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4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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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리스트라에서 두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는데 사람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여깁니다. 가까스로 그들을 설득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몰려와 바오로에게 죽을 정도로 돌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바오로가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다 버리지요. 그러나 그는 일어나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르나와 함께 데르베로 떠납니다. 그곳에 그들은 수많은 이들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라고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피시디아, 팜필리아, 페르게, 아탈리아로 갔다가 배를 타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갑니다.
그들은 그곳에 신자들을 불러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주시며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합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오래 머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을 걱정하시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이어서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요한 14,28)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며 소명을 다하시고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십니다. ‘다시 돌아오신다’는 말씀에는 스승의 지극한 사랑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28)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도 예언했지만 먼저 많은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단죄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느님의 평화를 베풀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떠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1) 말씀하시지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도 일도 없어야 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곧 당신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이 겪게 되면 흩어지거나 실망으로 낙심하더라도 희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당신 평화를 남기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평화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주님의 평화는 비록 당신은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겠지만 제자들이 마음이 산란하고 두려움에 떨지 않게 하려는 당신의 배려며 사랑의 대상인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흔들리고 흐트러질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헛되지 않아 그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일 것을 희망하십니다.
그래서 스승께서는 제자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14,31)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제자들이 실망하고 두려움에 떨며 흩어지더라도 다시 당신 부활과 성령의 도움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희망이며 사랑입니다.
로마 외곽지역에 사도 바오로께서 순교하신 ‘뜨레 폰타네(tre fontane)’2)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부근에 수도원이 있고 사도께서 순교하기 전에 갇혔던 감옥도 있습니다. 주님을 알고 나서 유대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을 고비도 넘겨야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재판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변함없이 주님께 충실했고 열정을 다하여 복음을 선포합니다. 세상의 판단대로라면 사도 바오로는 유대교를 떠나 평화롭지 못한 고통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 1) 복음에서 말하는 ‘평화’는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평화’라고 하는 ‘샬롬(שלום)’과 연결되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로 표현한다. 세상에서는 일차적으로 전쟁을 멈춘 후의 의미로 쓰고 있는데 승리자가 누리는 심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떤 목표를 달성해서 오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성취욕이 채워졌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평화는 성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인 정의와 사랑이 채워졌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향해 무력을 써서 밀어붙이는‘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지만 사실 그 평화가 언제 변할지 불안하다. 다시 상황이 거꾸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평화와 주님의 평화를 혼동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악의 세력은 우리를 곧잘 속이려고 하고 적당히 타협해서 고통보다는 편안함을 미끼로 쓰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거짓과 꾸밈이 그럴듯하게 위장해서 있지만 그 평화는 조건적이고 영원한 것이 못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바탕으로 고통과 수고스러움이 있더라도 정의를 선택한다. 주님의 평화에는 적당히 타협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통의 십자가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참 평화를 주신다.
2) 트레 폰타네(Tre Fontane): ‘세 샘’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사도 바오로께서 참수 순교를 하셨는데 목이 떨어지면서 세 번 튀면서 굴렀는데 첫 번째, 두 번 째, 세 번째 그 장소에서 샘이 솟았다는 전승이 있다. 기원 후 680년 경에 지어진 뜨레 폰타네 성당 입구 오른쪽으로 ‘성모마리아 천국의 계단(Santa Maria Scala Coeli)’이 있다. 기원후 299년 디오클레시아누스(Diocletianus)황제 때에 10,203명의 순교했던 신자들이 이곳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박해가 끝나고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성당이 세워졌다. 성 베르나르도께서 이곳에서 기도할 때에 순교자들이 계단을 따라 하늘로 오르는 환시를 본 것에서 ‘천국의 계단’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 제대 옆, 지하통로로 내려가면 사도바오로가 갇혔던 감옥과 경당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