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 이는 하나님의 품성 안에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위를 경험하고 있지만,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얻은 이방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있다(Harrison). '인자'의 헬라어 '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한다
한편 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엄위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이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 '넘어지는'의 헬라어 '페손타스'는 부정과거로 쓰여 완전히 넘어져 믿음에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심판을 행할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약속의 백성마저도 제하여 버리는 엄위의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접속사 '데'가 있어서 앞 문장과 연관되어 있다. 앞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말하나 이제는 인자에 거할 것을 권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불신앙으로 인해 계속되며,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반응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롬 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 본절에서 24절까지 이스라엘이 회복될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전에 그들이 원 나무에서 잘리운 이유는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회복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접붙임 입는 조건이다.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변덕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본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원예 상식을 벗어난 특수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바로 꺾여진 가지를 다시 접붙인다는 것이다. 일단 꺾여진 가지는 재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불가능한 예화를 사용하여 유대인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문자 구조상으로도 잘 나타나는데,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토스'가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구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세운 언약에 신실하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 이방인이 구원얻게 된 사실을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한 일임을 논증하고 있다. '원 돌감람나무'의 '원'과 '본성'의 헬라어 '퓌신'자연적인'은 전치사 '카타'('...따라', '...로 부터')와 '파라'('...거스려')와 함께 쓰여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접붙이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게 아니라, 다른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성공적으로 접붙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재접목은 이스라엘 대신 이방인만을 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 유대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일종의 예정된 조화라고 하는 본질적인 유사성 되면 유대인들의 회복이 성취될 터인데 이는 이방인의 동참보다 쉬워질 것이다. '얼마나 더'의 헬라어 '포소말론'은 문맥상 '얼마나 더 쉽겠는가)라는 의미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자를 자녀로 삼아주신다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에테 파르 헤아우토이스 프로니모이'('너희 스스로를 너희가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도록 하려고') 가운데 전치사 '파라'('...곁에', '...함께', '...로 말미암아')가 어떤 사본에는 '엔'('...안에', '...로')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비교적 오래된 사본에서는 전치사 '파라'로 되어 있으며. 바울은 12:16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는데, 거기서도 '파라'로 되어 있어서 '파라'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한편 본 구절의 '히나 메 에테'가 현재 가정법으로서 목적절이 되므로 바울이 이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는 이방인들이 자만해 있는 것을 막고 유대인들에 대해 스스로 높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부터 스스로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바울 당시에는 밀교가 있었는데, 그들은 입교자 외에는 알려주지 않는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단계가 지나지 않으면 이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에서 사용되는 '비밀'이란 이처럼 종교적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거나 특별한 사람이나 풀 수 있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알려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활동을 의미한다. 이 말은 계시에 대해,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돠였왔다.
그런데 이는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비밀이지만, 이제는 그 비밀이 알려졌다(16:25, 26;고전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비밀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사람이 완악하여졌거나 마음이 어두워져서 개별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이스라엘의 충만함이나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되어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 '충만한 수'에 대해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한다거나, 구원얻을 자기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논리를 여기에 도입시켜버리는 것은 바울의 정신을 오해하고
본 구절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을 흐려지게 할 뿐이다 이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는 종말 현상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며 선택된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적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계속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끝이 되면 이러한 완악함도 끝날 것이다.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 '완악해졌다'는 표현은 7절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17절의 비유에서는 '가지 얼마가 꺾여졌다'고 암시되었다.
본절에서는 '더러는'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 '더러'라는 낱말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1) 칼빈은 이것이 단순히 시간이나 숫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정도 의 으미로서 듣기좋게 수식하려 했을 뿐이라고 한다. (2) 혹자는 이것을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시간적으로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는 기간동안만 제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라 한다
. 그러나 본 구절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언제 완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 계획이므로 알 수 없다. 결국 칼빈의 견해대로 바울은 본 구절에서 숫자나 시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것은 이방인이 구원얻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고, 결국 이스라엘도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