에 국경을 넘어 국적을 버리고 귀화한 사람이다.
2. 어머니 가문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 사람이기에 (룻1:17)
슬픔과 가난, 절망과 어려움만 남아있는 가문, 그러나 죽음이 갈라놓지 않는다면 결코 어머니를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3. 말씀을 의지하여 일하는 사람이기에 (룻2:2)
밭에 나가서 떨어진 곡식을 줍는다는 삶의 결의, 그것은 이상을 실천하는 행동력이다. 일의 귀천을 보지 않고 룻은 밭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국인과 가난한 자를 위해 규정된 말씀의 약속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4. 근면하고 열심 있는 사람이기에 (룻2:7)
밭에 나가 일하는 사환들 틈에서 떨어지는 이삭을 줍지만 룻은 게으르지 않는다. 룻은 잠깐 쉰 것 외에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허리를 굽혀 일한다.
우리는 이것 외에 현숙한 여인의 많은 요소들을 찾을 수 있지만 특별히 이 여인의 모습을 조명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룻이 감사가 있는 여인이라는 점이다.
도대체 감사란 무엇인가?
감사란 고맙게 느끼고 그 고마움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정성으로, 물질로 표현되는 감사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감사는 값없이 받은 은혜를 느낄 때부터 시작된다.
감사는 물질의 혜택, 좋은 집, 좋은 여건들 틈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조건적이다.
이는 감사의 조건이 사라지면 감사를 못한다.
감사는 신앙적인 차원의 일이다.
세상적 덕목이 아니고 영적 차원의 일이다.
어떤 사건이든지 거기서 은혜를 느낄 때 감사가 표현된다.
오늘 룻이 매력이 넘치는 여인, 우리 마음에 품고 품어야 할 신앙의 애인같은 이로 세워지는 것은 고난 중에 감사, 역경 중에 감사, 남편을 잃은 초상 중에 감사, 처절한 삶의 위기 속에서 감사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적 차원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요즘 밀양(密陽)이라는 영화에 대해 말이 많다.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거처지를 옮긴 한 여인이 그곳에서 피아노 교습소를 차리고 지내다가 유괴범에 의해 아들을 잃은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영화는 밀양에 있는 교회가 이 여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의 값싼 신앙을 공격하고 용서란 얼마나 아프고 고통받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도연이 분한 신애의 신앙과 용서의 방법은 복음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남는다. 신애의 복음 이해는 작가와 감독의 기독교 이해로서 철저히 복음의 무지에서 나온 영화이다. 용서에는 자기 의가 있어서는 안된다. 빛을 보지 못한 신애는 자기의 의로써 용서한다. 신애는 유괴살인범을 용서해주기 위해 유치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할 때 충격을 받고 실신한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교회가 거짓말쟁이로 보일 뿐이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평안할 수 있는가?
그러나 룻을 보라. 룻은 빛을 알았다. 룻에게 베들레헴은 밀양이 아니다. 모든 것이 은혜의 빛이다. 룻이 이 베들레헴에서 살아야 할 인간적 조건이 없었다. 그러나 룻은 베들레헴에 살려고 온 여인이다. 아픔과 눈물도 감사함으로 받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빛이 룻에겐 밀양이 아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룻의 삶의 태도이다. 삶의 모습이 고난이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나간 과거, 실패한 과거, 꿈을 망친 과거, 사내를 죽게 한 과거, 아기도 낳아주지 못한 과거, 어느 것에 붙잡혀서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 미움과 보복이 없다. 그의 삶의 자세는 긍정적이다. 새로운 날을 향해 일어선 모습이다. 어둠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을 딛고 삶을 활기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의 삶의 태도는 낱알 줍는 노동을 사랑하고 있다. 살아남은 생을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바로 신앙이다. 밭에 나가 일하는 에너지가 바로 감사 신앙인 것이다. 그 노동의 자리에서 인생의 전환이 일어난다.
룻2:8~10을 보면 룻을 만난 보아스가 세 가지를 배려하는데
①인정
②보호의 말을 하고
③목이 마르거든 물을 마셔라며 생수를 제공한다.
보아스는 친절을 베풀었다. 룻은 생수 제공을 받은 후 이렇게 화답한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룻은 최고의 예를 표해 감사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값을 치루는 일 없이 냉수를 마시는 일은 은혜라고 말한다. 이방 여인인 자신을 돌아보시는 돌봄이라고 감격한다.
룻을 은혜를 느꼈다.
그 은혜에서 일어난 룻의 감사는 삶을 바꾸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첫째, 작은 감사가 더욱 큰 축복의 문을 열었다. (룻2:12)
룻2:12 감사하는 룻에게 주어진 보아스가 던진 축복의 말은 이렇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날개 안으로 뛰어든 룻에게 보아스는 온전한 상을 선언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 때 감사해보라. 더욱 큰 축복의 문이 열린다.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니 온전한 상의 축복이 약속된다. 그리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떡을 제공받았다.
둘째, 작은 감사가 더욱 놀라운 대화와 비밀의 문을 열었다. (룻2:20)
룻2:20을 보라. 시어머니와 며느리 룻의 관계는 그날 되어진 추수밭의 일로 대화가 무르익었다. 어떻게 일을 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시모는 룻2:20에서 자부에게 말한다.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이 비밀은 며느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안이었다. 룻을 밭에서 만나 친절과 호의를 보여준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라는 것은 가문의 미래를 여는 가능성이었다. 고목나무가 꽃이 피고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빛이 들어오는 가능성이었다. 감사가 있을 때 대화가 깊어지고 그 속에서 비밀의 문이 공개되고 나오미의 가정은 그 회복의 가능성으로 더욱 빨리 움직이게 되었다.
셋째, 작은 감사가 더욱 구체적인 인도의 문을 열었다. (룻2:22)
시모는 며느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며 내일 어떻게 알곡을 주으러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룻2:22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며느리의 미래에 계획을 가지고 있는 시모는 며느리를 가이드 한다. 보리 추수, 밀 추수가 끝나기까지 나가야 할 밭이 보아스의 밭이어야 함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인생은 인도자가 있을 때 성공한다. 인도자가 훌륭할수록 형통하게 되고 힘이 덜 든다. 우리의 참 인도자는 주님이시다. 보아스보다 더 크고 더 유력하고 날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감사로 나아가면 목자 되시고 신랑 되신 주님이 나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
넷째, 작은 감사가 결단과 열매의 문을 열었다. (룻3:6)
추수가 마치기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던 며느리는 시모의 제안을 듣는다. 친절과 배려의 떡을 주심과 알곡을 떨어뜨려주는 은혜, 일어나는 사건을 정확히 판단한 시모는 보아스와 룻의 관계 속에 일어나는 친밀감과 사랑을 보았다. 그래서 당시의 관습을 따라 보아스의 은혜를 향해 도전하게 한다. 그것은 가정을 회복시키는 결혼의 제안이었다.
룻은 룻3:6 “시모의 명대로 다하니라.” 하였다. 룻은 담대하게 움직였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갔다. 그리고 보아스의 밭 아래 누웠다. 보아스의 친절, 보아스의 관심, 보아스의 은혜, 보아스의 사람됨을 믿는 룻은 결단을 한다. 정말 삶에 대한 용기이다. 그리고 되돌아 온 답은 룻의 프로포즈를 받아주는 기업을 무를 자가 되어 준다는 약속이었다. 밭 아래 누운 룻이 이때 들었던 최고의 말씀이 바로 네가 현숙한 여인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안다는 선언이었다. 그리하여 룻은 결혼을 약속 받는다.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삶의 긍정적 태도가 만든 작은 감사의 열매다. 작은 감사를 놓치지 말자. 영적 차원에서 인생을 사는 감사가 마침내 문에 문을 열더니 회복이 되고 그는 진주보다 귀한 여인으로 세워진 것이다.
감사가 열쇠다.
매력적인 성도가 되는 길은 감사가 열매를 맺는 씨앗이다. 감사는 천한 것이 아니다. 아픔과 고통, 재앙을 축복으로 받아드리는 감사는 귀한 것이다. 감사가 없으면 영원히 고난이란 고통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한다. 감사는 모든 불행의 해독제이다. 잠긴 것을 녹이는 힘이다.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자.
▶교회를 감사하자.
▶일터를 감사하고 이웃을 감사하자.
▶만남을 감사하자.
▶보호 받음과 잘됨을 감사하자.
그러나 신앙이란
고난의 날에도 이해되지 않는 날에도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아름다워지자.
바르고(성령), 목욕(회개)이 필요하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삶을 감사하는 것이다.
▶멋진 성도,
▶매력이 넘치는 성도,
▶ 가장 보배로운 성도가 되는 길은
감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은혜 받은 것을 느끼라.
삶의 모든 것이 은혜임을 볼 수 있을 때
모든 문을 여는 감사가 생활화된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현숙한 성도라고 불러주실 것이다.
출처: 김철환 목사(오목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