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엄마
"잘 지내니?"
유희의 새엄마인 박해미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그녀가 유희에게 먼저 전화를 건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다 잠시 안부 인사를 하기 위해 통화를 한 적은 있었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건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내가 전화해서 놀랬니?"
그녀는 다시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어."
"그게 ..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아버지랑 이혼하기로 했어.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전화 한거야"
유희는 놀라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 껍데기뿐이었어도 가족으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 시간 좀 내줄래?"
그녀답지 않게 순수함이 베어나는 말투였다.
박해미 .. 그녀는 동욱과는 또 다른 냉정함을 지닌 여자였다.
언제나 우아하고 상냥한 모습을 하고 있었어도 그 안에는 치밀한 계산과 냉정함을 품고 있는 여자였다.
동욱이 겉이 냉정한 사람이라면 해미는 안이 냉정한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절대 들키지 않는 포장된 모습으로 사는 그녀였다.
오후 ..
유희는 해미가 알려준 곳으로 찾아갔다.
모던하고 심플한 인테리어가 격조 있어 보이는 술집이었다.
그곳 매니저가 안내해준 룸 안에는 해미가 먼저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희가 들어서자 앉으라며 손짓을 하는 해미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맞은편에 앉았다.
보기에도 거북스러울 만큼 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은 잠이 말이 없었다.
단 둘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이혼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에 유희는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밥은 먹었니?"
"네 .."
"한잔할래? 술 마실 줄 알아?"
"원래 술 못 하지 않으셨어요?"
"안했던 거였지, 오랫동안 마셔보질 않아서 못하는 줄 알았었는데 마셔보니 좋더라
너희 아버지랑 살면서 항상 긴장하며 지냈어. 안에서나 밖에서나 흠 잡힐 일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았거든"
해미는 언더락에 얼음을 채워 양주를 따른 후 자신의 옆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유희를 보며 옆으로 오라는 표정과 눈짓을 보낸다.
유희가 다가와 앉자 해미는 고개를 돌려 유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 눈빛은 진지해 보이기도 하고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더욱 미안한거는 그 것을 알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거야. 네 아버지를 놓아버리고 난 후에야 그걸 알게 됐어."
"그 사람이 저인가요?"
해미는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는 시선을 술잔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어릴 땐 예쁜 엄마가 생긴 게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다가갈 수가 없었죠. 부족함 없이 해주신 건
알지만 사랑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단지 어렵고, 불편했을 뿐 그래도
미워한 적은 없었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상황을 커갈수록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남편의 또 다른 여자에게서 데려 온 아이를 어떻게 사랑까지 주며 키울 수 있었겠어요."
"고백할 게 있어 .. 네가 나에게 받은 게 있다면 그건 널 위한 게 아니라 날 위한 거였어.
내가 널 구박한다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였지, 무식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야."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고백을 하시네요."
유희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고백은 언제나 어려운거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 그렇지.
상처를 주려고 힘든 고백을 한 게 아니라 미안함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혼하시려는 이유 .. 물어봐도 되나요?"
"네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 .. 이십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내게 마음을 주지 않은
사람이야 영원히 그럴 사람이지 .. 네 아버지에게 남자가 생겼다고 했어. 영 거짓말도 아니지만
질투조차도 하지 않는걸 보면서 그만 놔줘야겠다고 결심했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유희는 문득 자신의 엄마를 떠올렸다.
왜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시절 기억에 있는 엄마의 모습들과
다시 찾은 집에 있던 아버지의 편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 친엄마에 관해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해미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곧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을 했었지만 내게 할 줄은 몰랐다. 네 아버지에게 할 줄 알았지
아직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 없니?"
"네 .. 사실 그다지 궁굼하지 않았어요. 엄마에 관해 별 다른 좋은 기억이 없었으니까 .. 그런데
얼마전 아버지가 전에 엄마와 살았던 집문서와 열쇠를 주시며 제 몫으로 주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 집에서 우연히 아버지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게 되었어요."
술잔을 든 해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입까지 가져가지 못하고 들었던 술잔을 다시 내려놓는다.
그런 해미를 지켜보며 유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막연히 짐작은 가는 스토리에요. 제가 생각하는 스토리대로라면 엄마가 측은해지거나 불쌍하게
느껴져야 할 텐데 기억 속에 있는 엄마는 무서운 존재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이
밉기만 해요. 어린 내게 참 모질도록 심하게 대하셨거든요. 엄마의 팔자를 닮아서인지 저도
사랑하는 남자를 친구에게 뺏긴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린 자식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네 짐작대로 그 두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였어. 내가 그 날 미도에 가지 않았더라면 .. 그 곳에서
네 아버지를 보지 않았더라면 .. 첫눈에 반했더라도 서울로 돌아와 그냥 잊어버렸었다면 ..
우리 모두의 미래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과 오기가 합쳐지니 참으로 무섭더라.
그때는 몰랐어, 나의 집요함이 그렇게 큰 죄인지를 .. 네 아버지를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었지 설사 내가 갖지 못한다고 해도 네 엄마에게 주기는 싫었어. 부족할 거 없이 부유한
집안에 외모도 세련되고 예뻤던 내가 섬마을 촌스러운 네 엄마에게 내 사랑을 뺏기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어. 오만한 욕심이었지. 한동욱 .. 그 남자 내가 꼬이면 단박에 넘어올 줄 알았었는데 ..
지독하리만큼 고지식한 순정파였어."
곧이어 해미는 술잔의 술을 가득 채워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댔다. 코끝이 빨개져서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꾸역꾸역 목구멍 안으로 술잔의 술을 붓고 있었지만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유희는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이성적이고 침착한 모습이었던 새엄마의 그런
모습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 어떻게 아버질 갖게 되신 거예요?"
유희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듯한 해미가 옆에 있던 냅킨을 집어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는 차임벨을 눌러
매니저를 부른다. 잠시 후 매니저가 노크를 하고 들어온다.
"대리기사 좀 불러주세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한 목소리였다. 매니저가 나가자 머리가 아픈 듯 해미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술이 좀 취해서 내가 오버한거 같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
네가 어려울 때 언제든 날 찾아와도 괜찮아. 네 아버지와는 이혼했어도 법적으로는 너와 나
부모 자식 관계니까 네가 원한는 게 있다면 정후와 마찬가지로 너에게도 뭐든 해주고 싶어."
"아이러니하네요. 아버지와 이혼하시면 저와의 인연도 끝나는 거 가닌가요? 그걸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이것도 이미지 관리 인가요?"
갑자기 날카로운 해미의 웃음소리가 높은 천정위로 날아 올랐다.
"이미지 관리는 아니더니도 결국은 날 위하는 일이 되겠구나 .. 너에게 뭐든 해주면 미안했던
마음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유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대리기사 불렀으니까 차타고 들어가 시간이 늦었잖니."
"아니에요. 택시타고 갈게요."
유희가 나가고 혼자 남은 해미는 한참을 울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해미가 비틀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서자 티브이를 보고 있던 정후가 놀란 눈으로 해미를 바라보며 묻는다.
"엄마 술 마셨어?"
"그래, 한잔 했어. 아빠는 오셨니?"
"아니, 아직 .."
해미는 정후옆에 털썩 주저앉아 정후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을 얼굴을 가지고 가 정후의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엄마 사랑해?"
"저리가, 술 냄새나"
정후는 얼굴을 돌려 피한다.
"한번만 안아줄래?"
조금 망설이던 정후가 해미를 꼭 끌어안는다.
"엄마, 요즘 많이 변한 거 알아? 정말 딴사람이 된 거 같아 왜 그러는 건데?"
"어쩜 .. 이게 원래 내 모습일 지도 모르지 .. 강하게 보이고 싶어서 감추고 살아온 걸지도 몰라."
"아무튼 낯설다. 너무 이상해."
"아빠랑 이혼할거야."
"미쳤어?"
정후는 안고 있던 해미를 밀쳐내며 놀란 듯 묻는다.
"진작에 미쳤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미쳤으니 다행이지 .."
"진짜야? 아빠 없이 살 수 있겠어?"
"너는? 넌 괜찮아? 엄마랑 아빠 이혼해도 이해할 수 있어?"
"나야 뭐, 다 컸으니까 .. 근데 후회 안할 자신은 있는 거야?"
"그거야 모르지, 만약 후회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고 어쨌든 지금은 그 선택이 최선인거 같아."
그때 동욱이 현관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온다.
해미는 일어나 동욱에게 다가가 가방을 받아들고 동욱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욱을 도와주며 해미가 묻는다.
"화도 안나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바람나서 이혼하자는 와이프에게 화도 안내는 게 너무 이상하잖아."
"화내면 뭐가 달라지나?"
"당신답네, 당신 감정이 예전에 죽어버렸다는 걸 깜박하고 있었어요."
동욱은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고 해미는 차를 준비하려고 주방으로 향한다.
씻고 나온 동욱은 서재에 있을 것이다. 밤 늦도록 회사 일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혹은 음악이나
영화를 보거나 할 것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자정이 되면 해미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지만 언제부터인가 서재에서 잠들 때도
많았다.
해미는 차와 과일을 가지고 서재로 들어선다.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동욱 ..
"왜 이렇게 늦었어요?"
"형님이 좀 보자고 하셔서 .."
"무슨 일 있어요?"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긴요, 다 알고 있는데 빚 때문에 집도 넘어갔다면서요. 당신은 당신 집안 문제는
왜 나한테 얘기하는 법이 없어요? 자존심이에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서 그래, 아니라도 해도 처가에 손 벌리는 일은 안 해.
이혼하자면서? 이젠 정말 상관없는 일 아닌가?"
"하긴 그렇군요."
해미는 머뭇거리다 서재를 나온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해미 ..
마셨던 술과 욕조 물에 몸이 데워지니 해미의 정신은 몽롱해 진다.
몽롱해진 정신은 기억을 따라 올라가 동욱을 처음만난 그 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쿠아리우스
하늘과 바다만이 전부인 곳 .. 미도
아픈 할아버지가 요양하고 계시던 아름다운 섬 .. 미도
얼마나 서 있었던 것일가 .. 시간의 흐름마저 잊게 해주는 곳이었다.
아득한 절벽 아래로 마치 보석을 뿌려 놓은 듯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내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조심 하세요. 이곳의 아름다움에 취해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어요."
조금 후 우린 나란히 절벽 위에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흐르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지는 해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공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이곳도 .. 이 남자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내 자신이
먼 곳에서 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 나는 그 남자를 보기위해 자주 미도를 찾았다. 처음엔 몇 번 데이트를 해 주었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그는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그를 잊으려 했지만
그의 깊은 눈동자와 그윽한 목소리는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나를 피할수록 그를 원하는 나의 간절함은 커져만 갔다.
사랑이 분노로 바뀌던 날 ..
무섭도록 퍼붓던 비를 맞으며 바닷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 때문에 울어본 것도 .. 남자를 기다려 본 것도 그때가 처음 이었다.
그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끝까지 그 곳에 서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내 그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이끌고 비를 막아주는
바위 밑으로 나를 데려갔다. 한참동안을 난처한 듯한, 또는 애처로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서울에서 왔다니까 .. 그저 호기심에 만났던 것뿐이에요. 우리가 얼마나 만났다고
이러세요? 그냥 잊고 .. 다신 오지 마세요."
"그러려고 했어요. 정말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았어요.
그 짧았던 시간에 많지도 않은 추억을 하도 생각하고 떠올려서 너덜너덜 해진 그 추억을 붙잡고
겨우 하루 하루를 살았어요. 당신 이름만 불러도 심장이 파닥파닥 뛰고 숨이 멎을 것만 같은데 ..
어떻게 해요? 헤어지던 날이 매일 밤마다 생생한 기억으로 찾아와 가슴 찢어지는 이별을 매일 밤마다
해야 하는데 .. 어떻게 해요?"
나는 이성을 잃은 듯이 오열하며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와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해미씨 .. 전 결혼 할 여자가 있어요. 제발 .. 이러지 마세요. 정말 부탁이에요"
그는 내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그의 간절한 부탁이 왜 나를 분노하게 했을까 .. 차라리 내게 모욕을 주거나 화를 냈더라면 분노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일까 ..
해미는 욕조에서 나오며 현기증을 느꼈는지 욕실 바닥에 쓰러진다.
조금 후 소리를 듣고 온 동욱이 해미를 안아 침대에 데려가 눕힌다.
"괜찮아?"
"좀 어지러워서 넘어진 거야"
"조심하지 않고 .. "
잠시 해미를 살펴본 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동욱의 손을 해미가 잡는다.
"할 얘기가 있어요. 잠깐만 옆에 앉아 줄래요?"
동욱은 침대에 걸터앉아 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욕실에 있을 때 꿈을 꿈 거 같아, 미도에서 우리가 만나던 그 때 였어요.
당신에게나 예연씨에게는 없었으면 하는 순간이겠지요?"
"다 지나간 얘기는 뭐 하려고 해."
"왜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토록 내가 싫었으면 다른 여자한테라도 가버리지
왜 꿋꿋하게 같이 산거에요?"
"예연이가 아니라면 어떤 여자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
"그럼 차라리 예연씨한테 돌아가지 그랬어?"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는데 믿을 수도 없었고 용서할 수도 없었어.
그때는 그랬어."
"어떻게 유희를 맡을 생각을 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
"예연이 마지막 부탁이었으니까 .."
"당신정말 대단해, 집이며 생활비며 그 여자의 아이까지 .."
"돌봐줄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 이었던 거 당신도 알고 동의했던 거잖아.
애 아빠가 누군지는 끝까지 얘기를 안 하더군 .. 다 지난 얘기 이제 그만 합시다."
동욱이 일어나 방을 나가고 해미는 눈을 감았다. 지난 날을 떠올리자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찻집에 마주 보며 앉아있는 예연과 해미 .. 예연이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연다.
"동욱오빠 부탁해요. 당신이 돈 주고 산 사람의 아이라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동욱오빠에게
잘해주세요."
"무슨 소리에요? 내가 돈 주고 산 사람이라니?"
"그 남자도 내가 불쌍했었는지 얘기해 주더군요."
해미는 떨리는 가슴에 입술을 깨물었다. 예연은 다시 말을 잇는다.
"동욱오빠와 당신, 행복하길 바랄게요."
"이유가 뭐예요? 왜 사실대로 말하고 동욱씨를 잡지 않는 거죠?"
"나와 아이를 보면 괴로울 거예요. 당신도 사랑했으니 그렇게까지 하며 갖고 싶어 했겠죠.
이제는 당신 남자니까 잘해 주세요."
해미는 조용히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예연이 슬픈 표정으로 힘없이 돌아서 나가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해미는 괴로움에
눈물을 흘리며 이불을 덮어쓰고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