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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내린 비를 잔뜩 머금은 어느날.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3개월 만이던가..익숙하게 느껴졌던 이 길을 다시 걷는다는 것이..
오랜 시간을 졸음과 멀미와 싸우며 도착한 곳..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님이 있는 곳 중앙박물관이다.
용산으로 이전 개관한 국립 중앙 박물관은 규모면에서도 커졌을 뿐만 아니라 상설 전시관과
특별 전시관의 이분화로 전시 감상에 있어서 차별화를 가지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상설 전시관 내부의 전시 관람 동선.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부터 시대 순으로 출발하여 경천사 십층석탑을 돌아 한바퀴를 돌아 나오면 다시 입구 쪽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회화관과 기증관을 돌아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점.
그래도 조금은 아쉬웠던 부분은 시대별 내부 관람장의 동선이 조금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작품들을 감상해야 했던 부분이다.
모쪼록 한국을 포함한 동양 미술의 관람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삼국인들의 조형미에 담긴 기운.
단숨에 3층으로 달려 올라가 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했지만 일행이 함께 있었기에 설레임을 안고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구석기..신석기.. “원시인”이라는 호칭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조형성과 세공 능력에 감탄하며 청동기..철기..그리고 고구려를 지날 즈음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인가..
숨이 멎을 듯한 저 교만한 자태.
힘찬 폭포가 흘러 오르듯 힘차게 하늘을 바라보며 연꽃위에 핀 세상을 물고 있는 용과..
세상을 음미하듯 조용히 앉아있는 아름다운 봉황..
고요히 주변 공기가 가라앉는다.
국보 287호 “백제 금동 대향로”
이것이 발견되고 나서 산의 모습을 우리와 친숙한 봉래산의 이름을 붙여
“금동 용봉 봉래산 대향로” 라고도 불리웠던..
오랜 시간을 차디찬 땅속에서 지내며 지칠 법도 하건만 그녀가 내 쉬는 공기는 여전히 활기차고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백제 금동 대향로”의 모습은 하단부에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용을 다리삼고 노신으로 불리는 연꽃위의 신선세계와 봉황이 살고 있는 뚜껑으로 이루어져있다.
노신의 세단으로 된 연꽃잎 속에는 기이한 모양의 27마리의 짐승들과 사람 둘이 돋을새김 되어있고 이 연꽃의 노신은 “기”의 화생인 용의 입에 물려있다.
연꽃잎 속에 새겨진 기이한 동물들은 물을 상징하는 연꽃위에 새겨져 그것이 물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날짐승과 사람 둘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을 나타낸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뚜껑에는 다섯층의 산 무리에 74개의 봉우리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역시 기이한 동물 42마리와 17명의 사람 모습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가장 꼭대기에 황홀하게 자리잡고 있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봉황의 모습은 마치 나를
천상의 세계로 안고 날아오를 것만 같은 황홀경을 느끼게 한다.
내가 이 작지만 커다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대향로에서 내 심장을 빼앗긴 건 다름 아닌
노신과 뚜껑을 받치고 있는 용의 모습이었다!!
“기”의 화생인 용.
반 팔메트 무늬의 꼬리에서부터 만들어진 기는 활기차게 솓구쳐 오르며 용의 모습을 만들어 나간다.
이렇게 탄생해 나가는 용의 오른쪽 앞 다리와 두 뒷다리는 서로 똬리를 트는 듯 회전하며 연이어 대향로의 대좌를 이루고 있는데, 용의 얼굴 앞에 번쩍 치켜 든 오른쪽 앞다리를 보라!!
백제인들의 이 황홀한 공간 처리 능력을.
만약 이것이 이 곳에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자태는 가지지 못했을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 “용”이라는 존재는 상상의 “짐승”이 아닌 “기” 즉, 만물의 근원인 “기(에너지)”의 형상화인 것이다.
반 팔메트 무늬의 꼬리로부터 시작해서 찬찬히 용의 몸을 거슬러 올라가 그 위에 우리의 전통 불교 사상인 “연화화생”의 상징인 연꽃이 자리잡고 그 위에 신선의 세계가 생겨나며
신선의 세계는 비로소 봉황으로서 완성된다.
그렇다.
이 “백제 금동 대향로”의 진정한 모습은 아래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감상해야 그 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이 대향로에 푹 빠져있었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이 절묘한 아름다움과 그 속에 감추어진 살아있는 기운.
복제품인 이것이 이토록 나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했다면 국립 부여 박물관에 있는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것인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어렵게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가니 뛰는 심장이 멎기도 전에 또 하
나의 아름다움이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고요한 공간에 은은한 빛을 받으며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화려하지만 수려한...
신라관에 자리잡은 왕의 기운을 안은 “신라 금관”
이 시대 어떤 금세공 공예품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수려하며 단아한 화려함을 가지고 있을까.
언젠가 한국 미술사를 공부함에 있어 이것이 날 출(出)모야에 사슴뿔을 형상화한 모양이라
고 배웠다.
과연 이것이 맞는 말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하며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모습과도 너무 닮았다.
고요함을 억누르는 이 금관은 셀 수 없을 만큼의 작고 귀여운 옥장식이 달려있다.
이 옥 장식을 “곡옥”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지만 이는 일본 미술사학자가 그들의 시각에서 붙인 이름이기에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는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이 “곡옥”이라고 불리우는 장식은 “용”의 모습을 단순화한 과정이라고 읽고 배웠다.
그 정당성에 대한 설명은 정확히 기억하지는 않지만 기억나는 것은 예로부터 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용이었고 이러한 용의 모습들은 왕의 것이라 추정되는 것들에서
공통적으로 장식되던 부분이었다는 것과 훨씬 이전 곡옥의 초기 형태로 인식되어지는 모자 곡옥에 무수한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의 개수가 용의 비늘의 수라고 전해지는 81개라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이제 “곡옥”이 아닌 “옥룡”으로 불리워야 맞는 것이 아닐까?
◎경천사 십층 석탑. 그리고 사색
고된 걸음에 잠시 몸을 쉴 겸 “경천사 십층 석탑”앞에 앉아 숨을 돌리기로 했다.
그 앞에서 잠시 몸을 식히는 동안 참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십층 석탑 앞을 오고갔다.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넣고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다 5분도 채 가지 않아
자리를 뜨고 또 새로 온 사람들은 그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무얼 적고 무얼 찍어가는 것일까.
“경천사 십층 석탑”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함께 드물게 짝수 층으로 이루어진 탑이라는 걸 모르는 탓일까.
우리나라는 보편적으로 홀수 층의 탑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땅에 닫는 부분은 늘 짝수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주역”에 언급된
“天一二地 , 天三地四......”의 의미로 홀수는 하늘을 뜻하며 짝수는 땅을 의미하기에
하늘로 오르는 탑의 층수는 홀수로 지어올리고 땅에 닫는 면은 짝수로 이루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천사 십층 석탑”은 원나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장인이 지은 것이기에 유별나게 짝수층으로 이루어졌다.
(일각에서는 원나라 장인이 축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면석에 새김한 부조들의 모습 역시 우리가 흔히 보던 것들과는 다른 모습인 것을.
예전부터 한국 미술에 난 관심이 많았다.
그것들에게서 느낀 알 수 없는 편안함과 벅차오름..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아름다움이란..
나 역시 서양의 학문을 통해 서양화를 그리고 또 서양 미술사를 배우며 서양 미술을 보는
관점으로 한국 미술을 보아왔다.
하지만 우리의 것은 우리의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한국 회화는 오른쪽 상단부에서 왼쪽 하단부로 이어지는 대각의 구도로 읽어야 하며
그로 인해 동선이 바뀌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회화든 공예든 조각이든 우리에겐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 사상과 그것의 근간이 되었던 “기”사상.
그리고 백자로 들어서며 비로소 백성을 위한 선민 사상이 깃들어왔다.
진정 한국 미술은 분석과 조형성이 아닌 그 것이 가진 기운과 그 뜻을 읽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배우고 있는 한국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일본인들에 의해 설명
되어진 것이기에 원래의 뜻과 다르게 변질되어버린 것들이 분명 있으리라.
◎한국의 이야기책. 회화 그리고 서예
이런 저런 생각들 머리에 뒤섞어놓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옮겨 2층으로 향했다.
국립 중앙 박물관의 동선은 참으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상설전시관 내부에 있는 기증관이나 역사 사상관, 아시아관은 둘러보지 않은 관계로 사람들 사이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걸 회화관을 들어서서야 깨달았다.
회화관에 들어서서 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였다.
“단원 김홍도” 선생님의 작품과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작품들을 찾아다녔지만 전시 기간이 아니었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그 두 분의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역시 서예와 회화.
이루 말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서양 회화와 동양 회화는 다른 눈으로 봐야한다.
서양 미학 이론을 통해 동양 미술을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수십번을 읽고 또 읽어도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장파>저의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이라는 책이 지금의 나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동양적인 시선으로 회화를 바라 볼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은 풍경화와 산수화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서양의 풍경화는 이젤과 캔버스 그리고 물감과 붓을 들고 사색을 하는 반면 동양의 산수화
는 화가가 실컷 돌아다니고 실컷 보며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면서 그 면면을 살피고 그렇게
유함하며 충실히 수양을 쌓아 아름다운 산과 강이 가슴속에 역력해지면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와 한 숨에 그려낸다.
이는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초점 투시로 동양의 산수화를 제대로 감상 할 수 없음을 뜻한다.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전시되어있는 산수화 속에 베어있는 화가의 걸음을 따라 걸으며
서예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화동법“
말 그대로 서(書)를 쓰는 필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다.
이는 동양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기도 하다.
서예관에 들어서서 종이 위를 힘차게 날아다니는 “서”를 보며 회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힘을 느낀다.
서양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글씨의 예술적 승화.
온 힘을 다해 가진 모든 것을 불어넣어 한 획 한 획 창조되는 또 다른 세계인 서예.
중봉의 필법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은은한 양감.
그리고 자유분방함 그리고 한 글자를 쓰기 위한 인내의 시간.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지만 잃어버리고 만 그것이리라.
단적인 예로 추사 김정희 선생님께서 20년동안 글 쓰는 것을 연마하며 우연히 완성한 “부작난도”와 30년을 고민하여 완성해낸 추사체의 결정판인 “심계”란 단 두 글자.
과제에 치이고 졸업에 치이고 하며 급하게 급하게 작업을 해나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비록 작가의 신분이 아닌 학생의 신분이라고 하지만 절차탁마의 과정이라는 것이 이렇듯
나를 급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래도 회화관을 둘러보며 그동안 가까이서 보지 못했던 하나의 그림을 발견했다.
변상벽 화백의 “모계영자도”
비단위에 담채로 그려진 기암 앞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어미닭과 아기 병아리들이 있는
따뜻한 그림이다.
멋진 그림과 사랑스러운 그림의 차이가 여기있는 것일까.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내 방에 걸어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은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동글 동글하면서도 따뜻하게 병아리들을 바라보는 어미 닭의 그 눈빛과
그런 어미를 바라보는 천친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빛들.
지렁이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개구쟁이 녀석들도 있고 눈을 발랑 까고 낮잠에 취해버린 녀석, 밥먹을 시간에 지각을 한 듯 종종 걸음으로 어미에게 다가오는 녀석도 있다.
아..이 얼마나 평화로운 오후의 모습인가.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학생과 인솔자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걸까.
인솔자로 보이는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엄마 닭은 누구에게 벌레를 줄까요?”
저마다 다른 대답들이 쏟아져 나온다.
“저기 위에 까만 병아리요”
“노란 병아리요”
과연 그럴까.
물론 그림을 감상함에 있어서 자질 구레한 상식을 다 알고 오는 것도 어찌보면 웃긴일이다.
그저 그림은 가슴으로 보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그림은 참 재미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벌레를 물고 있는 어미닭의 부리 주변에 모여든 병아리들 중에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듯
입을 벌리고 있는 병아리는 단 한 마리도 없다.
무얼 기다리는 것일까.
어미의 눈빛을 또랑 또랑 바라만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듯한 병아리들.
그렇다.
닭은 모성이 아주 살뜰한 동물이어서 곡식 낟알을 하나 주워도 그냥 먹으라도 내던지듯 물려주는 법이 없다고 한다.
자그마한 병아리의 목에 행여 먹이가 걸릴까 자기 입으로 잘게 부수어 먹기 좋게 일일이 흩어준다.
그러니 병아리들이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 어미가 먹이를 흩뿌려 주기를 기다리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이미 밥을 먹은 듯 물 접시 위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병아리 두 마리.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이 그림이다.
재미있다.
이야기 했지만 그림에 그려진 모든 것에 대한 상식을 다 알고 있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알고 듣고 보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깃 거리인가.
아마도 이 절묘한 이야깃 거리가 너무나도 세세하게 그려져 있기에 내가 한국 미술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따뜻한 사유상
두 선생님의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과 나 스스로의 반성을 되새기며 내가 국립 중앙 박물관이라는 곳을 향하게 하는 이유.
단지 하나의 이유인 그 것을 만나기 위해 회화관을 지나 3층 불교 조각관으로 급히 뛰어
올라 갔다.
따로 마련된 전시장 안의 다른 전시장 입구.
어두운 공간.
그리고 은은한 불빛.
그 안에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왼다리 위에 오른 다리를 꼬고 앉아 구름같이 포근해 보이는 볼에 살포시 마주 댄 오른손.
긴장을 늦추지 않는 오른쪽 엄지 발가락과.
나를 내려다보며 너무나도 수줍게 그리고 따뜻하게 미소 짓는 얼굴.
금방이라도 내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나를 안아줄 것만 같은 저 미소.
그 누가 이 미소를 사랑하지 않을까.
“금동 미륵보살 사유상”
국립 중앙 박물관에 들어서면 난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세 시간이건 네 시간이건..
이곳에 앉아 사랑을 느끼고 돌아간다.
내겐 이곳이 중앙 박물관을 존재케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내 손을 뻗어 이 따뜻한 미소를 느낄 수만 있다면..
이것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국보 78호 “일월보관 미륵보살 사유상”이 이것과 교대로
전시되어진다고 한다.
내 눈으로 일월 보관 사유상도 보았지만 이 삼산관 사유상 만큼 단아하고 청초한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수줍은 소녀같은 모습과 어머니의 따뜻함을 가진 미소.
화려하지 않은 보관과 천의를 걸치지 않는 반라의 가녀린 몸통.
그래서 더욱 빛이나는 이 사유상의 단아함.
연화 대좌에 아주 편안하게 걸터앉아있지만 헤아릴 수 없는 그 무게감.
여느 불상과 달리 수인을 하고 있지 않아도 수인이 가진 그 뜻을 모두 가진 사유하는
모습에서 미래불인 미륵보살의 참 모습을 느낀다.
우리나라의 사유상은 그 기원이었던 중국이나 인도와는 다르게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볼에 대고 있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문화이지만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반가”사유상이라는 말은 이 불상이 “가부좌”의 형태가 아닌 변형된 형태의 좌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한쪽 다리를 다른 한쪽에 걸쳐 놓은 형태를 보고 “반가부좌” 라 하여
“반가 사유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완벽한 “반가부좌”의 형태는 아니다.
“반가부좌“ 의 요령은 “결과부좌“와 비슷하지만 발과 다리를 결하는 방법이 틀릴 뿐이다.
우선 오른쪽 발을 몸의 중앙인 샅에 바짝 닿도록 하여 바닥에 놓고 그 다음 발뒤꿈치를 몸 중앙으로 당겨 약간 깔고 앉는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발바닥을 왼쪽 허벅지 밑으로 바짝 붙인다.
그 다음 왼쪽 발을 오른쪽 복숭아 뼈는 겹치지 않도록 하며 양쪽 무릎이 바닥에 닿도록 한다.
소위 말하는 양반다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늘 보아오며 느낀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반가부좌"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생각하기에 편한 자세 그 뿐이다.
내 눈에 비추어진 이 사유상은 “반가부좌”의 형태가 아닌 편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왜 “반가”라는 접두어가 붙게 된 것일까.
그래서 난 “반가 사유상”이 아닌 “사유상”으로 부르길 원한다.
이 곳에서는 서 있을 이유가 없다.
이 사랑스러운 사유상에 조용히 내려다보는 눈 높이에 앉아 살포시 감은 두 눈을 마주보고
앉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유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이 두가지 뿐이다.
나의 고단함과..고민들..그리고 번뇌와 고통까지도 어루만져주는 사유상의 이야기.
내겐 그저 “힘들었지?” 라고 되묻는 이 한마디 뿐이지만 난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늘
이곳에 찾아오곤 한다.
아무런 말없이 몇 시간이고 이 곳에 앉아있어도 전혀 지루함은 느낄 수 없다.
그저 스쳐지나가며 “와!!”라는 감탄사를 내뱉는 것보다 이 곳에 앉아 이 사유상이 가져다주
는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이 사유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아도 보아도 사랑스럽고..그래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삼산관 사유상”의 모습.
이 곳에 들어서면 이 곳을 나갈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붙잡는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내게 주어진 이 사랑의 시간은 한정되어 주어진 것을.
늘 이별하면서도 애틋한 이 사랑 앞에서 어렵게 발 걸음을 돌리며 다음에 다시 만날 순간을
기다린다.
◎용과 도깨비
이제 중앙 박물관을 떠나려는 찰나에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 통일 신라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도 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을까?
구석진 곳에서 어렵게 찾은 그것.
“짐승 무늬 기와”
아래쪽에 부가 설명이 있기를 도깨비 무늬 기와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추녀마루에 쓰던 기와로 구워낸 일반 기와에 녹유를 입혀 광택이 나고 보존력이 좋으며
녹유 특유의 색감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중국에서 파생한 기와문은 우리나라에 와서 발생지보다 더 찬란한 모습을 보인다.
백제의 연화문 수막새나 이와 같은 추녀마루, 더 나아가 산수문전이나 봉화문전 같은 벽돌문까지 말이다.
오래전 일향 강우방 선생님의 저서에서 이 추녀마루 기와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나 역시도 공교육 제도 내에서 “귀면와”로 배워왔던 이것.
그 저서에서는 이것을 “귀면와”가 아닌 “용면와”로 명칭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였을까. 나 역시도 이 추녀마루 기와에 세겨진 이 것이 "도깨비“가 아닌 ”용“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 어머니가 내 옆에서 이 기와를 보여주며 도깨비 기와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 학습되어진 것이 정설이 아니기에 쉽사리 이것은 “용”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더욱 이것이 용이라는 느낌을 더 정당화 하고 싶어서 이 것 앞에 섰다.
이 용면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기한 것을 하나 찾을 수 있다.
바로 머리위에 있는 하트 모양을 뒤집어놓은 모양이다.
이것을 일향 강우방 선생님은 “척목” 즉 흔히 알고 있는 여의주라고 이야기 하셨다.
여기 이 모양을 보아하니 두 개의 척목이 하나의 형상을 한 이면보주인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알기로 용은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지만 기와 같은 한정된 공간 안에 손을 그려 넣기는 힘들 었을테고 그렇다면 입에 물리는 방법이 있다.
종종 입에 여의보주를 물고 있는 기와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은 머리위에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의 사상에서 하늘로 오르는 열쇠가 되는 여의보주는 봉황과 용만이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도깨비라면 여의보주를 가지고 있을 하나의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지나쳤던 옆의 발해관에서 용머리 조각을 본 것이 생각나 그곳으로 향해
그 조각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한참을 둘러보던 중 발해 용머리 조각의 정면을 보는 순간.
난 그 기와의 모습이 용의 모습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해학적이지만 커다랗고 동글 동글한 두 눈. 그리고 주먹만한 코.
나를 향해 일갈 하는 듯한 위엄있는 입과 모습.
틀림 없이 이건 용이다.
그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시도한 적 없는 용의 정면 모습인 것이다.
이렇게 용인 것을 깨닫고 다시 기와를 보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위에 있는 이면보주에서부터 용의 입에서 흩뿌려 나오는 운기당초문.
그리고 머리위에서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기의 무늬까지.
이 얼마나 대단한 통찰력인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용의 정면을 신라인들은 그려낸 것이다.
괴짜같지만 위엄있고 무섭지만 무섭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다.
언젠가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의 기와를 본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도깨비 기와.
그들의 기와문은 진짜 뿔도 달린 도깨비 모양임에 틀림없다.
그 도깨비와 내 앞에 있는 이 도깨비라 불리우던 것은 확연히 다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용”을 신성시하고 우리의 우주관을 드러내는데 이용했다.
비석의 하단부에 있는 거북모양 용, 비석의 이수에 세겨진 용무늬와 대문 문고리에
문고리를 물고 있는 용의 얼굴 그리고 기와까지.
용은 하늘을 뜻하며 동시에 물을 뜻한다.
목재가 주로 건축 자재였던 우리에게 화마를 막는 상징성으로 용의 얼굴을 마무리 작업에
사용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박물관을 나서며..
중앙 박물관에 온다는 건 늘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며 느껴지는 그 힘이라는 것은
그 어떠한 분석적 사고로도 판단 할 수 없는 조형성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가진다.
확고한 사상을 가졌고 그 사상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형상화 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내가 한국인이기에 느끼는 민족적 정서라고 할지라도 우리 전통 문화 예술 속에는 강하게
느껴지는 힘이 내제되어 있다.
항상 새롭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선가 우리는 우리의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창조를 꾀한다는 핑계로
점점 알 수 없는 잡종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역사라고 하는 옛것 가운데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창조물들이 천박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한 채 서양 것을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하고 모방하는데 급급한 까닭이
아닐까.
나 역시도 서양 미술을 배우며 우리 것을 버렸고 잃어버리며 자아와 진리의 좌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이것은 언제 만들어진 무엇이고 어디서 발굴이 됐는가.
이것을 배우는 것은 내게는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의 예술품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것에 대한 조형적 분석이
라던가 세세한 조각 붓 터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담긴 혼인 것을.
아마도 내가 서양 미술사보다 한국 미술사를 사랑하고 갈망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미술사는 대부분이 일본에 의해 밝혀진 것들이 많다.
과연 이것이 진정 우리 문화 예술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 될 수 있을까?
확실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해석되어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사고가 아닌 그들의 사고가 다분히도 뒤섞여 있음은 틀림없다.
나 역시 내가 늘어놓는 이야기들 속에 내 감정들이 많이 섞여있음도 잘 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힘으로 새롭게 봐야할 필요성은 있지 않을까?
언젠가..
어느 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것을 보는 우리 눈초리는 이방인의 눈빛 일 뿐이다. 나는 그 눈빛을 볼 때마다 슬픈
마음이 인다.“
라고 하신 말씀이 또다시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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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카페에 들어와 좋은 글 많이 읽고 가네요..^^
예전 좋으신 분들과 이야기 많이 나누고 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졸업했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에 우리의 것들을 더 잘 알고 재미있게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중앙 박물관 관람 칼럼 비슷하게 적어 봤습니다^^
그림. 혹은 작품 아래에 붙어있는 캡션이 그 작품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지는 못하지요.
그것은 단지 가장 기초적인 그림의 정보만을 이야기 해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깃 거리들을 볼 수 있다면 더 재미있는 미술 감상이 되지 않을까요?
단지 누가 몇년에 어디서 무얼 그렸는지 그리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보다.
어떤 이야기로 이러한 그림들이 그려졌는지를 알고 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제 생각에
같이 즐겨보고자 부족한 글 실력으로 몇 자 적어 봤습니다..^^
첫댓글 그러게요, 쭈욱 읽어내려오면서 미륵보살 사유상이 꼭 있을것 같았거든요. 마음은 비고 얼굴은 고요하며 이마는 너그러운, 깊고 먼 웃음. '사랑스러운' 줄도 모르고 저는 내내 허기졌네요.ㅎㅎ 파랑파람님, 잘 읽었습니다.^^*
파람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엄청 반갑네요 박물관에는 최근에 다녀오신건가요? 금동대향로 진품은 부여에 있잖아요 지난여름에 은석이 데리고 다녀왔는데 여전히 멋지더군요 삼성동 스터디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답니다 (강남경찰서 앞쪽으로 옮겨서요) 바쁘시겠지만 한번쯤 놀러오세요
와~아디님^^ 잘 지내셨어요? 이래 저래 바쁜 척 하느라 다른 것들을 생각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봐요^^ 이제 졸업도 했고...막막하기만 합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한걸요^^
중앙 박물관에 있는 대향로는 복제품이예요^^
"복제품인 이것이 이토록 나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했다면 국립 부여 박물관에 있는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것인가.."ㅋ 오늘 부쩍이나 날씨가 춥네요^^ 늘 건강하셔요^^
좋은 글,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스터디에서 백제의 저 향로 찬찬히 보면서 얼마나 감동했는지요, 우리 도자의 우수함도 요나기 무네요시 등 일본인이 먼저 알았고, 앙드레말로가 '일본이 침몰해도 이것만은 남기고 싶다'라고 했던 일본 '나라'에 있는 백제관음상의 아름다움 또한 그네들이 극찬에 마지 않습니다. 우리것에 대한 바른 시각과 소중함, 고유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인식이 재정비되고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뉘~~ 살아있었던 거야??? 머하느라구 코빼기두 안 보이고~!!!! ㅋㅋㅋ 잘 지내지? 이렇게라두 보니 반갑네... 스터디 한번 나들이 하는게 어때? 월요일 8시 삼성역 탐&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