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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滅門)-3
육가문의 가주인 비천도(飛天刀) 육자성은 악가의 공격에 대해 대책을 일로음살 육궁지와 논의를 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가주. 더 이상 내가 도움이 되지 못되는구먼.”
“개방에서 정보를 더 이상 빼올 수 없다는 거군요.”
“내 비록 개방의 장로라 하지만 이름뿐이라네. 게다가 현재 산동의 총타주는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풍 장로의 제자일세.”
“개봉 총단에서 정보를 빼올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한 일이네.”
일로음살 육궁지는 육자성의 숙부로 일찍이 개방에 투신해 현재 장로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18년 전 육가문이 악가를 공격했을 때 막대한 정보를 빼돌려 육가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큰 힘을 보태준 육궁지가 오늘에 와서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개방이 숙부님을 푸대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습니다.”
“허허허~. 그래도 명색이 개방의 장로인 내가 개봉 총단을 떠나 본 가에 몸을 의지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답답하군요... 악가를 물리친 지 이제 고작 18년이 지났고 아직도 산동의 패권을 장악하지도 못했는데...”
“하북팽가와 남궁세가를 끌어 들인 것이 실수였네.”
18년 전 육가문은 자신들 힘만으로 산동악가를 공격하기 어려워 하북팽가와 남궁세가를 끌어 들였다. 두 가문의 힘을 빌린 덕분에 악가를 몰락시킬 수는 있었지만 육가문은 산동지역의 삼분지 일만 겨우 차지하게 됐다. 게다가 두 가문의 압력에 눌려 제대로 세력을 키우지도 못했고 고수들도 양성하지 못했다.
탕.
“빌어먹을 팽가와 남궁가!”
육자성은 탁자를 내리치면 이를 갈았다.
“세력만 양성했어도 악가의 애송이들 공격에 이렇게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인데...”
백영대의 공격을 받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육가문의 내막은 참담했다. 산동을 영구히 자신들 영역으로 만들려던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압력 때문이다. 자기 힘이 아닌 남의 힘을 빌려 산동의 패자가 되려는 것부터 잘못했던 것이다. 육자성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지로 참으며 이를 갈았다.
“가주님.”
“무슨 일이냐?”
육자성의 음성이 고을 리가 없었다.
“남궁세가의 인물이 방문했습니다.”
“들어와라!”
한 사람이 양손에 배첩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남궁세가의 인물이 올린 배첩입니다.”
육자성은 배첩을 펼쳤다.
“누가 온 것인가?”
육궁지가 배첩의 주인에 대해 질문했다.
“남궁무병입니다.”
“음... 드디어 이리가 왔군.”
남궁무병은 산동에 파견한 남궁세가의 무리들을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육가문에 가장 많은 압력을 가한 인물이었다. 육궁지와 육자성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방문을 허락한다고 알려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모셔야 할지...”
“여기로 데려와라.”
“네.”
배첩을 가지고 온 수하가 밖으로 나가자 육자성은 이를 갈았다.
“또 무엇을 챙기려고 온 것인지 모르겠군.”
“가주. 이가 없으면 잇몸이 아픈 법이네. 남궁세가에서 그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힘을 합해 악가를 다시 치자고 하겠지요. 다만 문제는 이리 같은 남궁무진이 이 틈을 타서 뭘 요구할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입니다.”
“설마 무리한 요구를 하겠는가. 현 상황은 남궁세가 입장에도 좋은 일이 아닌데...”
육궁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곧 남궁무병이 들어올 것이니 모든 것이 드러날 겁니다.”
육자성의 말투는 싸늘했다.
“가주님. 남궁세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해라.”
문이 열리자 남궁무병이 나타났다.
“남궁무병이 육 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어서 오시구려. 남궁 대협.”
“따뜻한 환대. 고맙게 받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어서 이리 앉으시오.”
“알겠습니다.”
남궁무병은 육자성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남궁 대협. 좋은 차를 준비했으니 마음껏 즐기시오.”
“고맙습니다. 그런데...”
남궁무병의 시선이 육궁지를 향했다. 육궁지는 앉은 자세에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육궁지라 하오.”
“오~. 개방의 육 장로님을 뵙다니 뜻밖의 행운이군요.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무병이 자리에서 일어난 포권을 하자 육궁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트렸다.
“하하하~. 늙고 힘없는 거지가 무슨 공부가 있겠소. 오히려 이 늙은이가 남궁 대협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다오.”
“겸양의 말씀입니다.”
남궁무병과 육궁지는 겉으로는 웃으며 정겹게 대화를 나누지만 그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두 사람은 소리장도(笑裏藏刀)의 표변이었다. 육자성은 두 사람이 대화가 끝나자 중간에 끼어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무슨 일로 오신 것이오?”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악가를 치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불할 대가는 무엇이오?”
남궁무병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산동의 절반을 본 가의 영역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멸문당할 위기에서 벗어나고 영역이 절반이나 늘어나게 해주는 대가로 싸지 않습니까. 게다가 숙적인 악가마저 멸문하는데 말입니다.”
육자성과 남궁무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으하하.”
“아하하.”
두 사람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렇구려. 오히려 대가가 싼 셈이구려. 그런데 과연 팽씨 일족이 그리 쉽게 물러나겠소? 비록 상황이 안 좋아 철수했다고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들어 올 것인데...”
“하북팽가는 몰락했습니다.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명맥만 겨우 유지할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산동 북부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때는 본 가에서 해결할 겁니다.”
“좋소. 그렇다면 지난 세월 동안 생긴 나쁜 앙금은 털고 다시 한 번 손을 잡아봅시다.”
하북팽가의 영역이었던 북부지역을 육가문이 장악하는 것을 묵인한다는 약속뿐 아니라 차후에 문제가 발생하면 남궁세가에서 해결해준다는 남궁무병의 제안은 육자성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육자성은 남궁무병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본 가는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예들을 보낼 계획입니다.”
“정예라면?”
“백팔동검수와 고수급 무사 300명을 파견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악가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그렇습니다. 육 가주님.”
남궁세가는 전력의 6할 가량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태을궁에서 발생한 참변과 복수혈에 참여해 많은 정예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가주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냐?”
“급히 알려드릴 일이 있습니다.”
“들어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인은 육자성에게 다가갔다.
“잠시 귀를...”
육자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인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중년인의 속삭임이 길어질수록 육자성이 안색이 붉어졌다가 새파랗게 변해갔다. 남궁무병과 육궁지는 육자성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변해가자 중년인이 알려주는 내용이 궁금해졌다.
“알았다. 이만 나가봐라.”
“네. 가주님.”
중년인이 나가자 육자성은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일이오? 가주.”
육궁지가 질문했지만 육자성의 입은 굳게 다문 채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가 있어서 말씀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할 일도 다 마쳤으니 저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어허! 이거 미안하오. 가주를 대신해 사과드리오. 남궁 대협.”
“아닙니다. 어차피 본 가와 연락도 취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본 가의 정예들이 도착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때 악가를 공략할 작전을 수립하기로 하지요.”
남궁무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육자성도 일어섰다.
“아무래도 본 인이 실례를 범한 거 같소.”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궁무병이 사라지자 육자성은 의자에 힘없이 앉아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악군청의 며느리를 납치하러 간 녀석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단 한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또 당했단 말이오? 도대체 누가 그년을 보호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오? 살아 돌아온 놈이 있으니까 누군지 알 것이 아니요?”
“혈모니입니다.”
육자성의 입가를 비집고 나온 단어는 육궁지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연화의 이름은 그만큼 무게가 있었다.
“서, 설마 사천당문과 아미파를 절단 냈다는 마녀 말이오?”
“그렇습니다. 숙부님...”
“어째서... 어째서 그 마녀가...”
혼자의 힘으로 구대문파의 하나와 육문칠가의 한 가문을 몰락시킨 연화라는 초강자의 등장은 그들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육자성의 집무실은 침묵 속에 빠져 고요했다.
동문보가 서문종을 찾아낸 곳은 어느 객잔 안이었다. 서문종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주위에는 십여개에 달하는 빈 술독들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서문종의 얼굴은 취기로 인해 붉어져 있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동문보가 마주 앉으며 차갑게 말했다. 서문종은 질책하는 기색이 역력한 동문보의 말투에도 화내지 않고 힘없이 대꾸했다.
“보면... 모르나...”
“내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텐데...”
“크크크... 이원에... 벌어진 참극이 궁금한가?”
동문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서문종은 미친 듯이 웃더니 술 한 동이를 들더니 통째로 입안으로 들이 부었다.
“이제 그만 말해보게나.”
그러나 서문종이 술만 마실 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나 역시 궁금한 점이 많으니 들어야겠네.”
“고 파파!”
동문보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고 파파가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다. 서문종은 동문보와 고 파파를 바라보다가 비어버린 술항아리를 집어던졌다.
와장창.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일어서더니 모두 밖으로 나가버렸다. 게다가 동문보의 뒤에 시립하고 있는 청귀조장의 살벌한 표정은 그들의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데 일조했다.
“이원은 배신당했소.”
“배신? 금면객의 공격으로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누구한테 들었는가?”
“신녀.”
동문보가 내뱉은 짧은 한 마디에 서문종과 고 파파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장, 신녀가 아직 살아 있는가?”
“겨우 유언 몇 마디만 들었을 뿐이오.”
“시신을 찾지 못해 일말의 기대를 했건만...”
고 파파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동문보도 신녀의 비참한 모습이 기억이 나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원은 두 번에 걸쳐 공격을 당했소. 첫 번째는 금면객의 공격이었고 두 번째는 군대가 저질렀소.”
“군대라니... 어째서?”
“그래서 배신당했다고 말한 것이오.”
“이래서 권력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법이야. 권력은 불과 같아 가까이하면 타고 멀리하면 얼어버리는 법이지.”
고 파파는 탄식했다. 한때 궁중에 있었기에 권력의 무상함과 비정함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북해방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더군. 그때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그만 북해방의 뿌리를 뽑는데 정신이 팔려버렸지.”
“간단한 계책에 속았군. 그런데 사신대는 어디에 있나? 그들도 당한 것인가?”
“모두 숨어 있네. 북해방과 벌인 전투로 백여명이 죽어 이제 이백명 정도만 남아 있지만 다들 무사하네.”
“그나마 다행이군.”
동문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해방을 쳤다가 오귀조가 몰살당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우장.”
고 파파가 동문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고 파파.”
“신녀의 무덤은 어디 있는가?”
“사당의 지하에 있는 밀실에 안치했소이다. 통로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누구도 신녀의 안식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오.”
“고맙네.”
고 파파가 동문보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동문보는 고 파파에게 목례로 응답한 후에 서문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복수할 생각이라면 포기하게. 상대는 국가 그 자체이네.”
서문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없네. 신녀의 유언을 지키려면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진혼제(鎭魂祭)에 필요한 제물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금면객의 목을 취할 생각인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군대를 움직인 자의 목도 필요하지.”
“오군도독 한우령을 죽이기도 어렵지만, 설사 죽인다 해도 문제가 심각해지네. 게다가 군부를 움직인 자는 한우령이지만 사주한 자는 고신이네.”
서문종은 이원의 참극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예전에 수하였던 장수에게 자세히 들었던 것이다.
“음... 금면객에 고신, 한우령의 목 세 개면 제물로 충분하군.”
“어려운 일이네.”
“직접 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자객이라면 다르네.”
“자객!”
“내 고향에는 인자(忍者)라고 불리는 자객들이 있네. 그들은 중원의 살수들과는 기본적인 생리 자체가 틀리네.”
동문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소름이 끼치는 살의를 담고 있었다.
“오군도독을 자객 따위가 암살할 수는 없네. 게다가 고신은 자금성 안에 있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보다 신녀의 유언을 지키는 것에 비한다면 일도 아니지.”
“신녀의 유언이 무엇인데 그러는가?”
“이원의 부활, 아니 새로운 이원의 창설과 한 가지 물건을 배달하는 것이네.”
서문종과 고 파파는 이원을 다시 세워달라는 신녀의 유언에 동감했다. 더 이상 나라의 조정을 받는 조직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조직을 세워달라는 신녀의 유언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신녀가 없는 이원은 이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새로운 이원에도 신녀는 있소.”
“무슨 뜻인가?”
“신녀는 차기 신녀를 지목했소.”
“차기 신녀?”
“그렇소. 우리가 아는 여아(女兒)가 차기 신녀요.”
고 파파와 서문종은 동그래진 눈으로 동문보를 쳐다보았다.
“신녀가 지목한 아이는 송채린이오.”
“송채린! 자헌의 손녀 말인가?”
동문보는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서문종과 고 파파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자헌의 손에서 채린이를 뺐어온다. 허... 쉽지 않은 일이군.”
“내가 나서지.”
고 파파는 이원을 비웠기 때문에 신녀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신녀의 유언만큼은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 고 파파의 마음이었다. 송자헌과 겨루는 한이 있어도 꼭 송채린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송채린 주위에는 송자헌 말고도 아버지인 장천익과 친조부인 동해방주, 살막 희가의 주인까지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고 파파는 알지 못했다.
척신명이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은 채 정좌를 하고 있었다. 척금방은 탁자 위에 수십권이 넘는 장부를 쌓아놓고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다.
“아~, 이제 겨우 다 끝냈네.”
척금방은 장부를 덮고 연신 어깨를 주무르며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다.”
“이제 다 엿들었어요?”
척씨 부녀가 있는 곳은 서문종이 술을 마시던 객잔의 객방이었다. 척신명은 서문종과 동문보, 고 파파의 대화를 찰향적의 기공을 사용해 도청하고 있었다.
“신녀의 죽음을 확인했다.”
“고작 그걸 확인하려고 이 객잔에서 십일 동안 숨어 지낸 것은 아니겠죠.”
“그렇단다.”
“신녀의 생사가 뭐가 그리 중요해요. 이원이 사라진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열흘씩이나 객잔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될 필요가 있어요? 덕분에 장부를 모두 정리할 수는 있었지만...”
척금방의 입술이 반쯤이나 삐죽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척신명의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하하. 중요하단다. 항상 일을 처리할 때 끝을 말끔하게 처리해야지 나중에 후환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덤으로 얻은 정보들은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구나. 열흘을 투자해 최소한 천일을 벌었으니 백배의 이익을 번 셈이다.”
“백배의 이익이라고요! 도대체 무슨 정보에요?”
“첫 번째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투자처! 설마 세 노인이 세력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요?”
“그렇단다. 새로운 이원을 창설하려고 한다는구나. 문제는 진룡거사의 손녀를 신녀로 추대한다는 것인데...”
“이 주판을 사용하세요.”
척금방이 들고 있던 주판을 내밀었다.
“으하하.”
척신명은 폭소를 터트리며 손사래 쳤다.
“됐다. 됐어. 신 이원은 투자할 가치가 있다. 설령 신 이원이 몽상으로 끝난다 해도 세 분이 나눈 대화를 도청해 얻은 정보 덕분에 쓸모없는 투자를 안 하게 됐으니 손해는 없는 셈이다.”
“쓸모없는 투자라니요?”
“고신과 한 도독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 두 사람은 권력의 핵심이잖아요.”
“앞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전(紙錢)이면 충분하니 우리가 선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죽었어요?”
지전은 황천 가는 노잣돈으로 장례행렬이 뿌리는 종이 뭉치였다.
“아직은 살아있다. 하지만 사부가 나선 이상 그들의 목숨은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부라니요? 아버지에게 사부가 계셨어요?”
척금방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했다. 부친에게 사부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고, 또한 누가 부친에게 가르쳤는지 궁금했다.
“귀면도 동문 어른이 내 사부란다.”
“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사부는 왜국 사람이다. 최고의 병법가(兵法家)로 더 이상 적수를 찾을 수 없어 중원으로 넘어 오셨지.”
“병법가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동문 어른의 모습과는 차이가 좀 심하게 나는군요.”
척금방이 알고 있는 병법가의 모습은 고아한 풍채를 풍기는 문사였지 피에 굶주린 마왕이 아니었다.
“왜국의 병법가와 중원의 병법가는 문자만 같을 뿐 그 뜻은 다르단다. 그리고 사부는 병법가 이전에 최고의 인자였다.”
“그렇다면 고 태감과 한 도독에게 투자할 필요가 없군요.”
“그렇단다. 그 자금을 신 이원에 투입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
“문제는 자금을 유입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군요.”
“완벽한 곳은 없는 법이지. 찾다보면 틈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나설 필요는 없다.”
척신명은 인내의 필요성을 척금방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척금방이 인내를 배우기엔 아직 무리였다. 척금방은 부친의 뜻을 눈치 챘지만 애써 무시했다.
“잡초는 싹이 트기 전에 제거해야 하는 법이에요. 시와 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선수를 치는 것이 낳을 때가 많아요.”
“너무 앞지르면 오히려 일을 망치는 법이란다. 아직은 관망할 때이니 그만 하기로 하자꾸나.”
“하지만... 알았어요. 그런데 고 태감과 한 도독을 만나지 않게 됐으니 북경에 갈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다시 강남으로 돌아가나요.”
“산서로 갈 생각이다. 홍면금살군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부친이 갑자기 홍면금살군의 이름을 거론하자 척금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악맹의 모임인가요?”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하더구나.”
“으흥~, 냄새가 나는데요.”
“갑자기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냐?”
“돈 냄새요. 뭔가 큰 거래를 준비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척신명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 쳤다.
“이제 너도 귀신이 되는구나.”
“당연하죠. 그 아버지에 그 딸이 아닌가요.”
“허! 갈수록 더하구나. 그보다 장부 정리가 끝난 거 같은데, 어디 빈 곳이 있더냐?”
“철들 때부터 장부 정리를 해왔어요. 빈 곳이 있을 리 없죠. 물론 이번 장사가 너무 복잡하고 커서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깨끗하게 처리했어요.”
척금방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문은 얼마나 발생했느냐?”
“상단이 10년 간 죽어라 일해야 벌 돈을 챙겼어요. 역시 전쟁을 일으켜 이익을 챙기는 것만큼 확실한 돈벌이는 없는 거 같아요.”
“물론 그렇단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생기지 않지. 이번 전쟁도 내가 지난 10년 동안 대강남북을 돌아다니며 투자한 결과의 부산물이다. 그리고 그 정도 이문을 보려고 10년을 허비하지 않았다.”
“군대가 움직여 강남 전역을 전장으로 변한 게 끝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또 무엇이 있는 거예요?”
팔마당과 장강수로연맹의 인물들이 척씨 부녀의 대화를 들었다면 염통이 터졌을 것이다.
“웃지만 말고 말 좀 해주세요.”
척신명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척금방은 애교를 부렸다.
“스스로 찾아 보거라. 이 또한 네게 훌륭한 수업이 될 거다.”
“쳇, 정망 말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척신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척금방은 토라진 얼굴로 객실 안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푸른 늑대조각을 이용해 하북에 시선을 끌어놓고 강남에서 환란이 일어나도록 해 이익을 챙겼어요. 그렇다면 이번에 강북에 전란이 일어나도록 한다는 건가요?”
“똑같은 수법은 두 번 통하지 않는다.”
“그렇군요. 그럼 도대체...”
척금방은 방안을 서성이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답을 구했다. 하지만 척신명은 언제나 고개를 저으며 해답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아버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시간은 충분하단다. 이번만큼은 너 스스로 찾아야 한다.”
척신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척금방에게 물려줄 최고의 자산으로 뛰어난 능력의 개발이라고 생각한 척신명은 지금까지 수많은 수련과 학습을 시켰다. 이번이 훌륭한 수련과 학습과정을 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척신명은 방안을 서성이며 고민하는 척금방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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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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