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독일의 영화감독 리펜슈탈(Riefenstahl, Leni, 1902~2003) 사망
본명은 Berta Helene Amalie Riefenstahl.
1902. 8. 22 독일 베를린 ~ 2003. 9. 8
천재적인 재능과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협력자’란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했던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2003년 9월 8일 101년의 삶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레니 리펜슈탈의 일생은 실로 영(塋)과 욕(辱)이 명확히 엇갈린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나치 전당대회를 찍은 ‘의지의 승리’(1934)와 베를린올림픽을 담은 ‘올림피아’(1936),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로 리펜슈탈은 영화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탁월한 촬영술과 편집법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었다.
젊은 시절 댄서와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1932년 산악영화 ‘푸른 빛’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이후 히틀러의 눈에 든 그는 뉘른베르크에서의 나치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에서 원근법적 효과를 위해 다양한 렌즈를 동원하고, 히틀러의 영웅적 포즈를 앙각(仰角) 클로즈업으로 올려 찍어 부각시키는 등 혁신적 촬영술로 다큐멘터리의 신세기를 개척했다. 이어 ‘올림피아’에선 170명의 스태프들을 이끌고 빼어난 아이디어와 초인적 노력으로 손기정을 비롯한 베를린올림픽 선수들을 찍어내 베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그는 ‘올림피아’에서 사람의 몸이 얼마나 힘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독창적으로 입증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1945년 독일의 패망과 함께 끝났다. 나치 전범재판을 통해 4년간 수감생활을 한 뒤에도 ‘나치’라는 멍에를 평생 짊어져야 했다. 레니 리펜슈탈의 삶의 영욕은 그대로 위대한 전진의 시기인 동시에 저주받을 광기와 참혹한 수난의 시대이기도 했던 20세기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조선
[2002년] ‘오아시스’ 이창동감독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
2002년 9월 8일 세계 영화예술의 심장부인 유럽 최고영화제 베니스영화제에서 우리 영화 '오아시스'가 감독상(이창동)과 최우수 젊은 연기자상(문소리)을 받았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 수상으로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영화작가로 올라섰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한 리얼리즘 정신으로 한국 현실을 상대하며 탄탄한 이야기 솜씨로 영화를 만들어 온 끝에 영광을 안았다.
수상작 '오아시스'는 전과3범의 사내 종두(설경구)와 뇌성마비로 전신이 마비된 여성 공주(문소리) 등 한국사회에서 축복받지 못한 남녀의 남루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이 영화는 단순한 멜로를 넘어서 사랑의 본질, 나아가서는 한국이란 공간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하기는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까지 던진다.
'오아시스'는 지난 9월 6일 오후 베니스 리오 섬의 팔라 갈릴레오에서 열린 베니스 영화제 공식 시사회에서 각국 기자들과 팬들에게 "소외된 자들의 사랑이라는 영화의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력,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훌륭하다" "어려운 주제인데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조선
[2002년]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상태의 436년전 사대부 부인 사체 발굴 공개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436년만에 환생한 ‘미라 여인’ 발굴 모습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태아와 함께 미라가 된 사대부 부인의 사체가 발굴돼, 2002년 9월 8일 처음 공개됐다. 미라여인은 첩의 딸로 태어나 첩으로 시집간 것으로 추정됐다. 묘역 발굴을 담당한 고려대 박물관은 "인종(1515∼1545)의 후궁이었던 숙빈이 극존칭으로 쓴 한글 편지가 미라 주변에서 발견됐다"며, "이 편지와 족보 등을 검토한 결과 미라 여인은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량의 아들 윤소가 첩에게서 얻은 외동딸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태아는 사내아이이며 부인은 20대 초·중반인 것으로 보이며 436년전 출산 도중 사망해 추운 날씨 때문에 거의 부패하지 않은 채 체내의 수분이 말라 태아와 함께 미라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했다. 부인은 당시로서는 큰 키인 155cm이고, 막일을 한 흔적이 없는 고운 손을 갖고 있었다.
고려대 박물관측은 미라 여인의 흉배(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장식)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백학 무늬였지만, 이 품계에 해당하는 사대부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숙부인(淑夫人)’이라는 품계가 명정(죽은 사람의 관직과 이름 등을 쓰고 관 위를 덮는 천)에 없는 것으로 보아 정부인이 아니라 첩으로 출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미라 여인’의 관에서는 이 밖에도 대마도와 관련한 상소문체의 편지 등 한자 초서체로 쓴 편지 2통이 발견됐다. /조선
[2001년] 윤천주 前 문교부 장관-서울대 총장 별세
문교부 장관 등을 지낸 윤천주씨가 2001년 9월 8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윤천주 옹은 학자·교육행정가·정치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해 온 ‘현실 참여파’ 정치학자였다. 한국의 정치·선거 풍토를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4자성어로 정리하는 등 많은 정치 조어를 만들어 냈다.
194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윤옹은 이듬해 고려대 법정대에서 처음 강단에 섰다.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공군에 입대,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윤옹은 "정치학은 실천학문"이라며 5·16 이후 공화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정계에 투신했다. 그는 1964~1965년 문교부 장관을 지내다 학원사태로 물러났다. 재임 당시 국장들이 셔츠 바람으로 장관실에 드나들게 할 만큼 수수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윤 옹은 1967년∼1971년엔 공화당 전국구 의원(7대)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1973년∼1975년 부산대 총장, 1975년∼1979년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윤 옹은 ‘한국정치체계서설’(61) ‘우리나라의 선거실태’(81) ‘한국정치체계’(91) 등 저서를 냈으며, 1978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여론조사와 선거결과를 연계시켜 국민의식에 따른 정치행태를 규명했다는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왔다. 1983∼1995년 단국대·인천대·방송통신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최근까지 학술원 회지에 논문을 기고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선비와 관료는 검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40여년간 서울 삼선동 한옥을 지켰고, 3년 전엔 자신이 소장했던 책 1000여권을 고려대에 기증했다. /조선
[1998년] ‘메조소프라노 대모’ 성악가 이정희씨 별세 ← 광복 후 제1세대 외국유학파 성악가 이정희씨
1998년 9월 8일 한국 메조소프라노의 대모 이정희씨가 별세했다. 광복 후 외국유학을 다녀온 1세대 성악가로, 1950∼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로 활약했다.
1950년 현제명 오페라 '춘향전'을 시작으로 국립오페라단원 시절 한국초연 오페라 메조소프라노 배역 70% 정도를 그가 소화해냈다. 이씨가 출연한 주요 오페라는 ‘카르멘’ ‘춘향전’ ‘가면무도회’ ‘리골레토’ ‘파우스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등이다. 연간 20편씩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외에 베토벤 합창교향곡 솔리스트, 가곡 무대서도 이름을 날렸다.
이씨는 서울대 음대를 거쳐 미국 줄리아드음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1년 서울대음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32년 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조소프라노 윤현주, 백남옥, 소프라노 박정원, 김인혜 등 제자를 길러냈다. 재미 소프라노 신영옥도 이씨에게 배웠다. 이씨는 타계를 앞두고 소장 악보와 음악서적 일체를 서울대음대 성악과에 기증했다. /조선
[1986년] 도이 다카코,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사회당)로 선출 ← 도이 다카코 일본 사회당 여성 당수
일본 정당 최초의 여성당수가 1986년 9월 8일 탄생했다. 일본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서 도이 다카코 후보가 상대 후보를 큰 표차로 이겨 당수로 선출됐다. 지난 7월 중-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사회당으로서는 기사회생의 선택이었다.
동지사대학 강사로 헌법학자였던 도이 위원장은 1969년 중의원에 첫 당선된 이래 국회활동에 전념해 왔다. 당내에 파벌이 없는 그녀가 초당적인 지지를 받아 제10대 위원장에 선출된 것도 부활을 기대하는 사회당이 ‘생활밀착형, 부인중시형 정당으로의 전환’을 꾀했기 때문이다.
1987년 2월 취임후 처음 치러진 당대회에서 도이 위원장은 서구형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기초한 ‘신선언’ 강령으로 당의 체질개선을 지향한다고 표명했다. 노조중심에서 시민중심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여성과 시민과의 네트워크 구성에 주력했다. /조선
[1955년] 아데나워(Adenauer, Konrad) 서독 수상,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소련 방문 ← 아데나워
1955년 6월 7일 서독 정부는 소련 크렘린에서 온 암호 전문을 수신했다. 암호 해독결과, 외교관계 수립을 교섭하기 위해 서독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서독 정부는 고민했지만 모스크바 행을 결정했다. 소련에 남아있는 독일군 포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로 문제는 당시 서독인들의 심경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때까지도 독일은 소련 땅에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생존해 있는지 확인조차 못하고 있었다. 단지 수십만명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이 전후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8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 인근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하자 독일 국가가 전후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회담에 임한 서독과 소련은 시작부터 충돌했다. 소련은 우선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요구했고, 독일은 전쟁포로 석방을 전제로 내걸었다. "소련에는 독일군 포로가 없다"는 소련 국무장관 불가닌의 반복되는 주장에 회담은 거의 결렬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양측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과 양보 끝에 회담은 결국 전쟁포로 석방과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회담결과 1955년 10월 9일, 10여년 이상이나 소련에 억류돼 있던 마지막 독일군 포로들이 풀려나 독일에 도착할 수 있었고,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조선
[1954년] 동남아 반공군사동맹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발족
1954년 9월 8일 마닐라의 필리핀 상원의사당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를 비롯, 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타이·파키스탄·필리핀 등 8개국 대표들이 동남아시아집단방위조약에 조인,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SEATO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지자 '도미노 이론'을 배경으로 공산세력의 확대저지를 주장한 덜레스의 주도로 반공군사동맹으로 탄생한 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지역적 집단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했다.
조약구역은 동남아시아의 일반구역으로 아시아 가맹 제국의 전 영역을 포함하며, 북위 21°30' 이북의 태평양지역을 제외하는 서태평양의 일반구역이다. 따라서 타이완·일본·한국은 조약구역에서 제외되지만 베트남·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조약구역에 포함되며, 부속 의정서에서 이 3국을 조약구역으로 지정했다. 1960년대 이후 이 조약을 근거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서 개입여부로 내부분란이 발생해 사실상 소멸상태가 됐다. /조선
[1954년] 동남아 반공군사동맹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발족
1954년 9월 8일 오스트레일리아·프랑스·뉴질랜드·파키스탄·필리핀·타이·영국·미국 대표가 마닐라에 모여 동남아시아 집단방위조약에 조인했다. 1955년 2월 19일 이 조약의 발효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가 설립되었다. SEATO는 상비군을 보유하지 않는 대신 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하는 회원국들의 군사력에 의존했으며, 평의회 또는 대표단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사무총장이 방콕에 있는 참모부를 대표했다. SEATO는 존립목적을 방위에 국한했는데,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을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주의로부터 방위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등 3개국은 1954년의 제네바 협정 등을 이유로 회원국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으나 의정서에 의해 군사보호를 승인받았다. 기타 나머지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비동맹 외교정책을 유지했다. 파키스탄이 1968년 탈퇴했고, 1975년에는 프랑스가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SEATO는 1976년 2월 20일 마지막 군사합동훈련이 있은 뒤 1977년 6월 30일 공식 해체되었다.
[1953년] 천문학자 허블 사망 ← 허블은 언제나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다녔다고 한다.
1953년 9월 8일 ‘우주팽창론’을 확립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파월 허블이 사망했다. 허블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천문학으로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성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1914년부터는 여키스천문대에서 천체관측에 몰두했다.
1919년부터는 지름이 252cm나 되는 초대형 반사망원경을 막 설치한 윌슨山천문대의 연구원이 되어 성운을 관찰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이곳에서 M31과 M33 성운을 연구한 결과, 우리 은하 밖에도 수많은 ‘섬 우주’가 있음을 밝혀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주장은 슬라이퍼 등의 천문학자들도 주장했으나, 허블은 은하들이 움직이는 속도와 거리를 집요하게 측정하여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멀리 떨어진 천체일수록 더 빨리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른바 ‘허블의 법칙’을 도출하고, 우주가 팽창한다는 첫 증거를 제시했다. 그는 또한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니며 단지 수백만 개의 이름 모를 은하의 하나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타임'의 표지인물로 장식되기도 한 허블은 1948년 팔로마산천문대에 지름 508cm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자, 본격적으로 우주탐사에 열중하다 이날 세상을 떠났다.
[1951년] 대일강화조약ㆍ미일안보조약 조인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영국 등 48개국을 상대로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끝맺고 세계 각국과의 국교를 새롭게 맺기 위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혹은 대일평화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은 이듬해인 1952년 4월 28일부터 발효되었다. 조약은 전문(前文)과 본문 7장 27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몇몇 나라와의 의정서, 국제조약 가입 및 전사자(戰死者)의 분묘에 관한 2가지 단독 선언이 추가되었다. 영토처리문제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독립을 승인하고, 타이완과 펑후 군도[澎湖群島],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사할린 섬 남부 등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구권을 포기하며 남태평양 제도의 구(舊) 위임통치지역을 미국이 단독으로 신탁통치한다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배상문제, 안전보장문제, 일본 내 신탁통치문제 등이 규정되었다. 회의 참가국과 관련해 타이완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어느쪽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미국과 영국 간 의견 불일치로, 양쪽 모두 회의에 초청받지 못했다. 또한 인도·미얀마·유고슬라비아는 초청을 받았지만 참가하지 않았고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는 참가했지만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약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 국가와도 1952~58년 2국 평화조약, 혹은 그에 대신하는 문서를 체결하고 국교를 회복했다.
[1945년] 미 제24군단 인천 도착
1945년 8월 11일.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에게 미국 태평양사령부로부터 한통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한반도 38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8월 8일)를 하고 한반도를 향해 속전속결로 진군하던 긴박한 상황에서 한반도로부터 1600여㎞나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24군단에 이 임무가 떨어진 것은 단지 한반도로부터 가장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가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미군 상륙 전까지의 치안유지 권한을 맥아더로부터 위임받았고, 하지 역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이 지역의 경비를 일본군이 맡도록 지시했다.
9월 8일 아침, 마침내 하지가 이끄는 2개 사단이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실로 40년 만에 맞는 해방군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이들을 환영할 대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질서유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으로부터 날아든 총탄세례만이 한국인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2명이 현장에서 사살된 것이다. 진정한 광복은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조선
[1944년] 독일, V2 로켓 첫 발사 ← 발사준비를 하고 있는 V2 로켓
1944년 6월12일부터 고성능의 폭탄이 무차별로 런던 곳곳을 파괴해도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도무지 발사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 독일어 ‘보복(vergeltung)’의 이니셜에서 이름을 딴 ‘V1’ 로켓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발사 추정지를 알아내 맹폭을 가하고 레이더와 방어장치 개선으로 요격률이 높아지면서 영국군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6200여명이 죽고 1만8000여명이나 부상한 뒤였다.
영국이 비로소 V1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발표한 이틀 뒤인 9월 8일 이번에는 요격할 틈도 없이 새로운 로켓이 런던으로 날아들었다. 영국인이 ‘악마의 사자’라고 부른 장거리 로켓 ‘V2’였다. 길이 14m·중량 13t에 항속거리도 300㎞나 되는 고성능의 신무기가 음속의 3배나 되는 빠른 속도로 발사 3∼4분 만에 런던에 떨어져 영국군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종전 때까지 1360발이 발사돼 1190발이나 목표물을 맞힐 정도로 명중률도 높았다. 런던에만 500발이 떨어져 2700여명이 죽고 6500여명이 부상했다. V2 발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4년만 더 일렀더라면…”이라며 발을 굴렀다고 한다. /조선
[1941년]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 개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오늘 나치스 독일군의 기나긴 레닌그라드 포위가 시작된다. 레닌그라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이다.
독일군은 이날부터 1944년 1월 18일까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채 공격을 계속했다. 육상은 물론 인접한 라도가(Ladoga)호수의 수상 통로도 완전히 차단해 모든 물자의 수송을 끊었다.
소련 붉은군대는 1943년 1월 12일에야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해 엿새 만에 라도가 호수 쪽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듬해인 44년 1월에야 독일군들을 이 도시로부터 멀리 쫓아낼 수 있었다.
소련 정부는 9백일 동안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인 67만여 명이 굶어죽거나 동사했다고 발표했다. 이보다 훨씬 많은 150만여 명이 숨졌다는 비공식 집계도 나왔다.
소련 정부는 독일군에 맞서 싸워 주권을 지킨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라는 호칭을 내렸다. /YTN
[1934년] 독립운동가 양세봉(梁世奉) 순국
(1896년(건양 1) 음력 6월 5일 평북 철산 ~ 1934년 음력 8월 12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렵고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국민부 소속 조선혁명군의 사령관을 지내면서 한·중 연합작전을 이끌었다. 일명 서봉(瑞鳳)·윤봉(允奉). 호는 벽해(碧海).
1919년 평안북도 천마산(天摩山)을 근거로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던 천마산대에 입대해 크게 활약했다. 1920년 천마산대와 함께 남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광복군총영이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로 확대·개편되자 소대장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제3중대장으로 승진했다. 1924년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8개의 독립운동단체가 합류해 조직한 대한통의부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1925년 1월 양기탁(梁起鐸)·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이 통의부·길림민회·의성단·서로군정서 등 12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정의부를 만들자 중대장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29년 정의부·신민부·참의부 3부가 합작해 국민부를 창설하자 선민부토벌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조직해 부사령으로 적기관 습격, 일제의 밀정 처단 등의 무장활동을 했다. 그해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한 조선혁명당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조선혁명군의 중대장·부사령관으로 항일전을 지휘했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자 현익철(玄益哲)·고이허(高而虛)·양기하(梁基瑕) 등과 함께 민족주의 계열로서 사회주의 계열과 대립했다. 1931년 10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신빈사건(新賓事件) 이후 조선혁명군을 개편해 총사령이 되었다.
1932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자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리춘룬[李春潤]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해 그해 3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융링제성[永陵街城]을 탈환하고 상자 강[上夾河]까지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혁명군은 산하에 5개로(五個路) 사령부를 거느리는 대부대로 개편하고 그는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혁명군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를 설립, 교장을 맡아 사관을 양성하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1933년 2월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 영수인 왕위원[王育文]·탕쥐우[唐聚伍]와 혁명군 대표 김학규(金學奎)가 회합해 '한중군합작항일공작'을 결성하는 협상이 이루어져 요녕민중자위군총사령부 내에 설치한 특무대사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사령부는 대병력을 파견해 전만주에 걸친 행동을 개시, 1933년 5월 영릉가로 진격해 한중연합군은 패퇴했다. 1934년 3월 이후 그는 박대호(朴大浩) 등 반만군(反滿軍)과 관뎬 현[寬甸縣]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했으며, 싱징 현[興京縣]을 습격하기 위해 수백 명을 동원하기도 하고, 중국의용군 덩톄메이[鄧鐵梅]와 합류해 북만주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4년 8월 12일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인 박창해가 매수한 중국인 자객에게 타이라쯔거우[太拉子溝]에서 사살되었다.
그의 사후 조선혁명군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몇 차례의 개편이 있었지만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유골 없는 묘지가 마련되었다.
양세봉은 북조선에서도 유해가 애국열사릉에 매장되어 있고 김일성이 특별히 양세봉의 유족들을 평양에 불러 살게 하는 등 높이 평가받고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아버지 김형직이 일찍 사망한 뒤 오동진, 손정도,장철호,현묵관, 그리고 양세봉에게서 학비를 후원받은 사실을 기록했다.
[1904년] 소설가 계용묵(桂鎔默) 출생
1904. 9. 8 평북 선천∼1961.
세련된 언어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소설을 발표했다. 본관은 수안(遂安).
생애와 활동
아버지 항교(恒敎)와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창전(昌琠) 밑에서 〈천자문〉·〈동몽선습〉 등을 배웠다. 1918년 삼봉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 안정옥(安靜玉)과 혼인했다. 1921년 중동학교를 거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잠깐 다녔으나 할아버지의 반대로 낙향했다. 고향에서 4년간 지내면서 외국문학 작품을 즐겨 읽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東洋]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했으나, 집안이 파산하여 1931년 귀국했다. 1938년 조선일보사 등에서 일했다. 1945년 정비석과 함께 〈대조〉를 펴냈고, 1948년 김억과 함께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1·4후퇴 때 제주도로 피난가 1952년 그곳에서 〈신문화〉를 펴낸 뒤, 1953년에는 문인환도 기념문집인 〈흑산호〉를 발간했다. 1955년 서울로 돌아와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 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학세계
1927년 〈조선문단〉 3월호에 단편 〈최서방〉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40여 편의 단편과 수필집 1권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발표 시기에 따라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에 속하는 〈최서방〉·〈인두지주 人頭蜘蛛〉(조선지광, 1928. 2)는 지주에게 시달리는 소작인과 소작지를 빼앗기고 지게꾼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그린 것으로 현실인식이 강한 경향을 띠고 있다. 제2기에 속하는 〈백치 아다다〉(조선문단, 1935. 9)·〈마부〉(농업조선, 1939. 5) 등에서는 자신의 순수함이나 무지, 사회적 여건 때문에 꿈을 빼앗기고 파멸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으며, 〈병풍에 그린 닭이〉(여성, 1939. 1)에서는 재래의 농촌을 배경으로 농토와 밀착된 농민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소박하고 순수한 농민 모습은 부드러운 감동을 주는 반면, 소극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한계를 지닌다.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는 황금만능의 세태에 대한 일종의 문명비판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제3기에 속하는 작품은 해방 후에 발표한 〈별을 헨다〉(동아일보, 1946. 12)·〈집〉(대조, 1947. 8) 등으로 귀국민이나 월남민의 비애를 그렸다. 또한 〈바람은 그냥 불고〉(백민, 1947. 7)에서는 친일파가 또다시 득세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비판하여 문제의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은 인간이 가지는 선량함과 순수성을 옹호하면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추구했지만, 현실과의 적극적인 대결을 꾀하지는 않았다. 갈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담담한 세태묘사에 그쳐 신변소설, 심경소설에 머물렀다고 평가받았다.
[1841년]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 (Dvořák, Antonin, 1841~1904) 출생 ← 드보르자크, 1900년경 Max Svabinsky가 그린 초상화(부분)
드보르자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최초의 보헤미아 작곡가이다. 19세기 낭만음악 양식 속에 보헤미아 지방의 민속자료를 채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드보르자크는 보헤미아(지금의 체크) 지방 프라하의 블타바 강변에 있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친 뒤 1873년 11월 몇 편의 작품이 성공할 때까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소프라노·콘트랄토를 위한 <모라바 2중창곡 Moravian Duets>(1876)과 피아노 2중주 <슬라브 무곡 Slavonic Dances>(1878)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보헤미아 음악을 전세계에 알렸다. 풍부한 선율과 소박하고 단순한 음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음악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1884년 영국에서의 첫공연과 1890년 모스크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1892년에는 뉴욕에 새로 설립된 국립음악원의 원장직을 수락했다. 1895년 보헤미아로 돌아온 뒤 여러 편의 현악 4중주와 교향시들, 마지막 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표해 사랑받았으나 오페라에서만은 예외였다. 주요 작품에 <슬라브 무곡>, 교향곡 9번 <신세계 From the New World>(1893), <유모레스크 Humoresque>(작품 101-7번, 1894)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31년] 독일의 시인, 소설가 라베(Raabe, Wilhelm, 1831~1910) 출생
브라운슈바이크 지방의 아름다운 소도시인 에셰르하우젠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학업을 중단하고 마그데부르크에서 서점 점원이 되었다. 이 무렵에 여러 작가의 작품에 접하였고, 새커리 등 영국 작가에게 끌렸다. 1854년 향학의 뜻을 품고 베를린대학교의 청강생이 되어 철학 ·역사 ·문학을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뜻밖에도 마그데부르크 시절의 다독(多讀)이 꽃을 피워 야콥 코르비누스(Jakob Corvinus)란 필명으로 《슈페를링 거리의 연대기 Die Chronik der Sperlingsgasse》(1856)를 자비로 출판, 헤벨의 칭찬을 받아 문필가의 길로 나섰다. 이것은 나이 많은 이와 같은 안목으로 베를린이라고 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대도시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운명의 하나하나를 따뜻한 동정의 눈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출발점으로 하여 작은 것, 가난한 것을 향한 사랑은 라베의 모든 작품을 일관하는 근본기조가 되었다. 그가 슈투트가르트 시대에 발표한 3부작 《배고픈 목사 Der Hunger pastor》(3권, 1864) 《아부 텔판 Abu Telfan》(1867) 《영구차 Der Schüdderump》(1870) 등은 그의 이름을 길이 남겼다. 그는 화려한 프로이센 시대 국가의 번영에 등을 돌린 채 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사람, 또한 프랑스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세상의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여 기인으로 변모해가는 모습 등 현실에 눈을 돌려서 자유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해왔다. 바로 거기에서 저절로 깊은 인간애와 신랄한 야유, 따뜻한 유머가 스며나와서 독특한 시적 사실주의가 그의 작풍을 만들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인생의 현실에 입각하여, 실러에서 비롯되는 반성의 사람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장 파울과 같이 독일 기질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naver
[1830년] 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랄(Mistral, Frédéric, 1830~1914) 출생
1830. 9. 8 프랑스 마얀~1914. 3. 25 마얀.
아를 근처 마이얀 출생. 아비뇽의 중학교에서 선배격인 루마뉴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방스 문화의 보존과 부흥을 위한 ‘펠리브리지’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연애 서사시 〈미레유 Mirèio〉(1859)를 비롯하여 많은 시집을 남겼다. 또한 랑그도크어(語) 사전인 〈펠리브리지 보전(寶典)〉(1878∼1886)의 출판과 아를 박물관의 창설을 위해서도 힘썼다. 190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레유 Mirèio〉(1859)·〈칼랑도 Calendau〉(1867)·〈네르토 Nerto〉(1884)·〈론 강의 시 Lou Pouèmo dóu Rose〉(1897) 등 4편의 장편 서사시와, 역사비극 〈잔 여왕 La Reino Jano〉(1890), 서정시집 〈황금의 섬 Lis Isclo d'or〉(1876)·〈올리브 수확 Lis Oulivado〉(1912), 그리고 〈아르마나의 산문 Prose d'Armana〉(1926~29)에 수록된 많은 단편소설 등이 있다. 1848년에 최초의 서사시 〈저택 Lis Meissoun〉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뒤인 1927년에 〈르뷔 드 프랑스 Revue de France〉지 7월호와 8월호에 발표되었다. 회고록인 〈나의 근원 Moun espelido〉(1906)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위대함은 첫번째 장시인 〈미레유〉와 마지막 장시인 〈론 강의 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2편의 작품은 12편으로 이루어진 본격적 규모의 서사시이다. /naver
[1804년] 독일의 서정시인, 소설가 뫼리케(Mörike, Eduard Friedrich, 1804~1875) 출생
루트비히스부르크 출생. 튀빙겐대학교의 신학부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어 각지를 전전하였다. 1851∼1866년 슈투트가르트의 여학교에서 문학 교사로 근무하면서 만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제1급의 서정시인으로서 《시집 Gedichte》(1838)에는 목가적 민요조의 것과 깊은 정신성을 담은 것 등, 실로 다양한 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작품은 풍부한 음악성과 명확한 조형성, 따뜻한 심정과 엄격한 형식미 추구 등을 보인다. 이 외에 《보든 호수의 목가 또는 어부 마르틴》(1876)과 많은 사설조(辭說調)의 시, 민요풍의 시편 등이 있다.
소설로는 자서전적인 요소가 강한 처녀작 《화가 놀텐》(1832)이 있지만, 이것은 J.W.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徒弟)시대》를 모범으로 삼은 장편으로서, 당시의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양소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산문작품들 중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단편 《프라하에의 나그네길의 모차르트》(1856)이다. 초연(初演) 여행 중 모차르트는 행복의 절정에서 죽음을 예감하는데, 죽음을 생의 일부라고 달관(達觀)하는 긍정적인 인생관에 도달한다는 줄거리이다. 그의 생애는 자신의 인품처럼 파란없이 평온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도 평명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일관되었으며, 입체적 조형력과 예민한 음악성이 넘쳤고, 또 깊은 자연감정과 결합되었다. 즉 그의 작품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민요조에 가까운 것이었다. 동화 《슈투트가르트의 난쟁이》(1853)도 우수한 작품이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라우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한밤중에》 《정원사(庭園師)》 등은 민요풍의 시로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naver
[1783년] 덴마크의 시인, 종교가, 역사가 그룬트비(Grundtvig, Nikolai Frederik Severin, 1783~1872) 출생
우드비 출생.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덴마크의 부흥에 기여한 농민 교육자이다. 코펜하겐대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북구 신화(北歐神話) Nordens mythologi》(1808)를 써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영국으로 여행하여 영국 국민의 자유와 실제 생활에 깊은 감명을 느끼게 되면서 라틴적·인문주의적 학교교육을 청소년들의 생명을 위축시키는 '죽음의 교육'이라고 공격하고, 일하는 국민을 위한 '생활학교'를 주장하여, 이를 즉각 설립하라고 나라에 호소하였다.
조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예부터 전하는 민족정신과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하여 국민부흥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특히 1864년의 패전 후 그의 제창으로 전국에 설립된 국민대학(국민고등학교라고도 한다)에서 교육을 받은 농촌 청년은 패전에 잇따른 농업 위기를 극복하여 세계적 농업국, 평화적인 문화국가 건설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국부(國父)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전집 10권이 있다. /naver
[1522년] 마젤란 선단, 최초로 세계일주하고 에스파냐로 돌아옴 ← Fernando de Magallanes
마젤란은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錢主)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때에 침몰 ·도망한 함대는 각각 1척,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것으로 예상하고 서진(西進)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했으나, 1521년 3월 6일 괌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다. 3월 16일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세부섬의 왕 및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으며, 27일에는 준비가 덜 된 채 막탄섬의 토벌을 시작하였다가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지점이 몰루카제도의 경선(經線)을 넘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완수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휘자를 잃은 선단원(船團員)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으로 11월 몰루카제도의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號)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naver
[1474년] 이탈리아의 시인 아리오스토(Ariosto, Ludovico, 1474~1533) 출생 ← 아리오스토, 〈성난 오를란도〉(제3판)에서 Titian이 그린 소묘를 보고 제작한 목판화(1532)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며, 페라라의 에스테 후작 집안 가신(家臣)의 맏아들이다. 일찍부터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몸에 익히고, 대학에서는 법률을 배웠다. 당시 페라라는 에스테 후작 집안의 후원으로 문예활동이 활발하였다. 아리오스토는 시작(詩作)과 외교활동에서 기반을 굳히고, 한평생 에스테 후작 집안에서 일하였다. 아리오스토는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o furioso》(1516)만을 쓴 작가로 여겨지고 다른 작품은 대작의 준비라 생각된다.
《광란의 오를란도》의 줄거리는 복잡하지만,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전쟁, 아름다운 안젤리카에게 실연당하고 미친 오를란도, 에스테 후작 집안의 선조 루지에로의 모험으로 가득찬 연애가 주제이다. 리파두사섬에서 그리스도교도측이 승리를 거두고 루지에로와 브라다만테가 맺어지는 것으로 8행시, 46가(歌)의 작품은 끝나는데, 3개의 주제가 조화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사건 전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잡다한 자료를 높은 곳에 앉아 다루어 내는 작자의 능력은 탁월하다. 작자는 당시 유럽 열강의 간섭과 약탈 앞에 놓인 조국 이탈리아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고, 공상의 세계로 도피를 하였다. 이런 점에서 《광란의 오를란도》는 단테의 《신곡》이나 A.만조니의 《약혼자》와 대조를 이룬다. /naver
[1157년] 영국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 출생 ← 리처드 1세, 프랑스의 abbey church of Fontevrault-l'Abbaye에 있는 무덤의 조상(부분)
헨리 2세의 셋째 아들이다. 프랑스의 아키텐지방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으나, 어머니 및 형제와 짜고 반란을 일으켜 부왕(父王)과 싸웠다. 1183년 형 헨리가 죽고 1189년에 부왕인 헨리마저 죽음으로써 왕위에 오른 리처드는 부왕의 대륙정책을 계승함과 동시에 프랑스왕의 누이동생과의 약혼을 취소하여, 그와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운동이 고조됨으로써 두 사람의 공공연한 적대관계는 연기되었다.
왕은 1190년에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제휴하여 제3회 십자군을 편성, 이를 주도하여 출정하였다. 그 동안 십자군을 위하여 약 8,000의 병력과 100척의 수송선을 준비하였다. 1191년 리처드는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서 적왕(敵王) 살라딘을 격파하여 3년의 휴전을 맺고(1192), 그의 용맹성으로 사자왕(獅子王)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귀국하는 도중 빈에서 오스트리아왕에게 붙잡혀 많은 액수의 몸값을 바치고 1194년에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프랑스왕의 뒷받침으로 이미 왕위를 찬탈한 아우 존을 몰아내고 다시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제후들의 반란도 진압시켰다. 그 뒤에 본국의 통치를 유능한 행정관 H.월터에게 맡기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2세와 싸우다 1199년 4월 리모주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리처드 1세는 재위 10년 중에서 본국에는 반 년밖에 있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프랑스에서 또는 십자군원정으로 허비하여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였다. 또, 자신의 몸값으로 무거운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징수하였고, 정치에도 무능하였으므로 부왕시대에 눌려 있던 제후(諸侯)들의 세력이 재위 중에 다시 대두하는 일도 있었지만, 전투에서의 영웅적인 행위는 중세기의 전형적인 기사로서 좋은 평을 받았다. /naver
그밖에
2004년 국사편찬위원회, 1909년 일본이 제작한 지도서 두만강 이북 ‘간도는 조선땅’ 증거 찾아내 공개
2002년 한국전력, ‘파워콤’ 우선협상대상자로 하나로통신 컨소시엄 확정
1999년 KT, 포털서비스 ‘한미르(http://www.hanmir.com)’ 오픈
1997년 진로그룹 화의신청
1989년 전자파 반사 시설 준공
1982년 부산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서 세계최대 이암(泥岩)자연동굴(길이260m) 발견
1981년 리비아, 소련에 항만 개방
1981년 미국, 최초로 동물유전자 이식에 성공
1973년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가 기자회견을 통해 "다수의 반체제인사가 정신병원에 격리돼 약물투약으로 지적능력이 위험해지고 있다"고 폭로
1970년 잠비아서 제3회 비동맹제국 수뇌회의 개막
1966년 MRA(Moral Re-Armament) 아시아대회 서울서 개막
1958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서 중공 제외를 발표
1949년 뇌염으로 각급학교 휴교
1949년 20세기 초 대표적인 독일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사망
1946년 불가리아 왕정 폐지 국민투표, 공화제 채택
1945년 조선인민보 창간
1942년 일제, 금속 회수령 공포
1939년 독일군, 바르샤바에 침공
1920년 뉴욕-샌프란시스코간 미대륙횡단 항공우편 개시
1920년 한국 근.현대문학을 정립한 문학평론가 조연현 출생
1904년 디어도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 당선
1898년 경부철도 부설에 관한 한일조약을 체결하기로 일본에 통보함
1894년 독일 과학자 헬름홀츠 사망
1858년 인도, 영국 식민지 됨(무갈제국 멸망)
1841년 스웨덴의 시인 스노일스퀴 출생
1809년 칠레의 대통령 몬트 출생
1468년 세조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