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윤성택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신인상으로 등단. 첫 시집 『리트머스』(2006.11 문학동네)
.........................................................................................................................................
<표4의 글>
윤성택의 언어는 천평저울에서 내려온다. 미세한 눈금을 읽고 내려오는 그의 언어는 세계의 사각지대를 찾아가 예리하게 꽂힌다. 그는 트릭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불확실한 매트릭스의 세계가 보여주는 모든 징후를 그는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초감각적이라고 할 만한 그의 언어는 항상 안테나처럼 예민하게 대상을 포착하며 그에 따른 적확한 해석과 진단은 풍경의 이면에 숨어 빛을 발한다. 시원스런 몇 차례의 텀블링과 고공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회전, 이회전, 삼회전을 보여준 뒤 가볍게 착지하는 십 점 만점의 체조선수처럼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완벽한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강인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