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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 알레시 드 토크빌(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1856년작)
서론
-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둘로 잘라 내어 그때까지의 모습과 앞으로의 모습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심연을 가로놓기 위해, 가장 위대한 시도를 1789년에 보여 주었다.
- 그들은 과거의 잔재를 새로운 조건 속에 들여놓지 않기 위하여 온갖 예방책을 강구했으며, 자신들의 조상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위해 여러 조치들 마련하고, 이전 모습을 지워 버리기 위해 온갖 노력.
- 그러나 프랑스인들의 이 유별난 시도는 스스로 믿었던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앙시앵 레짐을 파괴하도록 대혁명을 이끌어 나간 감정과 습성, 이념들마저 앙시앵 레짐에서 물려받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은 앙시앵 레짐의 파편들을 이용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했던 것.
- 연구를 진행하면서 오늘날 프랑스에 나타나는 많은 특징들이 이 시기 프랑스에서도 매순간 눈에 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당시에 사람들은 내가 대혁명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던 많은 감정들, 대혁명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생각했던 많은 관념들, 그리고 대혁명만이 가져다줄 수 있다고 간주되던 많은 습성들을 이미 간직하고 있었다.
- 1789년 당시 프랑스인들의 마음속에는 평등에 대한 애착, 자유에 대한 애착이 넘쳐흘렀고, 그들은 민주 제도와 자유 제도를 세웠으며, 특권을 폐지했고 권리들을 인정하고 존중. 고귀하고 진솔한 열정이 넘쳐흐른 이 시대는 몇몇 결함에도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며, 국민을 타락시키고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의 잠을 오랫동안 방해할 것이다.
- 나는 혁명 과정을 신속하게 추적해 가면서 어떤 사건이나 결함 때문에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의 애초 목표에서 벗어나 자유에 등을 돌린 채 단지 세계 지배자의 평등한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데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 새로운 사회가 이전 사회와 어떤 면에서 유사하고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이 거대한 격변 속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 신분 질서, 계급, 직종조합, 가족 따위의 낡은 유대가 더 이상 개인들의 결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개별 이익에만 전적으로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공적 미덕이 질식당한 협소한 개인주의 속으로 칩거해 버리는 것이다. 전제주의는 모든 공통된 열정과 상호 이해의 필요와 공동 행동의 기회를 시민에게서 앗아 감으로써 그것에 저항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제주의는 공적 미덕들을 사생활 속에 가두어 버린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서는 안정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누구나 몰락의 두려움과 상승의 욕구에 따라 끊임없이 동요하게 된다. 그리고 금전이 인간의 유일한 가치척도가 되어 버릴 뿐만 아니라, 누구나 금전을 보존하거나 취득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열정들을 조장하고 널리 유포하는 것이 바로 전제주의의 본질이다.
- 반면에 자유만이 이러한 사회에 내재한 악덕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 사실상 자유만이 시민을 고립상태에서 끄집어내 서로 접촉하도록 이끌어 준다.
자유만이 금전에 대한 숭배와 잡다한 개인사에서 시민을 구해 낼 수 있다. 자유만이 때때로 안락에 대한 애착을 더 강렬하고 더 고상한 열정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부의 획득을 넘어선 숭고한 목적들에 대한 야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인간의 미덕과 악덕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빛을 제공할 수 있다.
제1부
1장 대혁명 발생시 상충된 판단들
- 가까이서 보는 것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반드시 사건을 더 잘 관찰하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프랑스 국내에서 사람들은 대혁명 발발하기 직전에조차 여전히 혁명의 방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대혁명이 국경을 넘어 자신도 모르는 전대미문의 방법과 전술과 위협적인 가치를 가지고 제국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왕권을 타도하며 인민을 유린하면서도 정말 기이하게도 인민을 자신의 대의에 끌어들이는 가공함 힘을 과시.
- 어떤 이들은, 멈추게 할 수도 스스로 멈출 수도 없는 이 미지의 힘이 결국은 인간 사회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 반면 다른 이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면모를 일신하고 일종의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게 될 신의 은총을 프랑스에서 발견.
2장 대혁명의 목적은 종교 권력을 파괴하고 정치권력을 약화하는 것이었나?
- 대혁명과 종교권력 :
프랑스혁명의 초기 동향 중 하나는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혁명이 탄생시킨 열정 중에서 가정 먼저 타올라서 가장 나중에 꺼진 것이 바로 반종교적 열정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 정신을 제압할 수 있었던 나폴레옹도 혁명의 반기독교적 성향만은 길들이지 못했다.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이 혁명의 우발 사건이자, 눈에 두드러지기는 하나 일시적인 특성
- 18세기 철학이 대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은 당연하며, 철저히 반종교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철학에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2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사회 조건이나 시민법 및 정치법의 원리들에 관련된 신선한 모든 견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자연적 평등과 그 결과인 신분적, 계급적, 직업적 특권의 폐지, 인민주권, 사회적 권력의 절대적 우월성, 법제의 단일화 등.
다른 한편으로 18세기 철학자들은 교회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그들은 교회의 성직자들과 위계 서열, 교회 제도와 교리를 공격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토대마저 뿌리 뽑기를 원했다.
기독교가 그렇게 격렬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종교적 교의 때문이 아니라 정치 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그것은 성직자들이 내세의 업무를 관장하길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지주이자 영주이고 십일조 징수원이자 현세의 집행관이었기 때문이며, 와해되어 가는 낡은 사회에서 교회가 너무 특권적이고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 대혁명의 정치적 성과가 공고화됨에 따라 그 반종교적 성과는 서서히 소멸되었다. 대혁명이 공격했던 모든 낡은 정치 제도가 완전히 파괴되고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영원히 제거됨에 따라,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증오심마저 수그러듦에 따라,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직자들이 과거의 구습에서 탈피함에 따라, 교회의 권위가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 민주주의 사회가 생래적으로 종교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민주주의 사회의 정신에 완전히 적대되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몇 가지 요소는 민주주의 사회에 친화적이다.
- 대혁명과 정치권력 :
지금까지 사회의 계서제(지위, 신분, 경제능력 등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제도)를 유지해 오고 인간을 계율에 얽매어 놓던 모든 제도와 관습을 대혁명이 전복해 버렸을 때, 사람들은 그 결과 사회의 특정 질서뿐만 아니라 질서 자체가, 그리고 통치뿐만 아니라 사회의 잠재적 위용자체가 붕괴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혁명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무정부적이라고 판단했을 것
- 이런 관찰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혁명이 발발한지 1년도 채 안 돼서 미라보(입헌군주파)는 국왕에게 은밀한 서신을 띄웠다
“새로운 사태를 앙시앵 레짐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위안과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회에서 입안한 법령의 일부가 군주제 통치에 유리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고등법원도 신분회 지방도 성직자 집단도 특권층도 귀족층도 없지 않습니까? 시민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계급을 만든다는 생각에는 리슐리외라도 크게 공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면적인 평등은 오히려 권력을 행사하는 데 이롭기 때문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몇 차례에 애를 쓴 전제 정부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단 1년간 진행된 대혁명이 이룩해 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혁명을 이끌던 사람이 이해한 대혁명이었다.
- 프랑스혁명은 낡은 사회 형태를 일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모든 기성 권력과 기존 세력들을 공격하고 전통을 타파하며 습속과 관습을 쇄신할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권력에 대한 존중과 복종심을 배양했던 모든 관념들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소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스러운 표면을 들춰 보면 거대한 중앙 권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앙 권력은 그때까지 일련의 하위 권력체들(신분, 계급, 직업, 가족, 개인 등)에 분산되고 사회 전반에 흩어져 있던 모든 단편적인 권위와 세력들을 집어삼켜 하나로 통일해 버렸다. 로마제국이 붕괴된 이후 이처럼 어마어마한 권력이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대혁명은 이 새로운 권력을 창출했다.
- 반은 파괴되어 버린 옛 제도들의 잔해 속에서 미라보가 발견했던 것은 바로 이 단순하면서도 엄정하고 웅장한 형체였다. 군주들은 대혁명의 혜택을 입었든 혁명에 문외한이든 적대적이든 한결같이 경탄과 선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군주들은 자신의 영지 안에 남이 있는 불입권(영주가 영내의 재판, 조세에 관하여 왕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을 폐지하고 특권들을 제거한다.
그들은 계층 구분을 완화하고 불평등을 없애며, 나아가서 귀족 집단을 정규 관료로 대체하고 지방의 특권지역에도 일률적으로 법률을 적용하며 분산된 권력들을 단일한 통치 안에 통합한다. 프랑스혁명은 군주들의 재앙인 동시에 그들의 스승이기도 했던 것이다.
3장 프랑스혁명은 정치혁명이면서 종교혁명의 양상을 띠게 되었나
- 지금까지 발생한 모든 시민적 정치적 혁명은 그 발상지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고유한 영역이 따로 없었고 지도에서 낡은 국경선을 모두 지월 버릴 정도.
- 대혁명은 법률, 전통, 성격, 언어 등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통합하거나 분리했으며 때로는 동포를 적으로 만들거나 이방인을 형제로 만들었다. 개개의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누구나 시민이 될 수 있는 공통의 정신적 조국을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에는 이러한 성격을 갖는 정치혁명이 단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다른 것과 비교해서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선 종교혁명에 견주어 보는 것도 좋을 것.
- 프랑스혁명은 어느 정도 종교혁명의 양태와 성격을 가지고 진행된 정치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은 종교혁명과 마찬가지로 국경을 넘어 멀리까지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와 선전을 통해 침투해 들어갔다. 그것은 개종을 불러일으키는 정치혁명으로서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에게도 열정적으로 설파되었다.
- 종교 일반이 가지고 있는 관례적 특징은 인간을 법률 관습 전통 등에 관계없이 그 자체고 취급하는 것이다. 종교의 주요 목적은 인간과 신 사이에 일반적인 관계를 규정하고, 사회 유형에 관계없이 사람들 사이에 권리와 의무의 보편적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행동 규범은 특정 국가나 특정 시대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성 일반에 관계한다. 인간성 자체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종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모든 곳에 적응할 수 있다.
- 프랑스혁명이 현세에 대해 취한 방도는 종교혁명이 내세에 취한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종교가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는 인간 일반을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혁명은 시민을 그가 속한 특정 사회로부터 독립된 추상적인 존재로 취급했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시민의 특별한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에서 인간 일반의 권리와 의무도 규명하려 했던 것이다.
-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의 개혁보다는 인류의 갱생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장 격렬했던 어떤 정치혁명들도 보여주지 못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4장 어떻게 유럽의 대부분이 동일한 제도들을 갖게 되었으며, 이 제도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파괴된 이유는 무엇인가
5장 프랑스혁명의 고유한 업적은 무엇인가
- 대혁명은 본질상 사회혁명이자 정치혁명이었다. 대혁명은 그 과정 속에서 무질서를 조장하고 고착하는 것, 무정부 상태를 ‘규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공권력의 권위와 권한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대혁명은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때까지 우리 문명이 간직해 온 특성을 변화시키거나 그 진보를 저지하지 않았으며, 유럽에서 인류 사회의 토대가 되는 기존 원리들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 우리는 이 혁명이, 유럽의 대다수의 국가에서 지난 수세기 동안 어김없이 군림해 왔던 정치 제도들, 즉 일반적으로 봉건 제도들이라고 부리는 것들을 제거하고, 조건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더욱 단일하고 더욱 단순한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로 그것을 대체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 대혁명은 불시에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작업의 완성이었으며 적어도 열 세대에 걸친 사람들의 노고로 이루어진 작업의 갑작스럽고도 격렬한 결말이었다. 대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낡은 사회 구조는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뿐 어는 곳에서나 붕괴되었을 것이다. 대혁명은 스스로 조금씩 마무리되어 갈 것을 폭발적이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통해 어떤 중간 과정도 경고도 거리낌도 없이 한순간에 완성해 버린 것이다.
제2부
1장 봉건적 부과조들이 다른 곳보다 프랑스에서 더 가혹하게 여겨진 이유는?
- 놀라운 사실은, 중세 제도의 잔재들을 제거한다는 명문의 대혁명이, 그 제도가 온전히 보존되어 인민에게 가장 큰 가혹함과 불편함을 주었던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덜 가혹하고 덜 불편하리라 여겨졌던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멍에가 사실상 가장 가벼웠던 곳에서 오히려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 독일에서는 18세기 말에도 농노제가 완전히 소멸된 곳은 어디에서 없었다. 중세와 마찬가지로 농민은 토지에 완전히 매어 있었고, 농민이 마음대로 영지를 떠날 수 없었으며, 도주할 경우에는 추적해서 다시 강제로 데려올 수 있었다. 농민은 지위가 올라갈 수도, 직업을 바꿀 수도 없었으며, 영주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도 없었다. 농민은 주인에게 봉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으며, 청년기의 몇 해를 영주의 저택에서 하인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 농민들은 자유롭게 오고 가고, 사고팔며, 계약하고 일했다. 농노제의 잔해는 대부분 지역에서 기억조차 희미한 먼 옛날에 이미 완전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13세기경 노르망디에서는 농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 프랑스 인민의 상황에서 또 하나의 혁명적 변화는 농민이 단지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농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토지 분할이 대혁명에서 시작되었으며 또 대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증거 자료들은 그 반대의 사실을 입증.
적어도 대혁명이 일어나가 20년 전에 이미 농업협회는 토지의 지나친 분할을 불평하고 있다. 토지는 언제나 본래 가치 이상으로 매매되었는데, 이는 토지 소유농이 되려는 주민들의 열정 때문.
아서 영이 처음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농민들 사이의 엄청난 토지 분할이었다. 그는 프랑스 땅의 절반이 농민들의 소유라고 단언했다.
- 토지 분할이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는 토지 분할이 대혁명보다 훨씬 앞서 있다. 대혁명이 성직자들의 토지 전부와 귀족들의 토지 대부분을 매각했던 것은 사실. 그러나 당시 매각 증서들을 살펴보면, 토지 대부분이 이미 다른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유권이 이전된다 할지라도 소유주의 숫자는 생각한 것만큼 증가하지 않았다.
- 대혁명의 결과는 땅을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땅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모든 소토지 소유농들은 사실상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데 상당한 곤란을 겪었으며, 여전히 매여 있는 많은 굴종들을 참아 내야만 했다. 이러한 과중한 부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 과도한 무게를 경감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 상황이었다.
- 귀족들이 국가의 통치에 참여하지 않게 된 지는 오래되었으나 농촌의 행정만은 끝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는 식의, 그리고 영주가 자기 지역의 농민들을 통치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 18세기 교구의 모든 업무들은, 더 이상 영주의 대리인이 아니며 영주가 임명하지도 않은 일정한 수의 관리들이 처리했는데, 이들은 해당 주의 지사에게 임명되거나 농민에게 직접 선출되었다. 교구 내의 모든 관리들은 중앙 권력의 통제와 지배를 받았다. 게다가 영주는 더 이상 교구 내에서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국왕과 주민 사이의 중재자로서 행동할 수 없었다. 사실상 영주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과 면제권 덕에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고립된 주민일 뿐이었다. 그에게 남다른 것은 정치적 권력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였다.
- 귀족들은 어디서도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공공 업무의 행정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프랑스만이 지니는 특이점이었다. 영국이나 독일 등에서는 봉건 사회의 특징이 어느 정도 잔존했으며 토지에 대한 소유와 주민에 대한 통치가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오래전부터 한 가지 점, 사법권에 따라서만 공공행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주요 귀족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재판을 담당할 판사들을 임명할 권리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으며, 영지 내에서 발효되는 치안 법규들을 여전히 수시로 제정했다. 그러나 왕권이 영주의 사법권을 조금씩 축소하고, 한정하고, 종속해 감에 따라서, 사법권을 여전히 행사하는 영주들도 그것을 권력으로서보다는 일종의 소득으로 여기게 되었다.
-1789년까지 존재했던 모든 봉건적 부과조:
영주를 위한 부역의 자취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반 이상 사라졌으며, 통관세는 비록 몇몇 주에 남아 있긴 했지만 대개 소멸되었다. 영주들은 정기 시장이나 상설 시장에 세금을 징수했으며, 영주들만이 수렵권을 누렸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농민들로 하여금 영주 소유의 제분기와 포도 압착기를 사용하도록 강제. 가혹한 부과조는 영지 내 토지를 팔 때마다 영주에게 바치는 세금인 ‘토지 매각세’ 등등.
-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당시 유럽 전역에는 프랑스와 정확하게 똑같은 부과조들이 존재했으며, 대개 그것은 프랑스보다 훨씬 가혹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똑같은 봉건적 부과조들이 유독 프랑스 인민의 마음속에서만 그렇게도 강렬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는가? 그것은 한편으로 프랑스 농민은 토지 소유농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농민은 영주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2장 행정의 중앙집권화는 대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앙시앵 레짐의 제도인가
- 지난날 프랑스 정치 의회들이 있던 시기에 한 연사가 행정의 중앙집권화에 대해 “대혁명의 영광스러운 전리품이여, 전 유럽이 우리를 부러워하네.”라고 말함. 저자는 중앙집권화가 대혁명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오히려 그것은 앙시앵 레짐의 산물로서 대혁명 이후에도 존속한 유일한 정치제도.
- 왕국의 옛 행정 체제를 살펴보면, 상대적으로 새롭고 개선된 형태가 그 모습을 드러냄.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며 기존의 모든 권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한 행정 기구가 왕국의 중심부에 출현, 이것이 바로 국왕 참사회. 이 기구는 일반 재판소의 모든 판결을 파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최고 법원인 동시에 모든 특별 재판에 대한 최종 심의 판결권을 지닌 최고 행정 재판소. 정부 위원회로서 이 기구는 국왕의 의지를 받들어 입법권을 행사하며 법률안을 심의 또는 제안하고 조세액을 할당한다.
모든 중요 사항들을 결정하고 하부 권력체를 감독하는 이 기구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귀착점. 그러나 참사회 자체가 고유한 판결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선포는 참사회가 하지만 결정은 국왕만이 할 수 있다. 참사회는 겉보기에 사법권을 행사하는 듯이 보일뿐, ‘자문 위원들’의 모임. (참사회 구성원은 대영주는 아니고, 변변찮은 가문 출신들, 전직 지사들과 실무에 능숙한 사람들이며, 해임이 가능)
- 중앙 행정의 통치 실권은 지사가 쥐고 있었다. 지사는 항상 타지방 출신으로 젊고 전도가 양양하며 평범한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지사는 특전으로 권력을 얻지 않았고, 정부는 국가 참사회의 하급 관리 중에서 지사를 선임했으며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었다.
지사는 국가 참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을 대표했던 까닭에, 당시의 행정 용어로 파견위원이라 불렸다. 그는 참사회 자체가 지닌 권력을 자기 수중으로 가지고 와서 현장에서, 첫 번째 심급에서 행사했다. 그는 참사회와 마찬가지로 행정관인 동시에 사법관이었다. 모든 대신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던 그는 중앙 정부의 의지를 지방에 전달하는 유일한 수임자였다. 한편 지사는 군마다 자신의 뜻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관리로서 ‘지사 대리’를 두었다. 지사는 보통 새로 작위를 받은 사람인 반면 지사 대리는 언제나 평민이었다.
- 존 로 “재무 감독관으로 근무할 때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프랑스 왕국을 지사 서른 명이 통치하고 있음을 명심하시오. ... 주의 불행과 행복, 그리고 풍요와 피폐는 모든 각 주에 임명된 서른 명에게 달려 있는 것이오.”
이렇게 막강한 권한에도 이들 관리는 잔존하는 옛 봉건 귀족층이 뿜어 대는 위광에 가리어 있었던 듯하다. 이미 도처에 뻗쳐 있던 이들 지사의 권위가 한창때조차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3장 오늘날 행정 감독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떻게 앙시앵 레짐의 제도인가
- 프랑스에서 시정 자치는 봉건제보다 오래 존속, 영주들이 더 이상 농촌 행정을 관할하지 않았던 반면, 도시들은 여전히 자치권을 보존. 17세기 말까지도 도시들은 소규모 민주주의 공화정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며, 시 행정관들은 전체 인민에게 자유로이 선출. 자치시 선거가 처음으로 완전히 폐지된 것은 1692년. 그때 시의 관직들은 ‘매직 관리들’에게 넘어갔다.
- 대개 도시의 통치는 두 의회에 맡겨짐.
첫째 의회는 시군구읍면의 집행부라 할 수 있는 소위 ‘시 협의체’. 국왕이 관리 선출권을 쥐고 있거나 도시가 관직을 되살 수 있는 곳에서는, 시 협의체의 관리들은 일정 기간 동안만 권력을 행사했으며 선출되었다. 그들은 국왕이 관직을 다시 수거해서 매각할 경우에 일정한 액수를 지불하고 종신토록 그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들 시 관리는 봉급을 받지 않았지만 대개 세금이 면제되었으며 특권을 누렸다.
둘째 의회는 ‘총회’라 불린다. 총회는 관리에 대한 선거 제도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시 협의체를 선출했으며,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시의 주요 업무를 관장했다. 15세기에 총회는 흔히 전체 인민으로 구성.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자 총회를 구성하는 것은 인민이 아니었고, 어디서나 ‘명사들’로 구성되었다. 총회에서 당연직 명사들의 수는 증가한 반면에 개개 직종조합들에서 파견된 대표들의 수는 점점 사라져 버렸다. 곧 총회는 부르주아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수공업자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 이리하여 18세기의 각 도시의 시 정부는 어디에서나 소규모 과두제로 전락했다. 어느 도시든 몇몇 가문이 공중의 눈을 벗어나서 사적인 의도로 업무를 이끌어 갔다. 이것이 프랑스 전역에서 행정이 시달리고 있는 병폐였다.
모든 지사들이 이 병폐에 주의를 환기했지만 그들이 생각해 낸 유리한 처방은 지방 권력들을 점점 더 중앙 정부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 도시들은 지사의 보고서에 대한 참사회의 판결이 없이는 결코 입시세를 책정하거나 조세를 징수할 수 없었고, 시 재산을 팔지도 임대하지도 관리하지도 못했다. 모든 도시의 공사는 참사회의 판결이 허용해 준 계획과 견적에 따라 집행되었다.
지사가 지사 대리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정부가 중대한 일뿐만 아니라 가장 사소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든 업무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앙시앵 레짐 아래서도, 프랑스에서는 어떠한 도시, 성읍, 촌락, 소부락, 병원, 공장, 수도원, 성직 단체도 자체 업무에 대한 독자적 의사를 가질 수 없었으며,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행정이 모든 프랑스인을 감독했으며, 행정 감독에 해당하는 실체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4장 행정재판과 공무원 면책은 앙시앵 레짐의 제도인가
- 유럽에서 프랑스만큼 일반 재판소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만큼 특별 재판소가 더 널리 이용되는 나라도 없었다.
국왕은 판사들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고, 국왕이 야망이나 공포로 판사를 묶어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독립성을 거북하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국왕은 자신의 권력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사건들에 대한 재판권을 이들 판사에게 빼내었으며, 국왕에 더욱 종속적인 재판소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 일반 재판소와 별도로 설립했던 것.
- 군주정의 마지막 세기 동안, 우리는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한 후에 어김없이, 이 조치로 말미암은 항의나 소송들은 오로지 지사들이나 참사회 앞에서만 다루어질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음을 국왕의 칙령이나 포고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참사회는 ‘소송 이송’이라는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개입했으며 일반 판사들의 관할로부터 행정에 관련된 사항을 빼내어 직접 판결을 내렸다 .
예외는 일반화되면 하나의 규칙이 된다. 공공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모든 소송과 행정법규의 해석에서 연유하는 모든 소송이 결코 사적인 이해관계를 재판할 뿐인 일반 판사들의 관할이 아니라는 사실은 법률을 시행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마치 국시처럼 확립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오늘날 사람들은 그저 성문화된 형식을 덧붙였을 뿐이며, 기본 착상은 앙시앵 레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5장 중앙집권화는 어떻게 옛 권력체들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나
- 왕국의 중심에 위치하여 나라 전체의 공공 행정을 통할하는 단일 기구가 있다. 단 1명의 대신이 거의 모든 내무를 지시하며, 주마다 내정의 모든 세부 사항을 처리하는 수임자가 1명 있다. 부차적인 행정 기구들은 상부의 지시 없이는 어떠한 독자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특별 재판소는 행정에 관계된 사건들을 재판하며 중앙 정부의 모든 수임자들을 보호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앙집권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의 옛 행정 구조는 거의 파괴되지 않았으며, 말하자며 그 위에 새로운 주춧돌이 놓였을 뿐이다.
- 앙시앵 레짐 정부는 단지 온갖 업무를 혼자 처리하고자 하는 정부 일반의 본능, 관리들이라면 누구에게서나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본능에 자신을 내맡겼을 따름이다. 정부는 옛 권력체들의 칭호와 명예에는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서 조금씩 권력을 빼앗아 냈으며,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면서도 점잖게 그들의 영역에서 몰아냈다.
6장 앙시앵 레짐의 행정 습속들
- 대신들은 이미 모든 업무의 세부까지 감시의 눈초리를 뻗치려는, 모든 것을 관장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재무총감이 직접 지출을 감독하고 법규를 제정.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에서 구빈 작업장을 세우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가능. 빈민 수용소를 지을 때는 그곳에 수용될 빈민의 이름과 그들의 입소, 퇴소시기를 낱낱이 재무총감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그러나 보니 중앙 정부가 감당해야할 서류의 양이 엄청났고, 행정 절차가 너무나도 지연.
- 나는 통계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의 행정관들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 앙시앵 레짐의 말에 이르러 작은 인쇄 도표들이 지사에게 자주 발송, 재무총감이 토질과 경작방법, 생산물의 종류와 양, 가축의 수, 주민들의 활동과 습속 등에 대한 보고를 요구.
- 앙시앵 레짐은 엄격한 법규, 허술한 시행을 특징으로
- 18세기 프랑스의 중앙 권력은 건전하고 활기찬 구조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이미 중간 권력체들을 제거해 버렸으며 따라서 중앙 권력과 개인들 사이에는 막막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중앙 권력을 사회적 기제의 유일한 원동력이자 공공 생활의 유일하고 긴요한 행위자로 여기게 되었다.
- 대혁명을 앞두고 고질적 병폐가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사회와 정부에 관한 온갖 종류의 새로운 체계들을 내놓았다. 이 개혁자들의 목표는 다양했지만 그 수단은 항상 동일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혹은 새로운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다시 세우기 위해 중앙 권력의 힘을 빌리길 원했다.
첫댓글 어마어마 합니다. 글들이 주옥 같네요. 역시 19세기 노벨문학상 후보자 답습니다.
클라스가 다른 토크빌이네요
볼수록 격조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