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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 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글자 한 글자 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법[佛敎]은 베푸는 일이고, 나누는 일이고, 보시하는 일이고, 회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수승한 보시가 되겠습니까?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훌륭한 공덕의 과보를 얻겠습니까?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음을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셨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입니다.
부디 온 세상에 화엄경이 있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공덕으로 회향합시다.
화엄경이 세상에 있음을 알리는 훌륭한 보시로써 복을 짓고 공덕을 닦읍시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보물로써 무한보시를 실천하는 공덕을 닦는 보살이 됩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오다.
인생은 오직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수승한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화엄경부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공덕으로 회향하는 일입니다.
2015년 5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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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향 품이 워낙 긴 품이 돼서
여섯 번째 권이 되겠습니다. 이 서문 안에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오다.
이것은 신라 때 양지스님이 장육사를 창건하시면서,
신도들이 많이 모여서 울력을 하는데,
그때 전부 노동으로 흙을 나르고ㆍ돌을 나르고ㆍ
기왓장을 나르고ㆍ석가래를 나르고 하는 일이
전부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어깨에 매고
그렇게 울력에 의해서 절이 지어졌습니다.
그때 양지스님께서 鄕歌(향가)를 지어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울력하는데 힘 덜 들게 하고,
신심도 나게 하고, ‘즐겁게 불사를 하자.’하는 뜻에서
그때 지어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향가입니다.
이것은 신라의 그 아름다운 음악,
불과 몇 편 안되는 향가 가운데 들어있는
아주 짧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낱말이 불과
1 오다. 2 서럽더라. 3 우리. 4 공덕. 5 닦다.
이것뿐입니다. 다섯 낱말뿐입니다.
다섯 낱말 가지고 ‘인생은, 인생현실은 어떤 것인가?’
또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인생사에 대한 그런 아주 요긴한 문제를
다섯 낱말에 다 담아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여기 처음에 오다ㆍ오다ㆍ오다는
삼세 : 과거ㆍ현재ㆍ미래. 우리는 끝없이 오고,
와서 또 오고, 앞으로도 계속 올 것이다.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오다ㆍ오다ㆍ오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와보니 어때요?
인생은 苦海(고해)다, 火宅(고해)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는 서럽더라 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오다ㆍ서럽더라 와보니 인생은 苦海요 火宅이더라.
누구 없이 다 그렇지요. 그래서 서럽더라. 우리네여
어떤 팔자 사나운 옛사람만 인생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공히 苦海요 火宅이다. 그래서
우리네여 라고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런 苦海요 火宅에 와서
이렇게 사는데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가?
공덕 닦으러오다.
‘공덕 닦는 일밖에 달리 다른 것 없다.’
그 절, 불사 할 때 흙을 나르고ㆍ돌을 나르고ㆍ
기왓장을 나르고ㆍ나무토막을 나르면서
아주 부르기 좋은 노래입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잖아요.
노동요는 이렇게 단순해야 됩니다.
복잡하면 외우기 힘들잖아요.
단순한 것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그
깊은 뜻이 마음속에 젖어 들어서
인생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마음에 다지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 평소에 참 좋아해서 마침
여기 실을 기회가 돼서 이렇게 서문에 인용을 했습니다.
아무튼 28권까지 벌써 이렇게 돌아왔는데요.
앞으로 보현행원품까지 하면 53권이 남았습니다.
세월 참 잘 갑니다.
53권 해봐야 5년도 채 안 남았습니다.
오늘 공부는 152쪽 중간 단락
功德修行과 衆生이라고 하는 단락부터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이 어느새 스물여덟 번째 권이 나왔다.
서문을 한 번 읽는 것으로 점안식을 대신하겠다.
서문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법[佛敎]은 베푸는 일이고, 나누는 일이고,
보시하는 일이고, 회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수승한 보시가 되겠습니까?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훌륭한 공덕의 과보를 얻겠습니까?
여래께서 세상에 출연하셨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음을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셨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입니다.
부디 온 세상에 화엄경이 있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공덕으로 회향합시다.
화엄경이 세상에 있음을 알리는 훌륭한 보시로써
복을 짓고 공덕을 닦읍시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보물로써
무한보시를 실천하는 공덕을 닦는 보살이 됩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인생은 오직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수승한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화엄경 부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 공덕으로 회향하는 일입니다.
2015년 5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십회향품이 워낙 긴 품이다.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집의 회향품만 벌써 여섯 권째다.
서문에는 ‘오다 오다 오다’라고 하는 향가를 실었다.
신라향가는 아름다운 문학인데 불과 몇 편 전해지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이 향가는 장육사를 창건할 때 양지스님이 지은 짧은 향가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지으려고 맨손 맨 어깨로 울력을 나왔다.
흙과 돌과 기왓장과 목재와 서까래를 나르면서
‘오다’‘서럽더라’‘우리’‘공덕’‘닦다’ 라고 하는 불과 다섯 낱말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노래를 불렀다. 단순하지만 이 노래 속에는 인생의 현실과
그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가가 다 나와있다.
양지스님이 장육사 불사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지었다.
울력하는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힘도 덜 들고 신심도 나고 즐겁게 불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구절인 ‘오다 오다 오다’라는 말에는
우리의 삶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끝없이 왔었고 오고 올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게 와보니 인생은 고해이고 화택이다.
그것을 ‘서럽더라’라고 표현했다.
‘오다 서럽더라’ 와보니 인생이 고해이고 화택인 것은
팔자 사나운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 없이 그의 인생은 고해이고 화택이다.
그래서 ‘서럽더라 우리네여’라고 하였다.
이 힘든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가?
‘공덕 닦으러 오다’ 공덕을 닦는 일 밖에 달리 다른 것이 없다.
단순한 이 노래를 반복하다 보면 그 깊은 뜻이 마음에 젖어 들고,
인생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다져진다.
나는 평소에 이 향가를 참 좋아한다.
마침 기회가 되어서 오늘 받은 강설집의 서문에 인용했다.
대방광불화엄경강설이 벌써 28권까지 나왔으니
이제 보현행원품까지 하면 앞으로 53권만이 남았다.
53권이라고 해도 5년도 채 안남았다. 세월이 잘 간다.
오늘 공부는 152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공덕수행과 중생이라고 하는 단락부터 할 차례다.
십회향품 중에 제2 불괴회향, 무너지지 않는 회향에 대한 내용을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회향의 원형이라고 볼 수가 있다.
지난 시간에 ‘아승지’라는 낱말을 붙여서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는 부분을 우리가 함께 읽고 넘어갔다.
그와 같은 많은 공양거리로 공양했다는 내용이었다.
(5) 功德修行과 衆生
如是修集無量功德이
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無有退轉하며
無有休息하며 無有疲厭하며
無有執着하야 離諸心想하며
無有依止하야 永絶所依하며
遠離於我와 及以我所하고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하며
得法無生하야 住佛所住하며
觀無生性하야 印諸境界일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닦는 것은
일체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퇴전하지도 않고 쉬는 일도 없고 고달픈 마음도 없으며,
집착함이 없어 모든 생각을 여의었으며,
의지함이 없어 의지할 바를 영원히 끊었으며,
나와 내것을 멀리 여의고,
실제와 같은 법인으로 모든 업의 문을 인(印)하며,
법이 생멸이 없음을 얻어
부처님이 머무시는 데 머물며
남[生]이 없는 성품을 관찰하여 모든 경계를 인치(引致)었다."
功德修行과 衆生(공덕수행중생).
이것이 역시 십회향품 내용입니다.
십회향품 내용인데 第二不壞廻向(제이불괴회향).
무너지지 않는 회향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경문에서,
화엄경경문에서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그 내용.
그야말로 ‘회향의 원형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앞에 온갖 공양으로 공양하는데요.
모두 앞에 아승지ㆍ아승지ㆍ아승지가 붙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합독을 했지요.
함께 우리가 같이 읽어서 넘긴 그런 부분입니다.
그와 같은 많은 공양거리로 공양했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있었고요. 그런 공경공양과 중생에 대한
그런 앞의 내용에 이어서 功德修行과 衆生.
如是修集無量功德(여시수집무량공덕)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修集한 것이,
皆爲成熟一切衆生(개위성숙일체중생)하야,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 오다ㆍ오다ㆍ오다 하는
향가에서도 보았듯이 모두가
일체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일.
그것이 바로 ‘공덕을 닦는 일이다.’ 그런 뜻입니다.
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無有退轉(무유퇴전)하며,
한 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ㆍ끝없이,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공덕을 닦는 일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退轉함이 없다. 이 말입니다.
無有休息(무유휴식)하며, 쉬지도 아니하고,
無有疲厭(무유피염)하며,
피곤해하거나 싫증내는 일 없으며,
無有執着(무유집착)하야,
그렇게 우리가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고 해서,
‘아 내가 했네.’하는 그런 상을 내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바로 부작용이 일어나고
공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無有執着. 집착이 없어서,
離諸心想(이제심상)하며,
모든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떠나며,
無有依止(무유의지)하야, 거기에,
닦은 공덕에 의지하는 바도 없어서
永絶所依(영절소의)하며,
의지하는 바를 영원히 끊으며,
遠離於我(원리어아)와 及以我所(급이아소)하고,
중요한 말이지요. 나와 나의 것.
중생들의 병은 바로 이 두 마디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 아집이지요. 我執(아집).
그리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我執에서 나온 것입니다. 我所. 我와 我所.
←이것은 소승 교리나 대승 교리나 끊임없이
중생의 병통을 이야기할 때 따라다니는 낱말입니다.
그렇지요. ‘나’ 라고 하는 것,
‘나’ 중심으로 생각 하는 것,
소위 Ego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사람이 어디 그것뿐입니까?
내면에 무한 광대한 참 나의 세계가 있고,
차별 없는 참사람, 제가 강의 할 때마다 늘
근본종지로써 차별 없는 참사람을 말씀드리는데요.
그 차별 없는 참사람의 무한 광대한
진여불성의 세계가 있는데요.
조그맣게 졸아들어서 我와 我所 =
나와 나의 것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나의 전부 인냥
그렇게 생각 하는 것, ←이것이 중생의 병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我와 我所를 멀리 떠나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
如實法印(여실법인)으로 印諸業門(인제업문)하며,
그랬습니다. 그것 줄 그어야 됩니다.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 그랬습니다.
如實法印이 뭡니까?
참 나의 세계 = 진여자성의 도장으로, 그렇습니다.
진여자성의 도장으로 諸業門에 도장 찍는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我와 我所로 살아갑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부 我와 我所ㆍ我執.
←이것 하나로 나의 전부인냥 하고 살아가는데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참 나의 세계 = 차별 없는 참사람 = 無位眞人의 세계.
←이것이 뭡니까? 如實法印입니다.
그것으로써 印諸業門이라고 하는 것은
我와 我所로 살아가는 그 업 덩어리입니다.
순전히 我와 我所로써 업을 짓는데요.
이 我와 我所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我와 我所도 하나의 진여불성
= 차별 없는 참사람의 작용이다.’
이렇게 알면 문제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我와 我所를 떠나서
참 나의 삶을 펼치지 못합니다.
眼耳鼻舌身意 6근 가지고 법문하고,
眼耳鼻舌身意 6근 가지고 지혜를 작용하고,
말하자면 자비를 실천하고 그랬습니다.
그것 떠나서는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이 전부 ‘참 나의 한 작용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좋은 겁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
그것입니다. 諸業門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업의 문.
모든 업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我와 我所입니다.
그런데 그 我와 我所, 우리 我執을,
아집의 삶을 아집의 삶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차별 없는 참사람의 도장으로 말하자면,
찍어야 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금을 가지고, 예를 들자면,
이것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서 그렇습니다.
금을 가지고 여러 가지 불상도 만들고, 비녀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고, 무슨 코끼리도 만들고, 사자도 만들고,
칼도 만들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놨는데요.
我와 我所의 입장에서는 모양만 보는 겁니다.
‘아 저것은 불상이다. 아 저것은 비녀다. 반지다.
시계다. 저것은 칼이다.’
아니면 ‘코끼리다. 사자다.’ 모양만 보는 겁니다.
모양만 보는 입장은 我와 我所, 아집의 입장만...
우리 보통 그동안 살아온 중생들의 삶의 모습이고요.
그것이 모양에 그치지 아니하고,
‘금부처다. 금비녀다. 금시계다.’
전부 ‘금이다.’ 라고 하는 사실로 이해해버리면
금부처님도 금값이고,
금으로 사자를 만들어도 금값이고,
금으로 코끼리를 만들어도 금값이고,
그때는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냥 뭉쳐놔도, 금괴로 그냥 놔둬도 역시 금입니다.
아무 허물이 없습니다. 불상 만들었다고 값이 더나가고,
금괴로 그냥 뒀다고 값이 덜나가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집으로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전부 우리 참 마음의 현현이다. 참 마음의 작용이다.
전부가 금으로 만든 그런 내용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印諸業門입니다. 如實法印으로써,
“여실한 진리의 도장으로써 업 문에 도장 찍는다.
모든 업의 문에 도장 찍는다.” 하는 말은 그 말입니다.
어떤 모양도 전부 금으로 본다.
우리 점안할 때 서두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게송 있지 않습니까?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
전단나무 가지고 중생모습도 짓고, 부처님모습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다 만들어요. 여러 가지를 다 만들어 놨지만,
그것 뭡니까? 낱낱이 다 전단향기가 난다. 뭘 만들어도...
전단나무를 가지고 불상을 만들고 그 자른 토막,
나머지 버려놓은 그 토막도 전단나무이기 때문에
역시 전단향기가 나는 겁니다.
보살상을 만들었든ㆍ불상을 만들었든ㆍ나한상을 만들었든 전부 전단나무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전단향기가 난다. 바로 그 이치입니다. 불상으로 보거나,
보살상으로 보거나 그런 이치가 아니고,
전단나무로 보는 겁니다. 그 형상을 통해서 진실한
전단의 향기를 맡는 안목.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안할 때 형상을 만들었든ㆍ
그림을 그려놨든ㆍ뭘로 해놨어도,
아무리 그림을 그릴 줄 모른 사람이
형편없는 그림을 그려 놨다하더라도 불상을 그렸으면
‘그대로 부처님으로 봐라.’이 말입니다.
그대로 부처님으로 봐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인겁니다.
나무로 만들었든 뭘 로 만들었든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면 부처님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집의 삶도,
我와 我所에 집착하는 아집의 삶도
如實法印으로 모두가 우리 참 마음의 현현이다.
참 마음의 한 작용이다. ←이렇게 봐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래서 得法無生(득법무생)하야,
법이 생함이 없음을, 생멸이 없음을 얻어서
住佛所住(주불소주)하며,
부처님이 머무는 바에 머문다.
그럼 부처님경지하고 똑 같은 겁니다.
똑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부처님도 역시 똑 같은 삶을 살아가고,
보살들도 똑 같은 삶을 살고, 선지식들도,
조사들도 똑 같은 삶을 삽니다.
잠자고, 眼耳鼻舌身意가 있어서 먹어줘야 되고,
잠자줘야 되고, 입혀줘야 되고,
씻겨줘야 되고 똑 같습니다.
저~ 불보살에서부터 온갖 조사가 똑 같습니다.
우리하고 똑 같은 생활을 합니다.
왜냐? 眼耳鼻舌身意 6근을 가지고 살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하게 6근이라고 하는 아집에,
아집이라고 하는 한계에 갇혀 있느냐?
아니면 그것의 모두가 진여자성의 현현이다.
진여불성의현현이다. 라고 이렇게 보느냐? 하는
단 그 차이일 뿐입니다. 그 차이일 뿐이지요.
그래서 住佛所住입니다.
부처님이 住하는 바에 머문다.
觀無生性(관무생성)하야,
생멸이 없는 성품을 관찰해서,
印諸境界(인제경계)일새. 모든 경계를,
생멸이 없는 성품은 뭡니까?
그것은 진여불성자리지요.
참마음자리 = 차별 없는 참사람자리고요.
바로 그것을 관찰해서 모든 경계에 印친다
= 도장 찍는다. 이것은 새기기를
옛날부터 印친다 그랬습니다. 모든 경계에 도장 찍는다.
‘아! 전단나무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像을 만들다가 버렸든지 말았든지
전부가 다 전단나무이고, 전단향기가 난다.’
금을 가지고 금괴로 놔둬도 금이고,
무슨 칼을 만들어도 금이고, 창을 만들어도 금이고,
불상을 만들어도 금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이 부처님이다.
“당신은 부처님” 이런 말을 곧잘 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해야, 꼭 불상을 만들어야만
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해야, 착한 일을 해야만
부처라는 뜻이 아닙니다. 금을 가지고 칼을 만들든ㆍ
창을 만들든 역시 금입니다. 금 칼이고ㆍ금창이라고요.
우리가 이 五蘊(오온)을 가지고 살면,
나쁜 일도 할 수가 있고, 좋은 일도 할 수가 있고,
병도 들 수가 있고, 늙을 수도 있고,
별별 상황이 다 벌어집니다.
그래도 ‘그대로가 다 부처의 삶이다.’하는 것입니다.
善惡(선악)하고 관계없는 차원입니다.
善惡가지고 ‘부처의 경지다ㆍ아니다.’라고
이렇게 말하기로 하면 이것은 답이 없습니다.
답이 없어요.
부처님도 병들고 이 몸뚱이 가지고,
결국은 이 몸 버려야 할 때가 오고 그랬잖아요.
善惡이 관계없는 겁니다.
부처라고 하는 그 경지는
善惡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참사람자리이고ㆍ참마음자리이고ㆍ
참 나의자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말이 그 말입니다.
이것 아주 중요한 대목이잖아요.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하며, 모든 업의 문에,
6근ㆍ6진으로써 짓는 업의 문에 印친다. 그리고
法의 無生함을 얻어서 부처님이 머무는 바에 머문다.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간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선한 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화장실을 가든지,
법당에 가서 예배를 하든지 아무 관계없이 그대로
부처의 현현이고ㆍ부처의 작용이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그 자리를 보고
사람이 부처님이다.하는 것이고,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지,
善惡. 선한 일 많이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고,
악한 일 많이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아니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그런 차원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런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불교가
시중에는 아주 많잖아요.
그런 차원의 불교가 시중에는 아주 많습니다.
觀無生性하야, 이것 같은 말이지요.
생멸이 없는 성품 = 참 나 = 불생불멸의 참 나.
그것을 관해서, 印諸境界라. 모든 경계.
오온ㆍ6근ㆍ6진의 아집과
我와 我所 아집의 그런 경계를 도장 찍는다
= 印친다. 그 말입니다.
칼을 만들었든지ㆍ창을 만들었든지 다 금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불법에는 이런 이치가 있습니다.
아주 대단한 이치입니다.
그것 뭐, 그야말로 3 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느니,
선한 일을 많이 해야 된다느니,
공덕만 많이 닦아야 된다느니,
그것은, 물론 그런 차원도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3아승지겁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것은 3아승지겁 가지고도 안돼요.
증도가에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가?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베푼다.ㆍ수행을 한다.ㆍ
참선을 한다.ㆍ3 아승지 겁을 닦는다.
그렇게 해서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그것 가지고는 이뤄질 기약이 없다하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아주 너무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
공덕수행(功德修行)과 중생(衆生) :
공덕을 닦는 일은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함이다
*
여시수집무량공덕(如是修集無量功德)이 :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수집한 것이
개위성숙일체중생(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일이다.
‘오다오다오다’ 하는 향가에서 보았듯이
그 모두가 바로 공덕을 닦는 일이어서
무유퇴전(無有退轉)하며 : 퇴전함이 없다.
인생에서 한 번만이 아니고 끝없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공덕 닦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퇴전함이 없으며
무유휴식(無有休息)하며 : 쉬지도 아니하고
무유피렴(無有疲厭)하며 : 피곤해 하거나 싫증내는 일 없으며
무유집착(無有執着)하야 : 집착이 없다.
그렇게 우리가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고 해서
‘내가 했네’ 하는 상(相)을 내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바로 부작용이 일어나고 공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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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심상(離諸心想)하며 : 모든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떠나며
무유의지(無有依止)하야 : 닦은 공덕에 의지하는 바도 없어서
영절소의(永絶所依)하며 : 영원히 의지하는 바를 끊으며
원리어아(遠離於我)와 : 나와
급이아소(及以我所)하고 : 나의 것을 멀리 떠난다.
중요한 말이 나왔다. ‘원리어아 급이아소’
아와 아소는 소승교리, 대승교리 할 것 없이
중생의 병통을 말할 때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말이다.
중생들의 병이 바로 이 두 마디 말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아집이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다.
소위 에고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의 내면에 무한광대한 참나의 세계가 있다.
나는 강의를 할 때마다 근본종지로서
‘차별없는 참사람’을 이야기 해왔다.
우리에게는 차별없는 참사람의 무한광대한 진여불성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자주 잊고서 그만 조그맣게 쫄아들어서
나와 나의 것에만 집착을 하고
그것만이 나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것이 중생의 병이다.
그것을 여기 잘 지적하고 있다. 아와 아소를 멀리 떠나고 어떻게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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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법인(如實法印)으로 : 참나의 세계, 진여자성의 도장으로
인제업문(印諸業門)하며 :
모든 업의 문에 도장을 찍는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어야 된다.
여실법인으로 인제업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아(我)와 아소(我所)로 자기의 전부인양 살아간다.
그런데 그 아와 아소도 하나의 진여불성, 차별없는 참사람의 작용이다
참나의 세계, 차별없는 참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세계가
여실법인인데 이 여실한 법의 도장으로
모든 업덩어리인 제업문에 도장을 찍는다.
우리의 삶은 아와 아소를 떠날 수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가지고 법문하고,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가지고 지혜를 작용하고, 자비를 실천한다. 어떻게 할 길이 없이 순전히 아와 아소로서 업을 짓는다. 부처님도 아와 아소를 떠나서 참나의 삶을 펼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와 아소가 다 참나의 한 작용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여실법인(如實法印)으로 인제업문(印諸業門)’이다.
아와 아소 아집의 삶이 제업문인데
그 모두에 차별없는 참사람의 도장을 찍어야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이를테면 금을 가지고 불상이나 비녀나 반지, 코끼리, 사자, 칼 등등
온갖 것을 만들었다.
이것을 아와 아소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양만 보아서
‘저것은 불상이고, 저것은 비녀고, 반지이고 시계다’‘저것은 칼이다’
아니면 ‘코끼리다 사자다’라고 한다. 그런 것이 보통 우리가 살아온
중생의 삶의 모습이다. 모양만을 보는 아와 아소 아집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 모양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금부처, 금비녀, 금시계이므로
‘전부 금이다’라고 이해한다면 금부처님도 금값이고
금사자도 금코끼리도 그냥 금궤로써 뭉쳐놓은 것도 역시 금이다.
여러 가지 모양이 다르다한들 아무런 문제도 안되고 허물도 없다.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값이 더 나가고
그냥 금궤로 두었다고 해서 값이 덜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집으로써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전부 우리 참마음의 현현이고 참마음의 작용이고
전부 금으로 만든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여실법인(如實法印)인제업문(印諸業門)’이다.
여실한 진리의 도장으로써 모든 업의 문에 도장을 찍는 것이다.
금으로 만든 것은 어떤 모양도 전부 금으로 보는 것이다.
불사를 하면서 점안할 때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은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급여비구보살형(及與比丘菩薩形)’이다
전단나무로 중생 모습도 짓고 부처님 모습도 만들고
불상 모습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다 만들어놨지만
그 낱낱에서 다 전단향기가 난다는 말씀이다.
전단 나무를 가지고 만들었다면 보살상을 만들었든 불상을 만들었든
나한상을 만들었든 전부 전단 향기가 난다.
심지어 자투리로 버려놓은 나무토막에서도 역시 전단 향기가 난다.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재료인 전단나무로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점안할 때 이 게송을 외우는 것은
아무리 그림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이 형편없는 그림을 그려놨다 하더라도
불상을 그렸으면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라는 뜻이다.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아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부처님이다.
나무로 만들었든 뭘로 만들었든 부처님으로 본다면 그대로 부처님이다.
아와 아소에만 집착하는 아집의 우리들 삶도
여실법인으로 모두가 참마음의 현현이다.
참마음의 한 작용이다. 그렇게 보아버리면 아무 문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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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법무생(得法無生)하야 : 법이 생멸이 없음을 얻어서
주불소주(住佛所住)하며 :
부처님의 머무는 바에 머문다. 그러면 부처님 경지와 똑같다.
불보살이나 온갖 조사가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한다.
부처님도 보살들도 선지식이나 조사들도 안이비설신의가 있어서
먹어줘야 되고 잠을 자줘야 되고 입혀줘야 되고 씻겨 줘야 된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가지고 살면 어쩔 수가 없다.
모두가 똑같이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단지 우리와 불보살의 차이는
‘육근이나 아집이라고 하는 한계에만 갇혀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진여자성의 현현, 진여불성의 현현이다 라고
보는가’ 하는 차이다.
그래서 주불소주다. 부처님이 주하는 바에 머문다.
관무생성(觀無生性)하야 : 생멸이 없는 성품을 관찰해서
인제경계(印諸境界)일새 : 모든 경계를 도장찍는다.
생멸이 없는 성품이 바로 진여불성자리고 참마음자리고
차별없는 참사람자리다. 바로 그것을 관찰해서 모든 경계에
‘인친다’ 도장 찍는다는 것을
새기기를 옛날부터 ‘인친다’라고 하였다. 모든 경계에 도장 찍는다.
전단나무를 가지고 만들었다면 상을 만들다가 버렸든지 말았든지
전부가 전단나무고 전단나무 의 향기가 난다.
금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금궤로 놔둬도 금이고 칼이나 창을 만들어도
금이고 불상을 만들어도 금이다.
내가 ‘당신은 부처님’‘사람이 부처님이다’라는 말을
곧잘 하는 근거 역시 여기 있다.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야만 꼭 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듯,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해야만 부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금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칼을 만들든 창을 만들든 역시 금이다.
우리가 이 오온을 가지고 살면 나쁜 일도 할 수가 있고,
좋은 일도 할 수가 있고, 병도 들 수가 있고,
늙을 수도 있고 별별 상황이 다 벌어진다.
그래도 사람은 그대로가 다 부처의 삶이다.
선악과는 관계가 없는 차원이다.
선악을 가지고 부처의 경지다 아니다 라고 말하기로 한다면 답이 없다.
몸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부처님도 병이 들고
결국은 그 몸을 버려야 할 때가 왔었다.
선악과는 관계가 없다.
부처라고 하는 경지는 선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참사람자리고 참마음자리고 참나의 자리이다.
‘생멸이 없는 성품을 관찰해서 모든 경계를 도장찍는다’라고 하는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이다.
육근, 육진으로써 짓는 모든 업의 문에 인친다.
그리고 법의 무생함을 얻어서 부처님이 머무는 바에 머문다.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간다.
선한 일 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화장실을 가든지
법당에 가서 예배를 하든지 아무 관계없이
그대로 부처의 현현이고 부처의 작용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답이 나온다.
그 자리를 보고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것이고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고 악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아니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차원, 그런 수준으로 이야기 하는 불교가 시중에는 아주 많다.
그야말로 삼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느니 선한 일을 많이 해야된다느니
공덕만 많이 닦아야 된다든지 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삼아승지겁을 가지고도 안된다.
증도가에 ‘구불시공조만성(求佛施功早晩成)가,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베풀고,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하고,
삼아승지겁을 닦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으로는 부처가 이루어질 기약이 없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나왔다.
생멸이 없는 성품, 참나를 관해서
모든 아집과 아와 아소의 경계를 도장 찍는다는 것이 그런 말이다.
금으로 만들었다면 그 무엇을 만들었든지 금이다.
불법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 아주 대단한 이치다.
첫댓글 공덕수행(功德修行)과 중생(衆生) :
공덕을 닦는 일은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함이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