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감독의 역할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 팀 성적과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데 감독이 미치는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정확한 수치로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팀의 레벨이 달라진다는 축구계의 오랜 믿음에는 나름의 분명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이 두 가지 케이스는 하프타임 15분 동안에 벌어지는 ‘팀 토크 매직’만으로도 감독들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축구의 감동을 빚어내는 명장들의 팀 토크를 소개한다.
'인간 헤어 드라이어' 알렉스 퍼거슨 감독 |
'하프타임 15분', 축구를 완성하는 '팀 토크 매직'–
퍼거슨의 호통과 베니테즈의 침착한 논리
현지 시간으로 어제, 그러니까 2008년 10월 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는 명승부가 연출됐다. 시티 오브 맨체스터 경기장에서 벌어진 맨시티와 리버풀의 프리미어리그 7차전. ‘오일 머니’로 전력을 강화한 맨체스터 시티는 이번 시즌 6경기에서 단 2골만 실점한 리버풀을 상대로 전반에만 2골을 뽑아내며 상대를 압도했다. 빈공 속에 두 골 차 리드를 빼앗긴 리버풀 선수들은 고개를 숙인 채 라커룸으로 빠져 나갔고 맨시티의 기세는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후반전 시작과 함께 피치로 돌아온 리버풀은 전반전과 사뭇 다른 팀이었다. 왼쪽에 치우쳐 있던 단순한 공격 패턴은 중앙과 우측으로 변주되었고 마스케라노를 중심으로 한 미드필드의 압박 역시 전반전의 허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리버풀은
토레스의 연속골과 경기 종료 직전에 터진 카윗의 역전골을 묶어 2-3 역전승을 일궈냈다. 상대 수비수가 퇴장당한 것은 천우신조였지만 정작 리버풀이 달라진 것은 그 이전이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베니테즈 감독은 “후반전에 일단 한 골만 넣자고 얘기한 게 전부”라며 역전 드라마의 공로를 선수들에게 돌렸다. 이날 베니테즈 감독의 팀 토크는 부진했던 전반전 멤버를 전혀 교체하지 않은 채 선수들에게 믿음을 심어준 승리의 비법이었다. 그리고, 축구에서 하프타임 15분은 이러한 ‘팀 토크 매직’을 심심찮게 보여주고 있다.
#1. 2001년 9월 29일, 영국 런던 화이트 하트 레인 경기장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경기장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홈팀 토트넘 핫스퍼가 리그 최강팀으로 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전반에만 무려 세 골을 몰아치며 3-0 리드를 잡은 것이다. 하프타임을 위해 피치를 빠져 나가는 양팀 선수들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토트넘 선수들과 달리 맨유 선수들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주장’ 로이 킨이 빠졌다고는 해도 한 골도 넣지 못한 전반에 세 골을 내준 것은 너무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바르테즈 골키퍼와
게리 네빌, 로니 욘센,
로랑 블랑, 데니스 어윈으로 구성된 포백 선수들은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망연자실했다. 이 날의 승부는 이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성급한 예상은 기막힌 반전을 낳았다. 패잔병이나 다름없던 맨유 선수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후반전 킥오프를 준비하던 맨유 선수들은 세 골 차의 열세를 망각하기라도 한 듯 열의에 넘쳐 있었다. 그리고, 세 골 차의 리드에 안도하던 토트넘의 여유는 후반 시작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맨유는 후반 시작 48초만에 터진 앤디 콜의 골을 시작으로 30분 동안 무려 네 골을 퍼부으며 4-3 대역전에 성공한다. 블랑과 판 니스텔로이, 후안 베론이 연속골을 넣으며 드라마틱한 반전을 일궈낸 것이다. 이 기념비적인 대역전극은 후반 종료 직전에 터진 베컴의 쐐기골까지 더해 5-3으로 마감됐다.
WHAT’S HAPPENED? 1. 다혈질 퍼거슨의 헤어 드라이어 요법
이른바 ‘퍼거슨 매직’으로 부를만한 이 날의 드라마는 이른바 ‘헤어 드라이어 요법 (hair-dryer treatment)’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칭은 전반전이 끝난 뒤 하프타임에 진행되는 팀 토크(team talk)에서 퍼거슨 감독이 선수들 코 앞에서 큰 소리로 호통을 쳐 머리결이 휘날릴 정도라고 해 붙여진 표현이다. 지금은 맨체스터 시티 감독으로 있는 마크 휴즈가 맨유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 작명했고 이제는 퍼거슨 감독을 상징하는 단어로 꼽힌다. 이 유명한 ‘3-5 역전승’ 경기 때도 퍼거슨 감독의 ‘팀 토크 매직’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당시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맨유의 한 선수는 “(감독님이 어찌나 크게 호통을 치던지) 아직도 귀청이 아프다”고 전했고 상대팀 토트넘의 감독이던 글렌 호들은 “오늘 맨유는 전후반이 각각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같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헤어 드라이어 요법’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호통’을 친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퍼거슨 감독은 당시 경기 후 인터뷰에서 ‘팀 토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수들에게 한 얘기를 다 그대로 전해줄 수는 없지만, 내 요점은 이거였다. 스스로의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stop feeling sorry for themselves). 그리고 너희는 이 나라 최고의 선수들이니 그에 걸맞는 플레이를 펼치라고 독려했다.” 즉, 퍼거슨 팀 토크의 핵심은 선수들이 후회와 미련에 빠져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막고 자신감(때로는 오기)를 불러 일으켜 최대한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은 오랜 감독 경험에서 우러난 노하우를 동원해 매번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기념비적인 역전승을 거둔 뒤 가진 인터뷰에서 “혈압 관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기지만 앞으로 평생 기억하게 될 것 같다”며 씩 웃던 이 노회한 명감독의 여유있는 소회는 하프타임 15분의 중요성과 감독의 역할을 곱씹어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 참고자료 : 퍼거슨의 ‘헤어드라이어 요법’ 패러디 광고 [클릭]
- 맨 마지막에 등장해 ‘머리 말리는’ 선수가 압권
'마법사 라파' 베니테즈 감독 |
#2. 2005년 5월 25일,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경기장
2004/200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힘겹게 올라온 결승전이었지만 이리도 참담한 45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이탈리아의 강호 AC밀란을 상대로 우승 도전에 나섰던 리버풀 선수들은 전반에만 세 골을 연달아 내주며 0-3으로 전반전을 마친 터였다. 문제는 세 골을 실점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세 골 차가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한 경기력으로 전반전을 마친 그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경험 많은 공격수 해리 키웰마저 전반 23분만에 부상으로 실려나간 상태. 라커룸에 앉아 후반전을 기다리는 선수들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터키까지 원정 응원을 따라 나선 수 만 명의 리버풀 팬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도무지 후반전에 나설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수비수 제이미 캐러거는 이후 발간된 자서전을 통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라커룸으로 가는 동안 땅이 꺼질 듯 낙담했고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과 곳곳에 나부끼는 리버풀 팬들의 현수막을 쳐다볼 자신도 없어 고개를 푹 숙인채 땅만 보며 피치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후반전을 위해 피치 위에 선 리버풀 선수들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뀐 전형으로후반전에 임한 리버풀 선수들은 악몽 같던 전반전의 기억은 완전히 잊은 듯, 재정비한 전열로 상대를 압박했고 사실상 경기가 끝난 것으로 자신했던 AC 밀란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분간의 ‘매직’이 이어졌다. 후반 9분 제라드의 첫 번째 만회골로 반전의 전주곡을 울린 리버풀은 이후 3분 간격으로 스미체르, 사비 알론소의 연속골이 이어지며 3-3 동점을 이끌어냈다. 놀라운 상승세로 주도권을 잡은 리버풀은 연장전까지 이어지는 혈투 끝에 승부차기를 거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챔피언스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역전극이었다.
WHAT’S HAPPENED? 2. 침착한 베니테즈의 논리적 접근법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큰 무대, 그것도 상대가 해당 시즌 최강으로 분류되던 팀과의 경기에서 최악의 졸전 끝에 전반에만 세 골을 내줬다. 아마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그 팀의 감독을 맡고 있으면서 맨 정신으로 ‘분석’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반 내내 메모지에 뭔가를 적던 이 남자 ‘라파’ 베니테즈는 달랐다. 0-3으로 전반을 마감한 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서로 아무 얘기도 주고 받지 않은 채 라커룸으로 들어온 선수들. 캐러거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 라파 감독 역시 아마 우리들처럼 가족들과 팬들의 실망스러운 표정이 마음 속에 교차했을거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했고 당시만해도 지금보다 더 서툴렀던 영어로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전술 변화를 지시하는 과정에서 선수들의 감정을 배려하고 이해했다.
먼저, 그는 왼쪽 수비수 트라오레에게 샤워를 하라고 지시했다. 후반전에는 뛰지 말라는 교체 사인치고는 매우 공손한 언어였고 트라오레는 말 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하지만 곧 팀닥터가 오른쪽 수비수 스티브 피넌이 부상으로 뛰지 못할 거라는 소견을 냈다. 피넌은 계속 뛰고 싶어했지만 라파 감독은 냉정하고 공손한 어조로 피넌을 달랬다. ‘전반전에 키웰이 다치는 바람에 남은 교체 카드가 2장입니다. 그런데 후반전에 혹시라도 당신이 못 뛰게 되면 교체 카드를 다 써버리게 됩니다.’ 결국 피넌이 빠지고 트라오레가 남게 됐다. 만일 앞서 트라오레가 교체 지시를 받고 불쾌한 상태였다면? 후반전의 상승세는 없었을 지 모른다. 그리고 라파 감독은 우리 전술이 3-5-2로 바뀔 것이라면서 피넌 대신에 투입되는 하만이 중원을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밀란 공격의 핵심은 미드필더 피를로입니다. 루이스 가르시아와 스티븐 제라드가 피를로를 마크하면서 중원을 장악하면 꽁꽁 묶을 수 있어요.’ 불과 15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선수들은 희망을 얻고 후반전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챔피언스 리그 역사에 길이남을 역전 우승의 신화를 썼다.
# P.S.
하지만 세상 모든 감독들이 이들처럼 하프타임 15분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건 아니다. 피치위로 올라오는 시간을 최대한 늦춰 상대팀(은 물론이고 팬들까지) 맥빠지게 하는 감독들도 있는가하면 더 나아가 이 귀하디 귀한 시간을 손찌검과 팀내 ‘인민재판’의 시간으로 악용하는 치들도 있는 게 현실이다. 전반전보다 더 축 처진 어깨로 후반전에 임하는 선수들에게 과연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XX놈들은 때려야 말을 들어”라는 폭력적 편견에 사로잡혀 선수들을 무작정 몰아세우거나 그저 자신의 화풀이, 혹은 책임회피에 골몰한다면 ‘매직’은 영영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일 것이다. 하프타임 때 선수들을 '혼쭐'내고 때로는 '매질'을 하면서 후반전의 '악다구니'를 유도하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다다를 경지에는 한계가 있고 이미 그런 때는 지나버렸다. 그러니, 선수들의 정신력을 트집잡고 기량을 문제 삼기보다는 선수들을 아끼고 독려하면서 그들의 최대치를 뽑아낼 수 있는 팀을 기대하는 팬들의 바람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최고의 축구와 최상의 성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테지만, 그렇다고 마냥 두 손 놓고 변화를 기대하기엔 아쉬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최근 들어 전세계 각국 리그의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다보니 기대치가 높아져 국내 지도자들의 부담도 커지는 것은 분명 이해할만한 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선수들이 뛰는 경기에서도 끈질긴 뒷심과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접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위에 소개한 '팀토크 매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감동적인 축구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는 요즘이다.
첫댓글 이것이 하프타임 토크의 힘인가. fm이 점점 현실화 되게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