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개장터와 쌍계사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었다. 잠결에 아침 일찍부터
걸어서 화개장터를 들러 쌍계사를 돌아보고 가능한 평사리까지 걸을 계획이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
났지만 일어나자마자 나는 내 허벅지와 종아리가 편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10여 년 전,
그 때 이 계획을 진행할 것을 하는 후회가 일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그조차 안 될 것이라는 판단
으로 격려하면서 떠난 길인데 모텔을 나서면서 나는 더 이상 걷는 다는 것이 내 몸에 맞지 않는 것
이라고 결정을 하고 만다.
구례 버스 터미널로 갔다. 잘 정돈된 도로와 중앙분리대를 꽃밭으로 가꾸어 놓은 것이 너무 좋게 보
인다. 수도권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그런지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해본다. 터미널은 도시의
각진 건물과 달랐다. 한옥을 형상화해서 지었고 버스 승강장의 안내등도 예스러움이 들어나게 설치해
놓았다.
화개장터는 버스로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화개장터 터미널에 내리면서 처음 느낀 것은 내 어릴 적 장
터와는 사뭇 달랐다. 아니 장터가 없는 것 같은,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화개 시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곳은 장터가 아니었고 도로 양편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들은 거의 식당이었다. 하긴 식
당의 여주인 말처럼 지금은 조영남씨가 노래한 정도의 장은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화개 파출소 소장의 이름이 조영남이라고 한다. 조선일보에도 소개되어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는데,
서둘러 화개로 갔다. 그 유명한 조영남씨의 화개장터라는 노래도 그렇지만 당시 화개 파출소의 소장
이름도 조영남씨라고 소문난 곳,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는 곳이기도 했지만, 오늘 중으로 화개 장
터와 토지의 평사리를 들러 하동까지 가야하는 일정 때문이었다. 화개장터, 말 그대로 시골의 장터일
뿐이었지만 노래가 주는 의미 때문인지 새롭게 느껴지는 장터였다. 하지만 나는 장터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장터 주변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아침이라고 해도 내 식사 시간은 다른 이들의 새참 시간정도 일 것이다.)
눈에 뜨이는 식당으로 갔다. 시골 식당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듯, 역시 세월의 이끼가 묻어있는 건
물의 식당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 분이 혼자 운영하는 식당으로 보였다. 내가 제첩국과 소주 한 병을 시키자 주인 여자
가 상을 차려 내 앞에 내려놓다가 내 가방을 보면서 묻는다. “여행하시나보지요?.” 나는 “네”라고 대답
하자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다시 묻는다. “아!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주인이 다시 말한다. “시인
이신가 보네요, 남편이 시를 좋아하는데,”하더니 참!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동아리에 막걸리를 담아 내
앞에 놓으며 "어제가 제사여서 술을 빗었는데, 제사에 쓰고 남은 술"이라며 웃는다. 반찬이 깔끔하고 맛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은 개인택시 운전을 하고 식당은 자신이 운영하는데, 택시로 많이 벌었지만 사람이
좋아서 여러 번 당하고 그래서 사는 것이 녹녹치 않다고 말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중에 남편 되는 분이 들어온다. 택시 운전을 하시는 분인데 잠시 쉴 겸 들어오셨다
고 하더니, 부인이 내가 시인이라고 하니 선 듯 일어나 안에서 백지 한 장을 들고 나와 사인을 해 달란다.
무안하게 되었다. 이름도 없는 뜨내기 시인인 내게 사인을 부탁하신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제야 나는
식당 벽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많은 분들의 사인지를 보았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