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피면/풍란 박 영실
충남 예산 삽교읍에 위치한 내 고향 삽 교.내가 태어난 고향이면서 뒤로는 꽃 산이라고 하는 작은 산이 있었다.지금은 이사와 서울에 살고 있지만 학교시절 소풍으로 줄기차게 가본 곳이기도 하다.그래서 그런지 중학교 교가도 ‘꽃 산에 정기 뻗은 너른 들판에 배움에 보금자리'의 가사가 들어간다. 오늘은 봄꽃인 진달래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진다.시 중에서도 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좋아한다.진달래꽃은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하는데 한국.일본.중국.몽골.우수리 등지에 분포하며 산지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란다. 높이는 2∼3m이고 줄기 윗부분에서 많은 가지가 갈라지며, 작은가지는 연한 갈색이고 비늘조각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 모양의 바 소꼴 또는 거꾸로 세운 바 소꼴이며 길이가 4∼7cm이고 양끝이 좁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 표면에는 비늘 조각이 약간 있고, 뒷면에는 비늘 조각이 빽빽이 있으며 털이 없고, 잎자루는 길이가 6∼10mm이다.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가지 끝 부분의 곁눈에서 1개씩 나오지만 2∼5개가 모여 달리기도 한다.
화관은 벌어진 깔때기 모양이고 지름이 4∼5cm이며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 또는 연한 붉은 색이고 겉에 털이 있으며 끝이 5개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이고 수술대 밑 부분에 흰색 털이 있으며, 암술은 1개이고 수술보다 훨씬 길다. 열매는 삭과이고 길이 2cm의 원통 모양이며 끝 부분에 암술대가 남아 있다.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 진달래라고 하고, 작은 가지와 잎에 털이 있는 것을 털 진달래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닷가와 높은 산에서 흔히 자란다. 털 진달래 중에서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털진달래라고 하며 해안 근처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잎이 둥글거나 넓은 타원 모양인 것을 왕진달래라고 한다. 바닷가 근처에서 자라는 것 중에서 잎에 윤기가 있고 양면에 사마귀 같은 돌기가 있는 것을 반들 진달래라고 하고, 열매가 보다 가늘고 긴 것을 한라진달래라고 한다. 키가 작고 꽃도 작으며 5개의 수술이 있는 것을 제주 진달래라고 하며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 자란다.관상용으로 심기도 하고, 꽃은 이른 봄에 꽃전을 만들어 먹거나 진달래술(두견주)을 담그기도 한다. 한방에서는 꽃을 영산홍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해수·기관지염·감기로 인한 두통에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이 있다. 또한 꽃 타령을 들어 보면 우리 자생 철쭉보다 왜철쭉이 노랫말 속에 더 많이 들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당시로 보면 원예식물인 왜철쭉이 일반에게도 널리 보급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달래를 지칭하는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연 달래, 꽃 달래, 얀(온)달래, 반 달래, 진달래 수 달래 등 모두 달래자가 붙어 있다. 같은 진달래이지만 꽃의 느낌에 따라 다르게 불렀던 것 같다.
달래 꽃보다 꽃빛깔이 진하다고 하여 진달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남도지방 은어에 앳된 처녀를 일컬어 연 달래라 하고 성숙한 처녀는 진 달래, 그리고 과년한 노처녀 는 난 달래라 한다. 나이에 따라 변하는 젖꼭지 빛깔에 비유한 짓궂은 표현이라고 하나 믿을 것이 못된다. 강원지방에서는 물가에서 자라는 산철쭉을 수 달래라 한다. 물에서 자라는 진달래를 뜻하지만 진달래는 독성이 적어 먹을 수 있어도 산철쭉은 먹지 못한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디든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폭넓은 서식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자생식물이다. 그래서 한 때는 우리 나라꽃으로 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때도 있었고, 북한의 경우 함박꽃나무로 바꾸기 전까지는 상징화로 아낌을 받았던 나무이다. 진달래는 확실히 아름다운 나무다. 양지바른 곳이면 잘 자라기 때문에 진달래가 많은 땅은 그만큼 땅이 척박한 곳이다. 강산성 토양에서도 견디는 수종이 바로 진달래 과 식물이다. 다른 수종이 척박지를 피해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리지만 진달래는 오히려 붉은 색채가 더욱 짙어져 동국의 봄을 장식 한다.진달래는 줄기를 꺾어 주면 도장지가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꽃이 핀다. 진달래는 가지 끝에 꽃눈이 밀집해 달린다. 늙은 나무는 가지가 섬세하고 끝에 한 두 송이의 꽃눈이 달리지만 도장지 끝에서는 십여 송이의 꽃눈이 달린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가지를 꺾인 등산로 주변의 진달래가 휠 씬 탐스러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정원에 심어진 진달래도 가지를 잘라줄 필요가 있다. 도장지가 우뚝하면 봄철에 보다 탐스러운 짙 은색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관상식물이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재배해 오는 동안 내병성, 내한성, 내습성 등 필요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도록 개량한 것들이다. 또 향기가 더욱 짙게 했거나 꽃이 탐스럽고 더 많이 달리도록 개량한 것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원예식물이 되었다. 진달래는 개량하지 않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관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금 당장 정원에 심어도 그 어떤 나무보다 화려한 꽃을 피워 매년 봄소식을 알린다. 진달래는 먹는 꽃이다. 그래서 진짜 꽃이라는 뜻으로 참꽃이라 부른다. 참꽃에 비해 못 먹는 철쭉은 개 꽃이라 부른다. 독성이 적은 진달래는 꽃잎을 먹을 수 있지만 독성이 강한 철쭉은 개 꽃이라는 이름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홍석 모의 《동국세시기》에는 3월 삼짇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는다고 했다.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져 먹는 먹 는 것을 화전이라 한다." 옛날에는 음력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나 가족끼리 또는 이웃끼리 가까운 산을 찾았다. 계곡에 솥뚜껑을 걸고 나뭇가지를 지펴 불을 붙인다. 따온 진달래꽃을 찹쌀반죽에 섞어 전을 붙이거나 찹쌀반죽 위에 꽃잎을 얹어 지져낸다. 남자들이 솥이며 그릇들을 지게에 져다 취사 준비를 마쳐주고 산을 내려가면 여인들의 오붓한 시간이 된다. 서로 시를 지어 노래하면 댓 구에 따라 다른 사람이 시를 짓는다. 이런 놀이를 화전놀이라 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도 삼월 삼짇날에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떡을
만든다. 이것을 참기름에 지져내면 화전이 된다."고 했다. 진달래로 국수까지 빚어 먹었던 우리 선조들은 음식의 맛 뿐 만 아니라 멋까지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국세시기에 진달래로 국수를 뽑아먹는 과정이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오미자를 우려낸 붉은 국물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힘 것을 잘게 쓸어 넣는다. 거기다 꿀을 타고 잣과 진달래 꽃잎을 뛰 운 것을 화면이라 한다. 혹은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와 반죽하여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붉은색으로 물들이기도 하는데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이라 하며 시절 음식으로서 제사에 쓰인다. 삼월삼짇날의 화전놀이는 집안에만 갇혀 지내는 부녀자들에게 이날 하루 소풍을 보내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배려로 생겼다 한다. 억압된 조선시대의 폐쇄 사회에서도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 화전, 사월 초파일의 느티떡, 오월 단오에는 수리취떡, 유월에는 장미꽃전, 구월구일 중양절에는 구절초나 국화로 국화전을 부쳐 먹었다. 또 겨울에는 호박떡, 무시루떡, 곶감떡 같은 것을 쪄 시절음식으로 즐겼다. 그 외 쑥이나, 미나리, 달래 같은 나물로 전을 부쳐 먹기도 했는데 진달래 뿐 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나는 갖가지 꽃과 나물로 시절음식을 해 먹었음을 알 수 있다.나주 선비 임백호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송도 명기 황진이의 무덤에 찾아가 제사를 지낸 분이다. 그의 화전놀이를 읊은 시에 "개울가 큰 돌 위에 솥뚜껑 걸어 놓고 흰 가루 참기름에 꽃 전 부쳐 집에 드니 가득한 봄볕 향기가 뱃속까지 스민다. 얼마나 운치 있는 노래인가."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부녀자들에게 널리 불리 워 졌던 〈영남대가 내방가사〉 화전가편에는 "꽃술일랑 고이 두고 꽃잎만 따서 지져 먹고, 배부르면 진달래 꽃술로 꽃 싸움 하자"고 노래하였다. 꽃술을 걸어 서로 잡아당겨 꽃 밥이 떨어지는 쪽이 지게 된다. 편을 갈라서 하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쪽이 이기게 된다. 이긴 쪽에서는 춤을 추고 진 쪽은 벌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진달래꽃이 필 무렵이면 절을 찾아가 탑돌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 성벽을 걷거나 다리를 밟으며 탑 주위를 도는 것은 무병장수를 위한 기원의 뜻이 담겨 있다. 탐스럽게 핀 진달래 가지를 꺾어 꽃방망이처럼 만들어서 앞서 가는 사람들을 때리면서 놀았는데 이 꽃다발을 여의화장이라 했다. 진달래꽃으로 선비의 머리를 치면 과거에 급제하고 기생의 등을 치면 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믿었다. 경상도에서는 진달래나무 숲에 꽃 귀신이 산다고 하여 봄철 진달래가 필 때는 어린이들을 산에 가지 못하게 말렸다. 또 얼굴이 뽀얀 문둥이가 진달래꽃을 먹고 사는데 어린이들이 다가와 꽃을 따면 잡아서 간을 내어 먹는다고도 했다. 아마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위험한 산에 함부로 가지 못하도록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여겨진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진달래꽃이 피면 이름 없는 무덤에도 꽃다발이 놓인다. 시집 못가고 죽은 처녀 무덤에는 총각들이, 총각 무덤에는 처녀들이 진달래꽃을 꽂아준다. 이렇게 하여 처녀, 총각 귀신을 달래지 않으면 원혼이 나타나 혼사를 망쳐 놓는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진달래의 한자 이름은 두견화 또는 척 촉이다. 여기에는 형을 그리 워 하는 동생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척 촉. 옛날 중국의 촉나라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자 계모가 들어 왔다.
계모의 학대로 형은 집을 쫓겨나고 말았다.
나중에는 동생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오고 말았다. 어느 따뜻한 봄날 동생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 새가 바로 두견새이다.
형을 찾아 헤매던 두견새는 매년 진달래꽃이 필 때면 고향을 찾아와
언제나 형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슬피 울었다. 촉나라로 돌 아 갈 꺼나! 촉나라로 돌아갈거나! 귀촉도! 귀촉도! 목이 찢어져라 슬피 울다가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래서 진달래와 철쭉에는 지금도 붉은 피가 점점이 묻어 있다.
고사에서 말하는 두견화는 철쭉을 지칭하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달래는 분명 아니다. 새 이름 두견은 두견이를 말한다. 우리말이 한자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촉도는 소쩍
새를 말한다. 같은 여름 철새이긴 하지만 분명 다른 새이다.
옛 사람들이 진달래와 철쭉을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았듯 새도 서로 다른 종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두견화 전설에 대해 중국의 문호 임어당은 "두견화는 지극히 아름다운 꽃이지만 반인들은 비극의 꽃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뻐꾸기의 피눈물 나는 울음 속에서 핀 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두견이도 소쩍새도 아니고 뻐꾸기로 기술되있다. 진달래 뿌리 삶은 물에 베를 물들이면 잿빛으로 염색이 된다. 스님들의 정갈한 승복은 진달래 뿌리로 물들인 것을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전통 염료기법이 어느 깊은 산의 암자에나 남아 있을까,
지금은 여간해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술은 진달래꽃으로 빚은 두견주이다. 진달래꽃을 따다 꽃술을 따내고 독에 담고 찹쌀 고두밥 과 누룩을 버무려 그 위에 켜켜이 넣는다.
100일 쯤 지나면 향기가 물씬 풍기는 두견주가 된다. 당진 면천의 되 강주가 가장 이름났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중양절에 국화와 함께 진달래 뿌리로 술을 담궈 진달래 피는 삼월 삼짇날 마시는 술을 두견주라 한다."고 했다. 봄에 진달래꽃을 소주에 담가 두면 붉은 꽃물이 우러나와 맛과 빛이 우아하다. 한 컵을 불쑥 마시면 심한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혼미에 빠진다. 반드시 1개월 이상 숙성시킨 뒤 마셔야 한다. 진달래꽃은 약재로도 쓰였다. 꽃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을 꿀에 개어 환을 만들어 이것을 하루 서너 알씩 먹으면 오래된 기관지염을 다스린다. 한방에서는 기관지염, 고혈압, 기침에 좋고 혈압을 내려주며, 신경통 류머티즘을 낫게 한다고 했다. 이렇듯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꽃들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많은 해택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지금도 피고 지는 꽃들의 향연.꽃이 주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향기와 더 조화로울 때 꽃은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다.가족과 함께 먼 여행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으로 말이다.
꽃이 피는 공원이여도 좋다.
--산업자원부에 실린글--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폭넓게 창작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폭넓게 창작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