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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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이와자키 메이지 유신 재정지원
1884년 나가사키 조선소 인수 미쓰비시로 개칭
1934년 항공기, 조선,내연기관 3사 합병
1938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기:제로센(零戰) 전투기와 항공모함 ·잠수함 생산
1945년 패전후 미쓰비시 중공업 3사로 분리
1960년대 중공업3사 재합병
1970년 미쓰비시차 독립법인 화
일본의 주요 사회간접자본 시설에는 거의 예외없이 미쓰비시중공업의 기술이 들어가 있다. 일본의 근대화 역사와 함께 해온 이 회사는 기계 ·발전설비 ·군수품 ·선박 등 주요 제품을 일본 안에서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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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0월 신칸센(新幹線)역을 개장한 도쿄(東京) 시나가와(品川)역.
오른편에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새로 생긴 시나가와 타운이다.
쭉 늘어선 건물에 눈에 익은 빨간색 삼각형 모양의 로고가 보인다. 바로 다이아몬드 3개를 삼각형 형태로 배열한 미쓰비시(三菱)그룹의 로고다.
시나가와 타운의 빌딩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을 비롯해 상사 ·자동차 ·은행 등 예전 주요 미쓰비시 계열사들의 본사가 각각 하나씩 들어와 있다. 이곳은 미쓰비시 부동산이 1990년대 초 땅을 매입해 개발, 2003년 5월 완공해 모두 입주했다.
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에 도착했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연결된 건물이 인상적이다. 로비에 들어서자 왼편에
나고야제작소에서 조립한 우주선 로켓 엔진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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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데스크에서 전자 카드를 발급받은 뒤 14층 홍보실로 향했다. 첨단 빌딩답게 보안이 엄격해 출입증에 등급을 표시해 각층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2002년 매출 약 2조6,000억엔(28조6,000억원)을 기록한 일본 최대의 중공업 회사다.
일본 내 10개의 공장에서 3만5,000여 명이 일한다.
해외에는 한국 부산(대표 사무소)을 비롯해 미국 ·중국 ·유럽 등지에 10개의 해외 지사와 사무소를 두고 있다. 수출 비중은 전체 매출의 40% 정도다.
회사 관계자는 “워낙 고난도 기술을 요구하는 분야가 많아 주요 제품을 일본에서 제작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중국 진출에 힘을 쏟아 산업용 에어컨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매출의 경우 90년대의 3조엔대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조선 등 덩치 큰 매출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전체 매출액 중
▶산업기기 등 중기계가 26%
▶항공우주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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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기 ·원동기 25%
▶철골 건축 16% ▶조선이 10% 등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항공우주와 원자력 발전기 분야가 매년 10~20% 급성장하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매출 비중이 50%에 달해 미쓰비시중공업을 대표했던 조선업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물량이 큰 유조선 ·대형 화물선 등은 이미 한국 ·중국이 차지하고 있어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에 집중하고 있다. 이 회사의 기술은 말그대로 일본을 움직인다. 일본의 첫 우주선, 첫 원자력 발전기 및 원전 건설, 일본에서 가장 긴 철골 교량(약 10㎞ ·일본의 본토인 혼슈(本州)와 시고쿠(四國) 섬을 연결) , 신칸센 건설, 보잉기의 주요 부품, 각종 플랜트 건설 등이 미쓰비시의 작품들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의 한 기자는 “일본의 근대사와 한길을 걸어온 가장 일본적인 기업”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일본의 중후장대한 사회간접자본에는 미쓰비시의 기술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이다. 미쓰비시는 군수 사업도 열심이다. 자위대에 F15 전투기 ·탱크 ·헬리콥터를 공급하고 있다.
‘기술 왕국’ 미쓰비시중공업은 올 초 제조현장의 우수한 기술자를 호칭하는 ‘사범’제도를 신설했다. 사범 17명도 함께 선정했다. 회사에선 ‘기술의 하느님’을 뽑았다고 설명한다. 사범은 우선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합력 ·지식이 뛰어나야 한다. 또 기술 전승과 후배 육성에 열심이고 업무상 공적이 걸출해야 한다. 네 가지 모두를 만족시켜야 선정된다.
사범은 한 예로 1,000분의 1㎜ 단위의 틈을 수작업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50대 기술자다. 이들은 작업복에 사범임을 나타내는 마크를 붙이고 다닌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쓰비시는 이처럼 기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지난 6월 취임한 쓰쿠다 가즈오(佃 和夫?0) 사장도 도쿄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38년간 미쓰비시중공업에 몸담아온 정통 기술자다.
쭒근대화와 함께 한 기업 역사 미쓰비시중공업의 역사는 일본의 근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1868년에 몰아낸 중추 세력은 일본의 큰 섬인
시고쿠의 사무라이였던 이와자키(岩崎)가(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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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자키가는 일왕을 도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성공했다. 그 대가로 근대화 사업 관련 이권을 움켜쥘 수 있었다.
큰 이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함을 만들던 나가사키(長崎)조선소였다.
이와자키가는 1884년 이 조선소를 인수해 미쓰비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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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의 로고는 바로 이와자키 가문의 문양(紋樣)에서 유래했다. 현재 나가사키조선소는 4개 공장에서 호화 여객선 ·LNG선 ·LPG선 등의 각종 선박과 화력 ·지력 ·풍력 발전 플랜트를 만들고 있다.
이후 미쓰비시는 메이지 정부와 손잡고 조선 ·철강 ·기계 ·보험에 차례로 손을 댔다.
1934년에는 항공기 ·조선 ·내연기 회사를 합병,
미쓰비시중공업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본격화하면서 군수산업의 모체가 된다.
2차대전 때 명성을 날린 제로센(零戰) 전투기와
항공모함 ·잠수함 모두 미쓰비시중공업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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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쓰비시는 일본 최대의 재벌에 등극한다. 이와자키가는 일본 패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다. 70여 년간 4대에 걸쳐 4명의 사장을 배출했지만 모든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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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경영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이후 미 군정은 미쓰비시중공업을 3개의 회사로 분할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60년대 일본의 고도 성장기 때 쪼개진 3개의 회사를 다시 합병했다.
70년에는 미쓰비시자동차가 별도 회사로 분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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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가 호황으로 치닫던 80년대에는 미쓰비시중공업뿐 아니라 상사 ·자동차 ·전기 · 은행 ·증권 등이 상호 지분을 소유하면서 일본 최대의 재벌로 다시 올라섰다. 90년대 이후 미쓰비시그룹은 계열사별로 독립 경영을 하고 있다. 현재 주식 지분은 계열사 상호간에 3~10% 정도를 분산해 소유하고 있다.
찰떡 궁합 노사 한국의 경우 중공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성 노조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정반대다. 미쓰비시중공업은 2003년 3월 한 달간의 조정기간을 거쳐 임금협상을 끝냈다. 회사 관계자는 “2003년 임금협상은 노조와 회사 측이 서로 인상요인을 다르게 보는 바람에 유난히 힘들었지만 결국 기본급은 동결하고 보너스만 1개월치 늘리는 내용으로 타결했다”고 설명했다.
힘들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엄살이 심하다.
이 회사는 5월과 11월께 사장 이하 주요 간부진과 노조가 참여한 가운데 ‘중앙경영협의회’를 개최하고 회사의 경영실적과 목표 등을 노사 양측이 공유한다. 그래서 임금협상도 1개월 안에 대부분 사업장에서 타결된다.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관계자는 “미쓰비시중공업의 경우 임금협상에 앞서 회사 측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경영실적을 노조 측에 성의있게 설명하고 노조 역시 상향식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임금 수준을 요구해 파업이란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흔적 지난 2000년 5월 한국인 징용 피해자 6명은 미쓰비시중공업 부산 사무소를 상대로 미불 임금 지급과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들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당해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제작소 등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피해자들이다. 징용 당했던 한국인들은 70년대부터 일본에서 다수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일본 재판소가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원고측 관계자는 “독일의 경우 폴크스바겐 ·벤츠 등의 기업이 2차대전 때 강제 노동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한 전례가 있다”며 “미쓰비시중공업도 피해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과정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65년 ‘한 ·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가의 청구권 외에 개인의 청구권을 포기했는가라는 점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국가가 배상해야 할 문제를 일개 기업이 배상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판결은 오는 3월께 나올 전망이다.
미쓰비시 ‘형제애’ 車 살릴까
미쓰비시그룹의 경영진이 바빠졌다. 그룹의 골칫거리인 자동차를 살리기 위해서다.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중공업, 도쿄미쓰비시은행 등 3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요즘 거의 매일 만나 자동차를 살리는 데 들어갈 거액을 어떻게 조달할지 협의하고 있다.
승용차생산 88년의 역사를 가진 미쓰비시자동차가 존망 위기에 몰린 직접적인 이유는 지분 37%를 보유한 최대주주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자금지원 계획을 철회했기 때문. 23일 이 소식을 들은 미쓰비시측은 크게 낙담하면서도 “우리 힘으로 해내겠다”며 특별대책팀을 구성했다. 부실에 빠진 계열사를 돕기 위해 형편이 좋은 그룹 내 다른 회사들이 나서는 모습은 몇 년 전까지 한국에서도 낯익었던 풍경이다
하지만 이 회사의 앞날을 밝게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그룹의 의도가 ‘왕년의 화려한 영광’을 재현하는 쪽과는 거리가 멀다.
자동차의 부실이 심화되자 미쓰비시는 지난해 말 다임러크라이슬러에 2000억엔(약 2조원) 증자를 제안했다. 악성부채만을 털어낸 뒤 일본 국내와 아시아시장을 겨냥해 몇몇 소형차 모델에 특화하려는 의도였다
양측의 협상은 다임러가 신차 개발에 필요한 자금까지 염두에 두고 증자 규모를 7500억엔으로 늘리자고 역제안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미쓰비시가 난색을 보인데다 다임러 내부에서도 주주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공동증자를 통한 회생’은 없던 일이 됐다.
일본업계 4위인 미쓰비시차는 80년대 초 현대와 기술제휴협정을 맺고 그랜저 갤로퍼 싼타모 등의 기술을 제공해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도요타 닛산 혼다가 사상 최고이익을 경신한 것과는 달리 실적 악화와 신차 개발 부진의 악순환에 빠져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3회계연도(2003년 4월∼2004년 3월)의 영업적자는 1000억엔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쓰비시는 일본의 기업집단 중에서도 단결력이 가장 강한 그룹으로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자동차 문제가 불거진 뒤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하락하자 자금지원에 대한 신중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그룹의 ‘형제애’가 자본시장의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미쓰비시에 매우 벅찬 게임이 시작된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미쓰비시 추락 풀 스토리 | 비즈니스모델혁신 2004/07/21 09:29
기업의 폐쇄적인 경영 스타일이 일본 4대 자동차회사인 미쓰비시 존폐 여부마저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미쓰비시는 이미 4년 전 일본 내 소비자들에게 차량 결함을 속였던 것을 숨기 려 했던 첫 번째 사건으로 명예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었다. 당 시의 사건은 이제 2003년 스핀오프 돼 다임러크라이슬러 산하로 들어간 미쓰비 시푸조(Fuso) 트럭 및 버스 상사에까지 번지고 있다.
이 새로운 리콜 관련 사건은 미쓰비시가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을 넘어 회사 자체의 존폐까지 미궁에 빠트리고 말았다. 미쓰비시 추 락 사건의 전말을 정리해 본다.
미쓰비시의 부도덕한 행위는 단지 제품 리콜 은폐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미쓰 비시는 1996년 미국 내 자회사에서 미국인 여직원 약 300명으로부터 직장 내에 서 상습적 성희롱을 당해왔다며 집단으로 고소를 당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쓰비시는 3400만달러(약 380억원)라는 성희롱 소송 사상 최대의 화해금을 물 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물론 그로 인해 미쓰비시의 이미지는 엄청난 타격을 입 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경영진이 총회꾼에 불법이익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또 다 시 물의를 일으켰다. 내부적으로 종업원을 무시하는 성희롱 사건에 주주를 경 시하는 총회꾼 사건으로 안이 곪아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2000년에는 리콜 은폐사건이 불거지면서 미쓰비시의 추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동차회사가 소비자를 속인 결과가 어떻게 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미쓰비시의 리콜 정보 은폐에 관한 사건 이다. 지난 2000년 6월 일본 운수성에 익명의 제보자가 전화를 해 미쓰비시의 리콜 정보 은폐에 관해 제보한 게 사건의 발단. 제보를 받은 운수성은 미쓰비 시자동차회사에 대한 현장검사를 실시해 직원 라커룸에 있던 엄청난 비밀장부 를 찾아냈다.
일본 법률에 따르면 제품결함으로 인한 리콜정보는 운수성에 보고해 공개하도 록 돼있다. 그런데 미쓰비시는 이런 절차를 밟지 않고 자체적으로 비밀 리콜을 30년 동안이나 계속 해왔다. 전체 리콜 정보 중 운수성에 보고한 것은 20%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비밀 장부로 분류해 취급한 사건이 드러난 것. 이처럼 은폐 돼온 제품은 일본 내수는 물론이고 수출시장까지 포함해 100만대가 넘는 것으 로 조사됐다.
일본 4위의 업체이자 현대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통해 차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한 회사로서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당시 미쓰비시 관계자들은 기업 이미지 실추를 우려해 은폐했다고 밝혔다. 또 한 문제가 있는 차량 결함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회수시정해온 만큼 소비자 안 전엔 지장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판단은 그리 오래지 않아 실수 였음이 드러났다. 차량 결함으로 인한 인명사고가 밝혀지면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것이다.
■신차 판매도 급속히 줄어■
2000년 여름 한꺼번에 80만대를 리콜해야 했고 2001년 초에 또 다시 130만대를 추가로 리콜해 경영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2000회계연도에만 당초 예상 의 두 배 가까이 되는 22억달러(2700억엔)의 적자를 기록하며 나락의 길로 접 어들었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미쓰비시는 생산량 20% 감축 및 원자재 구매비용 15% 저감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2003년까지 직원 14%인 9500명 감 원을 추진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밖으로는 독일의 다임러크라이슬러에 주식의 37%를 넘기면서 자금 조달을 위한 노력을 했다. 그로 인해 2000년 2700억엔의 적자를 기록했던 미쓰비시는 다임 러와의 제휴 이듬해인 2001년 120억엔, 2002년 373억엔 흑자로 살아날 수도 있 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의 후광 덕분이었다. 그러나 2003년 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북미시장에서 1000억엔대의 손실을 기록한 데다 신차판 매도 급락하면서 위기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올 들어 다시 미쓰비시는 미쓰비시 트럭의 리콜 은폐사건 에 휘말리게 됐다. 1996년에 대형 트럭의 클러치 부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나 이에 대한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고 은폐한 사실이 다시 불거졌 다. 당시 미쓰비시는 대책회의를 통해 클러치 부분의 결함과 관련된 37건의 사 고가 보고 됐으나 리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그대로 두면 2004년이나 2005년 경 파손사고가 70∼80건에 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공개하지 않은 채 문제가 발견되면 수리해 주기로 하고 덮어버렸던 것.
그런데 2002년 문제 부위의 파손으로 인해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후방 차량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잇달아 사고가 발생했다. 요코하마에서 주행 중이던 트럭 의 바퀴가 빠져 사고지점을 지나던 29세의 여성이 즉사하고 두 아들이 크게 다 친 사고가 대표적인 것이다. 소비자들은 소송을 하기에 이르렀고 차체 결함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다시 한번 리콜 은폐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 결과는 클러치 결함으로 인해 16만대의 리콜로만 끝나지 않았다. 일본 가나가 와현 경찰에 의해 우사미 다카시(63) 전 미쓰비시 푸조 회장과 하나와 아키오( 63) 전 상무 등 임직원 7명의 간부가 체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쓰비시자동차는 트럭뿐 아니라 승용차의 판매까지 급격히 줄었다. 특히 한번도 아니고 잇달아 사고를 은폐해 기업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 면서 미쓰비시에 대한 소비자들의 태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 렸다.
그 결과 지난 5월 미쓰비시의 자동차 판매대수도 작년 같은 기간 대비 56.3%나 감소했다.
또한 3월 31일로 끝난 2003회계연도 실적 발표에서 2154억엔(19억달러)의 순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2월 내놓은 예상치의 세 배에 달하 는 규모다. 여기에 2004회계연도 역시 2300억엔 손실을 기록, 적자폭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업친데 덥친 격으로 최대 주주인 독일의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더 이상 미쓰비시에 대해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회사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 이게 됐다.
물론 미쓰비시 측은 또 다시 구조조정 계획을 내놓았다. 4월 21일 그룹으로부 터 4500억엔의 자금 조달과 전체 인력의 22% 삭감을 골자로 한 경영회생 계획 을 발표했다.
■다임러 지원 동기■
그 안에 따르면 2007년까지 1540억엔 규모의 비용을 줄이고 부채규모를 40% 감 축한다는 것과 향후 3년 동안 44개 신 모델을 출시해 영업력을 강화한다는 안 도 포함됐다.
그러나 현재의 미쓰비시는 판매 하락과 막대한 적자에 시달린다. 2003년 세계 시장에서 판매 대수가 153만대로 2002년(174만대)보다 12% 이상 줄어든 데 이 어 올해 들어 더 악화되는 등 전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미쓰비시가 이렇게까지 추락하게 된 배경에 대해 관료적인 기업문화를 꼽고 있다.
미쓰비시자동차는 방위산업체인 미쓰비시중공업에서 30년 전 분리된 회사다. 그런데 새로운 개념으로 경영을 하지 않고 일부 특정 고객만을 상대로 하는 군 수업체의 폐쇄적인 관행이 미쓰비시자동차에 그대로 적용돼 온 것이다. 이런 관료적이면서도 폐쇄적인 기업문화로 인해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불상사가 끊임없이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