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각박해진다고 얘기들 합니다. 몇 년째, 경제가 어렵다 보니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더욱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말이 되면 따스한 소식들도 많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연말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늘, 꾸준히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지만, 가끔 전혀 의외의, 혹은 익명의 기부자가 세상을 더욱 훈훈하게 합니다. 매년 각 지역에서 꾸준하게 기부하시는 얼굴 없는 기부 천사 외에도, 6년째 자선냄비에 기부를 이어가고 있는 시각장애인은 "더 어려운 이웃 위해 계속 나누고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루 세 명의 승객을 무료 승차 시켜주시는 용인의 행복택시 기사 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음악 등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시는 이들도 주변에 참 많습니다. 봉사를 통해서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추운 겨울에도 사람의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갈 가치를, 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올해 퇴직한 친구 두 명이 자원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욱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회사 대표로, 대학교수로 퇴직을 한 이 친구들은 봉사단체 가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 홀로 봉사를 하고 있답니다. 봉사를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새로 취득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은 ‘함께 하는 행복’을 줍니다. 저는 ‘더불어’란 말에 주목하고, 늘 가까이 두려 합니다. ‘더불다’란 단어를 네이버에서는 ‘1.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하다. 2. 무엇과 같이하다. 3. 어떤 일이 동시에 일어나다.’로 풀어 놓았습니다. 다음에서는 ’(사람이 다른 어떤 대상과, 또는 둘 이상의 사람이) 한데 섞여 어우러지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더불다의 형용사형인 ’더불어‘는 제게 참으로 정겨운 말입니다. 비슷한 어감을 주는 ’함께(한데 섞여 어우러져)‘, ’같이(여럿이 서로 더불어) ‘ 따위의 단어도 참 와닿는 말입니다.
‘더불어’를 몸소 실천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슴입니다. 시경에 녹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슴 록(鹿)에 울 명(鳴)’으로,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먹이를 함께 나누기 위해 다른 사슴들을 부르는 울음소리랍니다. 대개 짐승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혼자 먹고 남는 것마저 숨기기 급급한데 사슴은 울음을 통하여 친구들을 불러 함께 나눈다네요. 녹명은 저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서사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의 지표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프리카 말 중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의 우분투란 단어가 함께 떠오릅니다. ‘더불어’와 참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살아감을 표현하는데 ‘우분투’, ‘녹명’만큼 적확한 의미 전달력을 가진 단어가 따로 있을까 싶습니다. 내년에는 더욱 많은 이들이 우분투와 녹명의 마음가짐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함께 하는 행복’을 함께 누렸으면 합니다. ‘나눔과 성장’의 폭과 깊이, 방법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지는 즈음입니다.
나눔과 성장, 더불어 사는 삶을 몸소 실천하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자연, 그중에서도 보호수 탐방은 늘 설렙니다.
https://blog.naver.com/bornfreelee/223306459659
우분투(모셔온 글)========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나무 옆에 싱싱하고 달콤한 아프리카에선 보기 드문 딸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노라 한 것이지요.
인류학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말이 통역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되자마자 그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 입 안 가득 과일을 베어 물고 키득거리며 재미나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누구든 일등으로 간 사람에게 모든 과일을 주려했는데 왜 손을 잡고 같이 달렸느냐' 라고 묻자 아이들의 입에선 "UBUNTU"라는 단어가 합창하듯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가 있는 거죠?
-----<행복한 하루>에서 보내온 메일 중에서
'UBUNTU'는 아프리카 코사(Xhosa)어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나눔과 성장(모셔온 글)========
언 땅이 풀리는 해토의 절기가 오면 흙마당가에 쪼그려 앉아
얼음발 속에 뜨겁게 자라는 여린 새싹들을 지켜보느라 눈빛이 다 시립니다.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새싹들은 떡잎이 둘로 나뉘면서 자랍니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
사람 몸도 세포가 나뉘어야 성장합니다.
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만큼 멈춤 없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눠야 커지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나누어야 서로 이어지고 함께 모여들어 커질 수 있습니다.
크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어낸다는 것이고
큰 사람이란 나누어 쓰는 능력이 큰 사람이고
크게 나눔으로 하나를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잘 나누어 상대를 키움으로 자기도 커나가는,
지공무사의 사람이 아닌 지공지사의 사람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성장이 정체됩니다.
시들어가고 뒤처지고 부패하고 적대합니다.
나누지 않을 때 싸움이 생기고 분열이 생깁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누려면 나눌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늘 새롭게 나누어줄 삶의 감동과 이야깃거리가 있어야합니다.
새로 학습한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보살펴줄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 있어야 나누려는 마음도 자라납니다.
함께 나눌 가치 있는 일과 희망이 능력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눔과 동시에 자기를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크게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나눔과 함께
자기 자신이 세상과 이어지고 몸을 통하여
내 몸과 내 큰 몸이 하나로 창조적 맴돌이를 이루어야 합니다.
천 골짝 만 봉우리 물을 받아들여 큰 물둥지를 이루어야
너른 들녘을 푸르게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선 자리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땀 흘려 일하고 공부해야
자기 안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맑은 눈뜨고 자기를 불살라가는 투혼의 불덩이어야 나눈 만큼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나눔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가난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누려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누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성공한 다음에 나누겠다는 굳센 다짐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를 잘 나누어 쓰는 능력입니다.
두텁게 언 흙을 헤치고 나온 저 작고 여린 새싹은
여유가 있어서 떡잎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가 바로 살기 위해서, 자기가 바로 크기 위해서, 그 작고 여린 자기를 처음부터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는 능력도 생명체와 같아서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돈을 많이 벌고 크게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삶의 외피와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삶의 속살과 목적,
아니 삶 자체를 삶의 껍데기와 바꿔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삶의 핵심 능력이고
인간성의 본질인 사랑과 영성을 성장시키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인간으로 바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인간으로 바로 크기 위해서는,
내 삶의 핵심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함 그대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능력이 커나가는 만큼 나눌 거리도 커지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고 참된 성취입니다.
그것만이 멀리 가고 오래 남는 창조적 맴돌이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지금 그대로의 자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기 자신이 성장하고 상대를 성장시키고
모두가 진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나누어 자신과 상대를 함께 키워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도 정의도 진보도 아닙니다.
함께 하나 되어서도 성장하지 못하고, 나누어도 성장하지 못하는 건 진보가 아닙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나눔, 성장하지 못하는 성숙은 진보가 아닙니다.
창조적 맴돌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긴장된 떨림,
그 살아 움직이며 이동하는 균형점이
참된 사람의 자리이고 진정한 진보의 자리입니다
잘 나누어 보살펴야 성장함으로 성숙할 수 있고
성숙함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눔의 손은 보살핌의 손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다 나누고 마침내 고목처럼 부드럽게 쓰러지는 생이 있습니다.
쓰러져 돌아감으로 다시 새싹처럼 부활하는 생,
그래서 죽음마저 최후의 나눔이고 사랑이고 희망인 생,
그런 일생이기를 기도하는 신생의 시간입니다
언 흙을 뚫고 치열한 숨결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나눔으로 빛나는 작고 여린 얼굴들을 묵묵히 들여다보며,
내 안에서, 세상에서, 나눔으로 자라나는 푸른 희망 하나 하나를
뜨겁게 지켜봅니다.
고개 들어 해동청 하늘 바라보는 눈빛 시려옵니다
-----박노해의「사람만이 희망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