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던져 버린 이 ‘해병혼의 극치’는 곧 여단본부에 보고됐다. 정훈참모 박영옥 대위는 즉시 보도자료를 작성했으나 배포되지 못하고 말았다.
주월 미군 규정에 준한 주월 한국군 보도규정에 장교가 전사하면 유가족에게 전사통지서가 전해지기 전에는 보도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일수록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다. 다음날인 1966년 8월 12일 오후 외신기자 한 사람이 청룡부대 본부에 나타났다. AP통신이었는지, UPI통신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 기자는 냄새를 맡고 온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정훈장교 박대위는 그를 만나줄 수밖에 없었다.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사실대로 확인해 주자, 기자는 크게 감동한 표정으로 즉석에서 기사를 작성해 송고했다.
여단본부 통신대의 SSB 장거리 단파 무전송신기로 사이공에 있는 외신기자클럽의 동료를 통해 본사에 송고한 것이었다.외신에 먼저 기사가 보도됐으니 국내 신문·방송에도 사실대로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공 주재 한국 특파원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월남전의 영웅 이인호는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부하위해 희생’ 외신 먼저 보도
그는 해군사관학교 11기생 출신이어서 내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던 장교다. 청룡부대 출정식 행사 때 그가 도열한 곳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관심을 표했던 기억이 새롭다. 경북 청도 출신인 그는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나와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원래는 법대 지망이었으나, 고2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해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바꾸었다.사관학교에서는 럭비부에 들어가 매일 2~4시간씩 강행되는 방과 후 훈련에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었다.
핑계대기를 싫어하고 남을 탓하기 싫어하는 그는 재학 중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겼다.담배를 끊지 못해 숨어서 피우곤 하던 동기생이 그를 곯려주려고 주머니 속에 몰래 담배꽁초를 넣어 놓은 것이 훈육관에게 적발됐다. 그는 얼차려를 받으면서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만 되풀이할 뿐 끝내 친구 이름을 대지 않았다. 친구를 보호하려는 의리에 감탄한 훈육관은 불문에 붙이고 말았다.
해군·해병의 영원한 표상
임관 후 그는 해병학교에서 특수기초반 훈련을 이수하고 서해 도서부대 소대장으로 해병대 장교생활을 시작했다. 8개월 후 함포·항공 연락부대인 앵글리코 보직을 받았고, 얼마 안 있어 미국에 유학 가 AVT(상륙장갑차) 수색교육을 이수했다.귀국 후 이경자라는 아름다운 신부를 맞아 결혼한 그는 슬하에 딸 선옥, 아들 제욱 남매를 남겼다.
청룡부대 출정 전날인 66년 10월 2일 포항역을 떠날 때였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울리자, 그는 아이들 볼을 쓰다듬으며 “엄마하고 잘 있어. 아빠 잘 다녀 올게”하고 작별했다. 가족에게 충실한 면모를 가진 평범한 아버지의 일면이었다.그의 전사 후 정부는 1계급 특진과 함께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미국 정부는 은성무공훈장을, 월남 정부는 엽송무공훈장을 보내 왔다.당시 해군참모총장이던 내 동기생 함명수 제독은 그의 어린 아들 제욱군에게 해군사관학교 입학허가증을 수여했다. 해군·해병대와 유가족 간의 영원한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한편 해군·해병대 현역 장병들은 그를 추모할 동상 건립을 위해 모금활동에 나섰다. 해군·해병 예비역 장병들과 사회 각층의 호응으로 마련된 기금으로 그의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와 해병교육기지에 동상이 건립됐다. 그는 죽어서도 해군·해병의 마음속에 영원한 표상으로 살아 있다. 95년 6월에는 호국의 인물로 선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