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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명예회장이 호주 광산주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제선공장 입간판 사진.(1971.7) |
건설비상 현장의 야전사령관
1971년 8월, 박태준 명예회장은 호주에서 원료 구매협상을 마치고 일본에 들렀다.
설비공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미쓰비시상사의 우쓰미 기요시 중공업 담당부장은 포항 열연공장 건설의 기초공사가 3개월 이상 지연되고 있다며, 설비 공급계획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호주로 떠나기 전, 1개월 정도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라고 강력 지시했는데, 3개월이나 지연됐다니….
박태준 명예회장은 반드시 공기를 만회하겠으니 계획대로 설비를 인도하라고 호언하고 급히 귀국했다.
열연공장은 첫 번째로 착공한 시설이었다.
이 공사가 늦어지면 연쇄적으로 다음 공사도 늦어지고, 생산원가가 올라가 가격경쟁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현장에 도착한 박태준 명예회장은 정명식 토건부장과 심인보 건설공정실장에게 보고를 받았다. 우쓰미 부장의 말과 일치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공사진도표를 꼼꼼하게 검토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공사진도표 맨 위에 붉은 펜으로 ‘9월-하루 700입방미터’라는 글씨를 썼다.
“9월에는 무조건 하루 700입방미터씩 콘크리트를 타설하시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타설해온 하루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정 부장과 심 실장은 조심스럽게 “어려울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소. 지금은 비상사태요. 건설비상 말이오. 이것은 공사가 아니라 전투요. 전장에 나선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무조건 이번 전투목표를 달성하도록 하시오.”
건설비상이었다. 24시간 돌관 작업(주야간 공사진행)이 시작됐다. 부소장급 이상 관리자들을 책임자로 하는 팀을 조직하고 교대로 근무, 24시간 내내 작업이 계속됐다. 인근 지역에 있는 레미콘이 모조리 동원됐다. 레미콘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분주히 움직였다.
조명탑의 불은 매일 밤마다 건설현장을 환히 비추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작업복 차림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며 공사를 직접 감독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비옷을 입고 인부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차를 보내 인부들을 데리고 나오게 했다. 그러나 박태준 명예회장은 끝까지 24시간 작업을 밀고 나갔다. 인부들은 현장에서 쓰러져 잠시잠시 눈을 붙였다. 1일 책임량 700㎥를 조금 채우지 못한 감독들의 정기 승급은 일시 중지됐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이곳저곳 점검하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도로 옆에 트럭 몇 대가 일렬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맨 앞차를 들여다 보니 피곤에 지친 운전수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줄줄이 마찬가지였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그들을 흔들어 깨웠다. 안쓰러웠지만, 국가의 장래가 달려 있는 순간이었다.
1971년 10월 31일, 드디어 건설비상 마지막 콘크리트를 쏟아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세’를 불렀다. 해낸 것이다.
건설요원들은 전쟁보다 더한 두 달, 혹독한 순간들을 이겨냈다.
언제나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는 야전사령관, 박태준 명예회장의 지시를 기꺼이 따랐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믿음과 집념은 건설
요원들의 가슴을 불살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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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산한 열연코일에 ‘피와 땀의 결정’이라고 휘호하고 있는 당시 박태준 사장.(1972.10.3) |
제철장학회와 리베이트
1971년 초, 박태준 명예회장은 갑자기 들어온 거금 17만 달러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돈은 그야말로 ‘공돈’이었다. 보험회사의 리베이트였던 것이다. 포항제철은 꽤 비싼 보험에 들어 있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산업재해나 사원 복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출이었다.
그런데 거의 사고가 없이 한 해를 보내자, 보험회사가 사례비를 제공한 것이었다.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까. 박태준 명예회장은 며칠을 고민하다 청와대에 대통령 접견을 신청했다. 그동안 많은 격려와 도움을 준 박정희 대통령에게 갖다드리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을 만난 박태준 명예회장은 호기롭게 수표를 꺼냈다. “각하, 나라를 위해 써주십사 하고 기부금을 좀
가져왔습니다.”
박 대통령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아니, 포철은 정치헌금을 절대로 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태준 명예회장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회사 돈이 아닌 불로소득이니 나라를 위해 써달라고 말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머리를 갸웃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리베이트는 어떻게 해서 생긴 건가?”
보험사고나 보험청구가 없을 때 모든 기업이 이 같은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사실을 안 박 대통령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수표를 도로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돌려주었다.
“성의가 고맙네. 임자의 마음은 알았으니 이 돈은 도로 가져가서 임자 마음대로 쓰게나.”
박태준 명예회장은 몇 번이고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박 대통령은 단호했다.
“포철에 주는 내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가져가.”
회사로 돌아온 박태준 명예회장은 임원회의를 열었다.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회사들처럼 비자금으로 챙겨 두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박태준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 돈은 더 이상 리베이트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의 선물이었다.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게 어떨까?” 박태준 명예회장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주택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고 이제 직원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가장 중요한 사원복지 문제로 떠올라 있었다. 모두들 동의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당장 재단을 설립해 등록시킬 것을 지시했다.
1971년 1월 27일, 재단법인 제철장학회가 설립됐다. 거액의 리베이트를 모든 직원과 함께 나누게 된 셈이었다. 제철장학회는 직원 자녀(2명까지)의 학자금(대학 등록금까지)을 지원해왔다. 또한 산학협동과 직원들의 문화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
한편 리베이트의 존재를 알게 된 박 대통령은 국영기업체들의 임원을 불러 리베이트에 대해 따져 물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
국영기업들은 문제의 발단이 박태준 명예회장에게서 비롯됐음을 알게 됐다.
가뜩이나 미운 털이 박혀 있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들의 음모로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지만,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박태준 명예회장의 청렴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을 맺었다.
불량 콘크리트를 폭파하라
박태준 명예회장은 완벽주의자였다. 허술한 점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제대로 될 때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1977년 여름, 포항 3기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틀이 멀다 하고 현장을 찾아 꼼꼼하게 이곳저곳 둘러보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사항을 지시하곤 했다.
8월 1일 오후, 박태준 명예회장의 승용차가 나타났다. 현장의 건설요원들은 또 한 번 바짝 긴장했다. 발전송풍설비 현장을 돌아보던 박태준 명예회장이 전기실 앞에 멈춰 섰다.
뒤따르던 감독과 슈퍼바이저 무라카미도 함께 멈췄다. 전기실 앞쪽의 철골조 T.C.볼트가 잘 맞지 않아 가볼트 몇 개만 채워 붙여놓은 곳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한참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뭐야?” 지휘봉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감독은 가볼트를 채워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시공회사와 슈퍼바이저의 합의에 따라, 암반까지 파일을 박지 않은 상태에서 겉으로 나와 있는 파일의 길이만 맞춘 채 시공을 계속했던 것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격노해 건축소장을 불렀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대뜸 소장의 정강이부터 걷어찼다.
“네가 소장이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상황이 심각했다. 다음은 감독 차례였다.
“야! 너 학교 어디 나왔어? 너를 지도한 교수는 콘크리트를 저렇게 치라고 가르치더냐?”
그러고는 일본인 슈퍼바이저를 향해 돌아섰다. 한국말과 일본말이 뒤범벅된 질책을 쏟아부었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입을 열었다.“이 콘크리트 당장 폭파해!”
주변의 건설요원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귀를 의심했다. 이미 기초공사는 80% 이상 진척된 상태였다. 폭파라니….
“폭파하고 다시 해! 이렇게 불량하게 제철소를 지어 놓으면 쇳물이 제대로 나올 것 같아?”
박태준 명예회장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콘크리트 굴뚝 속으로 들어가 그곳의 타설 상태도 점검했다. 모든 기초공사 상황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현장을 떠났다. 그날 밤, 포항 건설 현장은 온통 북새통이었다.
형산강 석산 현장에서 폭약을 구해오고 포항경찰서에 폭파허가를 받는가 하면 폭약을 장전하고 폭파기사를 대기시켰다.
8월 2일,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소 내 건설부문 현장소장과 부서장들을 모두 집합시켜 폭파 현장을 견학하도록 했다.
오전 11시.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폭파식이 거행됐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모래와 콘크리트가 뒤엉켜 치솟았다. 부실공사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박태준 명예회장의 단호한 의지를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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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공사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며 박태준 명예회장은 80% 이상 공사가 진행된 발전송풍설비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시켰다.(1977.8.2) |
브로커의 농간과 가택수색
1974년 가을 아침, 아이들만이 남아 있던 박태준 명예회장의 서울 집을 사복형사 두 명이 수색영장을 들고 들이닥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그들이 찾아낸 것은 집문서와 패물, 출장 중 쓰고 남은 외화 몇 푼이 전부였다.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살펴보면 국제 설비 브로커까지 개입한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었다. 제철소 프로젝트와 같은 큰 공사의
경우 막대한 이윤을 놓고 치열한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고, 박태준 명예회장의 가택수색 사건은 그 파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연속주조 설비는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의 푀스트, 스위스 콩캐스트, 독일의 만데스만데마그 등
3개사만이 공급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3개 업체가 참가한 입찰 결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푀스트로 낙찰되었다.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푀스트를 설비 공급자로 지정하고 12월 11일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입찰에 참여했던 콩캐스트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콩캐스트의 배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악명 높은 국제 거간꾼 E가 있었다.
그는 콩캐스트를 부추겨 막강한 국내외 고위관료들과 함께 작전을 개시했다. 정부 요처에 로비활동을 펴는 한편,
중앙정보부와 감사원에 “푀스트보다 싸게 설비를 공급할 수 있다”는 진정서를 돌렸다.
결국 박태준 명예회장은 물론 회사 경영진이 가택수색을 받기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는 종결되었고
뒤늦게 자초지종을 파악한 박정희 대통령이 관련자들을 처리하는 선에서 이 사건은 끝을 맺었지만, 박태준 명예회장에 대한
정치권의 질시와 견제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청결론과 사보기자
박태준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목욕을 하는 등 청결에 아주 민감했다. 당시 우리나라 생활환경 조건에 비추어보자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청결’은 습관 이상이었다. 삶을 꾸려나가는 하나의 가치였다.
1974년의 일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특이한 지시를 내렸다. “모든 사원의 부인들은 반드시 목욕을 하라.”
부인이 깨끗해야 남편이 깨끗하고, 남편이 깨끗해야 공장이 깨끗하고, 공장이 깨끗해야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지시를 받아들였지만, 일부 사원 부인들은 “우린 목욕도 안 하고 사는 줄 아느냐”며 항의를 했다.
사원들 역시 쑥덕거렸다. 한동안 이 문제는 포항제철소의 화젯거리였다.
그해 연말, 사보 <쇳물>은 ‘올해의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부인 목욕령은 세 번째
나쁜 사건으로 뽑혔다. 그리고 목욕령을 풍자하는 기사도 함께 실렸다.
아무도 큰 문제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태준 명예회장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기사를 쓴 홍보실 직원을 임원회의에 참석시켜 큰 소리로 그 기사를 읽게 했다. 직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장의 철학을 비판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사장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는 내용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젊은 직원의 용기와 솔직함을 칭찬했다. 그러고는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몇 시간 동안 ‘목욕철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전혀 의외의 일이었다.
이처럼 청결을 강조하고 실천한 덕분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는 세계 어느 제철소보다 깨끗하고 정돈된 작업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그의 지론처럼, 청결론은 좋은 품질을 생산하고 각종 산업재해를 줄이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감사 합니다.
카페지기
첫댓글 세계가 경탄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과 같은 상식을 초월한 위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요즘은 정치꾼과 장사꾼만 있으니 온 나라가 뒤죽박죽이 되어 편안할 날이 없네요.
이 땅에 제 2의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회장은 없을까요?
자신의 욕심은 뒤로하고 직원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그의 큰뜻이야말로 거인만이 할수있는 것입니다
17만달러를 거절한 박정희대통령이나 그돈으로 자신의 주머니 않채우고 장학재단을 만들어 직원자녀들을
보살핀 박태준이란 사람이나 정말 큰 그릇임에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