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동서남북
[동서남북] 미래세대 부담 1600조… 국민연금, 왜 못 밝히나
조선일보
최형석 기자
입력 2023.04.17. 01:05
https://www.chosun.com/opinion/dongseonambuk/2023/04/17/3IF522NVTJD2XGU2CME4RYSX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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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만 하는 국민연금 빚 계산… 정치권·특정 지역·투자자 눈치
연금 적립액 2055년이면 고갈… 국가 존립 위해 연금 개혁 필수
국민연금에서 미래 세대가 부담해야 할 빚을 파악하는 것은 연금 개혁의 출발점이다. 그 빚 규모를 정확히 알아야 연금 적립금이 얼마나 부족한지, 개혁을 어느 강도로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국회, 국책연구소, 학계는 물론 국민연금에 물었더니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서로 떠넘기기 바빴다. 국민연금은 “법상 공개 의무가 없고, 충분한 연구·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라며 난색을 표했다.
국회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국회 예산정책처가 재정 적자 문제를 제기했다가 여야 정쟁이 격화되고 예정처만 중간에서 시달렸다”며 난색의 이유를 설명했다. 한 연금 전문가는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금 개혁은 교수·공무원도 이해 당사자이므로 동료 눈치를 살핀다”고 덧붙였다.
그나마 보건사회연구원 윤석명 연구위원의 추계가 거의 유일하다. 그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경우 2500조원의 부채가 있고 현 920조원 적립금을 적용할 때 약 1600조원이 미래 세대 부담으로 떠넘겨진 상황이다.
개혁 착수에 미적대는 사이 위기의 실체는 ‘회색 코뿔소’처럼 눈앞까지 닥쳤다. 최근 추계에서 국민연금은 2041년이면 적립금이 줄기 시작해 2055년이면 바닥나는 것으로 나왔다. 2013년 추계 때보다 고갈 시점이 10년 만에 5년 당겨졌다.
해결책은 더 내고 덜 받는 구조 개혁과 운용 수익률 향상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난달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회는 ‘얼마를 받을지(소득대체율)와 낼지(보험료율)’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맹탕 보고서를 내놨다. 위원들 사이에서 복지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이 부딪혔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 같은 ‘결정 장애’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작년 역대 최악(-8.2%)을 기록한 국민연금 수익률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평가 손실은 80조원으로 작년 말 기준 적립금은 900조원 밑으로 내려갔다. 캐나다국민연금(CPP)의 경우 지난 10년간 연평균 10% 수익을 냈고, 전체 연금 자산(520조원)의 절반이 넘는 투자 수익(299조원)을 거둔 것과 대조적이다.
연금 전문가들은 철저히 수익률을 따지는 캐나다 등 해외 연금과 달리, 국민연금은 1300만 개인 투자자 눈치를 살펴야 하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 30년간 미국 다우평균이 22배 오르는 동안 코스피는 5배 오르는 데 그쳤는데도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세계 증시 시가총액에서 한국 증시 비율은 2%에 불과하나, 국민연금은 총투자의 15%를 국내 주식으로 채워넣고 있다. 한 연금 관계자는 “세계 증시 내 한국 비율만큼 투자하는 것이 맞지만, 해외 비율을 늘리면 ‘국내 매도를 부추긴다’며 투자자 반발이 거세다”고 말했다.
고급 운용 인력 유치는 지역 여론의 벽에 막혔다. 한 공적연금 투자 책임자는 “자산 운용은 정보 귀동냥이 업무의 90% 이상인데, 국민연금은 본사가 전주에 위치해 한계가 있다”고 했다. 면접관들이 주로 서울에서 운용역 채용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국민연금의 서울 복귀 주장도 나오지만, 법을 개정해야 해 당장 어렵다.
수많은 시어머니의 눈치 아래 진척이 더디긴 하지만, 연금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국가 과제다. 현 세대의 빚을 미래에 떠넘기는 무책임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현직 공적연금 최고위 관계자가 한 말은 절박했다. “현 한국의 연금 체제 아래에서는 자식을 낳지 말든지, 이민을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