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 두란노
- 언젠가 맞이할 나의 죽음, 준비하고 있는가/ 회피와 부정, 죽음을 대하는 현대인의 두려움
- 죽음은 거대한 단절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우리에게서 또는 우리를 그들에게서 갈라놓는다. 죽음은 거대한 분열이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물리적 요소와 무형적 요소를 따로 찢어내, 본래 한시도 육체를 이탈하지 않도록 되어 있던 전인을 분리시킨다.
-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며 살아갈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물론 언젠가는 닥쳐올 죽음임을 우리도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속으로는 그 사실을 억누르며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 죽음이야 말로 반드시 닥쳐올 현실이건만, 현대인은 죽음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마치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간다.
- 아무리 막아 보려 해도 죄책감은 집요하며, 특히 죽음 앞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현대 문화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별로 없지만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놀라운 자원을 준다.
현대인들이 죽음에 준비되지 못한 이유
1. 현대 의술의 축복
2. 현세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세속 문화
3. 깊은 허무감
4. 심판에 관한 두려움
- 죽음은 우리를 흔들어 깨워 이생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장례식, 특히 친구나 사랑하는 이의 장례식에 가거든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그분은 그분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이생의 모든 것이 덧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생의 모든 것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은 예외다. 그 사랑은 우리와 함께 죽음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통과해 우리를 그분의 품에 안기게 한다. 당신이 잃을 수 없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우리를 품어 주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늘 극도로 불안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안전이 아니라면 너는 전혀 안전하지 못하다.
- 모든 종교가 죽음과 내세를 말하지만, 대체로 주장하는 바는 영원에 대비하려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죽음이 닥쳐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이 최선의 삶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하여 끝까지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나 혼자 죽음에 맞서 내 인생 이력으로 충분하기만을 바라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독교에는 죽음을 이기신 챔피언이 계시다. 그분이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덮어 주신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빌 3:9 그분의 완전한 이력에 의지해 죽음에 직면한다. 이 사실을 믿고 알고 받아들이는 정도만큼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게서 해방된다.
2. 사랑하는 이의 죽음,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할 것인가/ 충분히 슬퍼하되, 깊은 소망을 품고
- 죽음은 본연의 상태가 아니다. 죽음은 비정상이고 아군이 아니며 당연하지도 않다. 결코 생명 순환의 일부가 아니다. 죽으면 다 끝난다. 그러니 슬퍼하고 울라. 성경은 우리에게 울라고 할 뿐만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한다.롬 12:15 우리 앞에 울 일이 많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기에 우리도 장차 그분의 부활에 동참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 우리는 슬픔과 소망이 상호 배타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이 둘이 짝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예화가 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소금을 쳐서 육류를 보존했다. 소금에 절이면 고기가 썩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슬픔도 소망이라는 소금을 치지 않으면 고기처럼 상한다.
- 이 세상 것은 아무리 놀랍거나 위대해도 장차 직접 뵈올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비하면 예고편이나 맛보기에 불과하다.
-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즉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 그런데 죄수도 죗값을 다 치르면 풀려난다. 법의 구속력이 소멸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죗값을 다 치르셨으므로 다시 살아나셨다. 법과 사망은 더는 그분께 구속력이 없으며,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 오래전에 시카고의 유명한 드와이트 무디 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머잖아 시카고의 여러 신문에 드와이트 무디의 부고가 실리거든 절대로 믿지 말라.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슬퍼하되 소망을 품으라. 부정이나 착각에서 안심하고 깨어나라. 죽음 앞에 웃으며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기뻐 노래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손을 잡고 계시면 당신도 노래할 수 있다.
- 자신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하나님께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히 시인하라. 의문을 품고 울분을 토하는 일이 ‘영적이지 못하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도 친구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시고 분노하셨다. 욥도 주님께 울부짖었다. 욥은 목청껏 하소연하되 하나님께 했고, 당장 별 성과가 없는데도 부단히 기도하며 그분을 만났다.이제 사랑하는 고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언젠가는 우리도 다시 만나겠지만, 그 사실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슬픔과 분노를 억누른 채 당장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절제하게 쏟아 내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해치지는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