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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인격수련
(고후 5장 13절-15절)
엄 두 섭 목사
(은성교회)
서 론
목회자의 인격수련에 관하여 네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론
첫째, 인생관을 철저히 가지자.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솔로몬왕이 인생의 온갖 것을 다 누리고 난 뒤에 그가 본 인생관을 기록한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절을 보면,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닫고 보면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쾌락과 행복은 모두 제정신을 잃은 미친자의 광증과 같은 것입니다.
또 전 2장 11절에 이르기를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피라밋을 쌓는 문화, 만리장성을 쌓는 대공사, 더 나아가 오늘 20세기의 문명 모두는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인생관도 하나의 인생관일 수 있습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전 1: 11)” 이처럼 바벨론 문명의 찬란함을 오늘날 누가 기억하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20세기 문명이 지나가면 이후 세대의 사람들 누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인간 문명 역사의 허무함을 말하는 또 하나의 인생관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직자인 우리가 지녀야 할 첫째 요건은 올바르고 심오한 인생관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가 지닌 인생관에 의해 그 사람의 인격 형성이 좌우됩니다. 더구나 성직자에게 있어서 그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생관이 철저하지 못한 성직자는 가치없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져야 되는지를 생각하고 그 인생관대로 철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헬라 철학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스토아주의로 매우 고상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현명한 자란 무엇을 많이 아는 자라기 보다는 이성을 가지고 우주적인 법칙에 조화되게 사는 자’라는 인생관을 가진 사상입니다. 이 스토아주의에 대해 대조적인 사조로서 에피쿠로스학파가 있습니다. 이 학파는 이기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윤리관을 갖고 있습니다. 쾌락을 얻는 것을 인생 종국의 목적으로 삼는 주의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비슷한 두가지 인생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10장 31절에 보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고전 15장 32절의 말씀에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찰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그런 천박한 인생관도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불교는 하나의 ‘인생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 형성상 종교적 동기의 출발은 석가모니의 인생관에서 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석가모니는 카필타 봐수프성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결혼까지 했던 그는 인간의 사고(四苦) 즉,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죽는 고통 등 생로병사의 네가지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불교적인 표현으로 ‘사문출유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 성의 동서남북 네 문으로 나가서 본 인생관을 뜻합니다.
또한 석가모니는 자기 아내가 잉태하여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 아기의 이름을 ‘나흐라’라고 짓게 했습니다. ‘나흐라’의 뜻은 ‘장애물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왕자인 자기 아이가 태어나는데 ‘내 인생에 장애물 하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히말라야 산속에 들어가서 머리를 삭발하고 6년을 구도하면서 인생에 대하여 세가지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삼법인’으로서 이 사상이 석가의 중심적인 교리가 됩니다. 첫째가 ‘제행무상’ 곧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이고, 둘째가 ‘제법무아’로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 나 하면서 다니지만 진정한 나란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적정열반’입니다. 니르바나 곧 열반에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을 ‘아역다라 삼박삼바리 무상정각’이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이 인생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해탈하는 영원한 삶인 니르바나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종교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네가지 ‘거룩한 진리’가 있습니다. ‘사성제’라고 부르는 이것의 첫째는 ‘고제’로 인간생활 전체는 고통이요 고뇌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집제’로 인간생활 속에 번뇌와 고통이 생기는 원인은 사람들의 욕망을 채울 수 없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멸제’인데.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은 그가 삼법인에서 말한 것처럼 니르바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도제’인데 이것은 인간의 고통을 해탈하는 방법은 수도하는 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몇몇 수도자들은 그들의 인생관을 보다 더 철저히 기르기 위해서 백골관 혹은 부정관이라고 하는 수행방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도 사람들이 죽은 송장을 아무렇게나 갖다 버리고 가는 무덤가의 버려진 시체 곁에 자리를 잡고 썩어가는 송장을 몇 달이고 그냥 앉아서 응시하면서 “저것이 인생이다. 저것이 바로 나다.”라고 되뇌이는 고행방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생을 초연하게 꿰뚫어 넘겨다보는 그런 인생관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꿰뚫어 보려고 하는 것은 인생을 달관의 경지에서 보려고 하고, 인생관에 대해서 깊이 파고 들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관이 천하면 그의 종교는 기복신앙으로 전락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인생관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현세주의나 쾌락주의적인 신앙을 갖게 되고, 따라서 기복 신앙의 교도들이 많이 생기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1장 11절에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말은 항상이 아니라는 뜻으로, 항상 그대로 존속해 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위대했던 영웅들의 업적도 모두 과거로 과거로 흘러가서 남음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때 찬란했던 영웅들과 당대의 미인들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 올 수 없기에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도 모조리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마치 편안하게 잠든 마을을 밤중에 홍수가 덮쳐 모조리 밀고 지나간 후의 허무함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현재만 이렇게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인 것이 아니라 사천년동안 매일 그런 형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예수를 믿어 60여년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30살에 안수를 받았고 목회 4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40여년 동안 저는 한국교회의 역사를 지켜 봤습니다. 일제시대, 공산치하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도 우리나라 역사 못지않게 혼란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또 내 개인의 존재를 생각해 볼 때에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인생은 하나의 안개요 뜬 구름이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관, 역사관이 나에게는 생깁니다. 내가 없어지면 이후 세대의 그 누가 나를 기억하겠습니까?
기독교적으로 볼 때 모든 인생은 죄의 지배 아래 있고 이 세상은 고통의 세계입니다. 성경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요 14장 30에서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은 악마 정신이 지배하고 있고 이 세상의 임금은 곧 악마인 것입니다.
요일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자 안에 처한 것이며”와 요 12장 31절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온 세상은 모두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사상으로 볼 때 이 세상은 심판 받을 세상이고 말세에 종말이 오고야 말 세상입니다. 세상의 종말과 재림 신앙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버리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지상 천국으로 유토피아로 건설해 보자는 운동은 아닙니다. 그런 이상은 공산주의의 꿈일지는 모르지만 기독교운동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천도교를 비롯한 사이비 종교의 대부분은 낡은 세상이 무너지고 새 세상이 열린다고 하는 후천개벽설을 주장합니다. 강한 현세관을 가지고 있고 내세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심지어 그들은 죽었다가도 축복받기 위하여 다시 환생한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지상천국을 이루려는 지나치게 현세적인 교리와 기복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를 -정당한 종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무병장수하고 자손은 번창하며 세상적, 세속적인 축복을 받고 나 개인은 출세, 성공하고 돈을 모으고, 육신적인 쾌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신흥종교, 사이비 종교들이 주장하는 인생관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도 이렇게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교적인 경향을 띠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천리교와 비슷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요사이 일본에서 들어온 남묘호렝게교와도 유사해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 자꾸 퍼지고 있는 남묘호렝게교는 단지 “남묘호렝게교, 남묘호렝게교, 남묘호렝게교...”하며 주문만을 외우면 3년 안에 빌딩이 생기고 모든 병이 다 치료가 되고 가정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자꾸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일부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할 이야기인데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현세주의적이고 기복주의적인 기독교운동이 이런 사이비 종교와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저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정죄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온 세상은 악마에게 속했고, 모든 인간생활은 모조리 잘못됐으며 넋빠지고 미친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는 커다란 정신병동과도 같은 것이 이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2장 2절에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미친 사람과 같다, 광인들과 같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폴레옹, 알렉산더, 히틀러 등의 대 영웅들도 크게 미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제정신을 잃은 무리들이며 인류가 해놓았다는 모든 업적들, 분주하게 한 일들도 다 허사라는 인생관입니다. 목적이나 가치도 없고 지각도 없는 그저 헐떡헐떡 거리다가 가버리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2장 11절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라.”
기독교 운동은 이같은 세상과 인간생활을 고발하고 정죄하며 이 잘못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그런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18장 36절에 말씀하셨듯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17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무렵의 간곡한 기도가 있는데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예수 믿는 기독교인은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과 믿음 없는 사회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관과 처세술을 그대로 가지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인생관을 가져야 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도 다르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독교운동은 눈에 보이는 어떤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것이 아니며, 물론 이 세상에서 시작하지만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성경 말씀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아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고,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계 18장 4절에 보면 이 “바벨론 같은 세상,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교회들은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운동에 함께 휩싸이거나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하자고 백날 애써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이 세상 문화, 세상 유행, 세상 정치, 세상 예술 등을 비판할 수 있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얼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기독교운동이 일어나면서 사회 복음화, 교회 세속화 운동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운동들은 그 취지와 개념을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태도는 하나의 나그네요, 이방인이어야 합니다. 히 11장 13절 “땅에서는 애굽인과 나그네로다.” 요일 2장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늙은 목사여서 옛날 식으로만 고집하며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의 삼대 원수는 악마, 세상, 육신입니다. ‘악마’는 자기의 정체를 잘 나타내지 아니하는 원수입니다. 내가 악마다, 원수다 하고 우리를 시험하는 적이 없습니다. 악마가 아닌 체 하고 자기 정체를 나타내지 아니하는 원수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운 옛 향수를 자꾸 불러 일으키는 그런 원수입니다. 명동에 나가고 싶게 만드는 원수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명동 다방에 나가서 설교준비를 한다고 하는데 담배 연기 속에서 시는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교의 영감이 나올는지는 의문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죽여도 또 되살아나는 집요한 원수입니다. 지워지지 아니하는 원수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세상애, 육신을 생각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애, 물질에 대한 욕망, 탐욕, 인간의 애정에 얽힌 애욕, 세상을 사랑하는 속정 등등의 이런 탐욕, 애욕, 속정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철저한 인생관을 세우고 이런 인생관 속에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특히 성직자들은 경건하게 구별되어 거룩함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기오스’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구별한다, 격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직자라고 하여 거룩함을 지키려고 한다면 세상과 격리되어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먹는 것도 세상과는 전혀 달라야 하고 입는 것도 다른 인생과는 다르게 입고 사는 것도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말하는 것이나 희로애락의 감정도, 처세의 태도도, 출세의 성공욕도 모두가 이 세상을 닮지 말고 구별된 세상, 구별된 인종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우리의 영성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별된 인생관을 가지고, 나 자신의 영성을 가지고 우리 교회 교인들의 영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삼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따르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상황을 보면 마 4장 18절 ~ 19절의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일어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하는 말씀과 같이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말씀 중 “나를 따라 오너라.”하는 말씀은 원어로는 ‘듀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자 오라, 지금 오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게로 가면 예수님은 신학과 철학을 가르쳐 주지는 아니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신학화하고 철학화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예수님을 몸소 따르면서 본받기를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 종교나 철학강의를 우리에게 해주신 적은 없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철학 강의를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유대 랍비와 같은 성경 선생도 아니셨습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구구절절이 해석해주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의 제자된 자는 주님을 따르는 일 뿐입니다. 그것이 제자된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한 태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의 그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의 제자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성직자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면서 우리 자신들이 예수의 남기고 간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마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이 있듯이 예수님이 하신대로 배우는 일이 제자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요 13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시면서 제자는 선생같이 되고 종은 주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들에게 신ㆍ구약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으로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 바리새 랍비나 서기관들처럼 성경 주석을 가르치는 선생은 아니었습니다. 행함으로 보여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지식이나 교훈을 받아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은 친히 우리 스승의 생활을 본받아서 그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성장해 갑니다. 성경 말씀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지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면 다 된다는 식의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동시에 우리 믿음의 대상이고 우리가 사랑하고 따라야 할, 그리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본이십니다. 예수를 본받아 사는 것이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길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신득의(以信得義)로 구원 얻는 방법을 늘 가르쳐 왔는데 500년 전에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교에 대항하여 일어나면서 그들이 제일 많이 부르짖은 것도 이 ‘믿음으로만’, ‘은혜로만’이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신득의만이 전부인줄 알고 그것만 교인들에게 가르치면 우리의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것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신득의를 주장하면서도 고전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신득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신분을 얻는 것이지 그것만으로 실제적인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완성의 절정은 인격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성질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과거에 지은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롬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비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엡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를 공동번역으로 보면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 4장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공동번역에는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벧후 1장 3~4절의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말씀하신 이것은 우리같이 보잘것 없고 구더기 같은 인생이 신의 성품과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후 3장 18절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공동번역에는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르시는 일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일 3장 2~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불멸만이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주와 일치되고 주안에 있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인격형성은 옛사람을 죽일 때 가능합니다. 옛사람과 자기 조상의 혈통과 고집된 자기의 옛 성질들을 어떻게든지 철저히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자기를 부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자기가 사랑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33년 일생을 재연(react)해야 됩니다. 예수의 제자, 성직자라고 한다면 자기도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 2장 20절의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내 정신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을 내 가슴에 받아 내 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내 길로 삼아 우리가 또 하나의 예수(Another Jesus)가 되어서 예수를 따르고 예수같이 되어야 합니다. 더더욱 성직자들은 예수님의 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의 “이편 뺨을 치는 자에게 저편 뺨을 돌려대는” 무저항 정신과 “속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욕을 참으라.”하는 인욕의 정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애적의 정신, “오른 눈이 죄짓게 하면 빼어 버리라.”는 절대적인 순결 정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청빈의 얼, “너희는 높은 자리로 오르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하는 하좌정신, 제자의 발을 씻기신 세족의 얼 등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든든한 나무라야 못을 꼭 박을 수 있듯이 성직자들은 예수님의 얼을 그들의 가슴 속에 꽉 박아서 예수의 얼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는 것을 얻는 구원의 기본일 뿐이며 거기에는 성화의 구원이 뒤따라야 하며 예수와 같이 되는 구원의 완성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엘리야의 영을 그 제자 엘리사가 받은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고 그의 진리를 선포하는 성직자들이므로 예수의 얼화된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도 예수님처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걸음걸이나 얼굴 표정도 또 하나의 예수처럼 행해야 되고 의식주에서도 세상유행이나 세상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골 3장 9~10절에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신득의는 죄인 구원의 은혜와 방법은 되지만 인격완성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 목표는 주님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확실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살전 4장 3절에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지만 꿈에도 이 세상은 흠모하지 말고 보거나 듣지도 말고 세속의 더러운 것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의 첫째 사명은 자기와 교회를 이 세속에서 지키는 일입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을 용납하지 않는 교훈을 받아 비그리스도적인 것을 모두 일소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개인생활이나 교회주변의 일들 그리고 우리들의 가정에서 사치와 열락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민족과 국가가 멸망했습니다.
성직자들의 게으름과 태만은 대죄 가운데 대죄입니다. 우리는 도적질이나 간음은 죄라고 생각하지만 게으름은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각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속에 빠지고 경건치 못하고 많은 일에 태만할 때 우리의 말로는 마 7장 22~23절의 말씀처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처럼 될 것입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제자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제자들은 간디에게 예수를 믿게 하려고 자주 전도를 했습니다. 간디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하여 생활을 했습니다. 자택도 허술한 움막집으로, 벽에 예수님의 성상을 그려 붙여 놓고 ‘그는 우리의 평화다.’라고 써 놨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 믿으라고 할 때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왜 너희 기독교인들은 선전만 자꾸 하느냐? 가령 책상 위에 아름다운 장미를 꽂아 놓았다고 하면 그것을 구태여 설명하거나 선전할 필요가 있는가? 책상에 가만히 놓아두어도 아름답게 보이고 향기가 나는 것인데 너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하며 도리어 반문했다고 합니다.
카이탄 박사는 인도에 가서 인도 사람으로 귀화해서도 전혀 자기가 기독교인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 믿으라는 얘기도 별로 많이 안했는데 인도 사람들은 카이탄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기독교나 예수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당신 속에서 예수를 봅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얻는 종교라고 말하고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아무나 와도 좋소.’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려는 자들에게 세가지 조건을 항상 내세우셨습니다.
마 16장 24~25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셋째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친구와 농담하면서 말하기를 30여년의 목회 중에 거듭난 사람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고 했답니다. 그것은 농담이었지만 40여년 동안의 저의 목회 중에도 자기 부인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그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자기를 버린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기부인’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첫째 조건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기애, 나를 보존하려는 자기보존욕, 나를 긍정하려는 자기긍정, 개인적인 출세, 성공욕,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 기복신앙, 탐욕, 애욕, 욕정 등등 이 모든 것을 모조리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기 부인을 하되 자기 박탈, 자기 도륙에까지 이어져야만 합니다.
클라라수도원의 대문에는 ‘이 곳은 죽는 것을 배우는 장소이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사나 수녀가 되려고 제단에 엎드려 서원식을 할 때에 그들의 등에 죽은 자들의 관을 덮는 관보자기를 덮어주는 예식이 있습니다. 그 예식에서부터 대문의 문구, 사회의 속명을 버리고 새 이름을 주는 것, 수도원 내에서 1인칭 소유대명사 곧 내 것이라는 말을 못 쓰는 데까지 그들은 심각하게 자기를 죽이는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리이스 정교회의 수도사나 주교들은 머리에다 시커먼 것을 쓰고 뒤에 길게 드리운 것을 씁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도하고 명상하고 수도하다가 죽으면 그들을 덮기 위해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토록 열심히 고행과 의식을 통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애쓰지만 쉽게 자아가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고 부인해야 예수의 얼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저항, 인욕, 애적, 희생, 순결, 하좌정신, 세족의 얼 등 여러 가지 정신이 있지만 그 모든 정신들도 자기부인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실천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이세종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상당히 골격이 크고 성격이 급한 분이셨는데, 예수를 믿고는 그 즉시 그에게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고쳐 탕감해 주었고 어린 아이들에게도 존칭어를 써주셨습니다. 어린 아이 속에 예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세종 선생님이 길을 걸어갈 때 아이들이 손목을 잡고 지나가지 못하게 하면 선생은 그 길을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선생님은 늦게 결혼하셨는데 당신과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여자는 당당하고 남자같은 여자였고 심지어 코밑에 남자같이 시커먼 수염도 있는 여자였습니다. 선생은 신앙이 깊어지면서 부인과 동침하지 않고 당신 아내를 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여자는 건강한 여자였는데 부부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다른 남자를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그의 아내가 시집갈 때 이세종 선생님은 그의 은농장과 도가지 등을 지게에다 지고 시집가는 부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권면했습니다. “이 후로도 예수는 잊지 말아라, 그리고 아무 때나 회개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 집에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서 그 여자는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부생활 없는 누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다시 다른 데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린아이들이 딸린 홀아비였습니다. 이세종 선생은 역시 이번에도 세간을 지게에다 지고 옮겨다 주었습니다. 또한 전도하면서 예수를 잊어버리지 말고 언제든지 뉘우치는 마음이 생기면 찾아오라는 권면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 후 가끔 시집간 아내에게 심방을 다녔습니다. 심방갈 때는 그 남편의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었습니다. 그가 자꾸만 찾아가니까 그 여자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오지말아 달라고 부탁도 여러번 했고, 마지막에는 화가 나서 구정물을 끼얹으며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진정으로 회개했고 세상 떠날 때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생활 가운데 중요한 것입니다.
또 둘째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과 아픔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그 시대가 가장 강한 세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안지려고 하고 안일을 탐하고 십자가를 미화해서 단지 목에다 거는 악세사리로 만들거나 기독교의 심볼로만 달아 놓으려 할 때에 기독교는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나 한국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점점 십자가가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의 교회는 십자가를 벗어버렸고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십자가가 희미해져가고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지상교회는 영광의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되고 내 이웃 형제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됩니다.
십자가를 안지려고 하는 개인주의, 기업화된 교회, 수량적으로 비대하고 팽창주의로만 나가려는 교회, 세속화 등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치와 호강과 안일의 새로운 기독교 국가로 등장해오고 있습니다. 유럽과 러시아의 교회가 그렇게 안일하려다가 멸망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쉽고 재미있게만 예수를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역자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의 환심을 사서 교회에 많이 출석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쾌한 예배, 재미있는 교회를 만드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전국교회의 1년 연보 액수가 1조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인건비와 먹고 노는데 다 써버리고, 궁전같은 화려한 성전을 짓는데 경쟁하고 첨단의 문명시설을 갖춰놓는 데만 열심이고 교회 교역자들은 교인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교회 버스를 타고 온천장에까지 놀러다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는 “교회도 하나의 기업이고 목사도 먹어야 살므로 교인도 많이 나오게 하고 연보도 많이 짜내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만 한국교회가 이렇게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나사렛 예수의 얼은 행방불명이 됩니다. 얼빠진 기독교가 되는 것이요, 얼뜨기 교인, 얼간이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한국교회의 부흥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성지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그 슬픔의 길 ‘비아돌로로사’를 걸어 봤습니다. 거기에는 열세 곳에 예수님의 유적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두 번째 쓰러지신 자리에는 표식과 함께 비장한 구절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길을 따르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자. 주님의 고난에 우리도 참여하자.’
벧전 2장 21절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간 고난의 길이요, 슬픔과 피에 젖은 길입니다.
과거의 많은 성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려고 했습니다. 앞에서 제가 이세종 선생님의 얘기를 했는데 선생님은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그것도 그냥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야 하는 좁은 문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움막에서 좁은 문을 만들어 놓고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좁은 문,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야 하는 좁은 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이현필 선생의 전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 분은 오장치 곧 오장이를 짊어지고 나서야 한다고 답하셨습니다. 거지가 빌어먹을 때 쓰는 오장이를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물에 퐁당 빠지듯이 믿어야 한다고 답하셨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거지 옷을 입고 겨울에도 맨발로 지리산 서러내라 하는 곳에 들어가 한번 엎드리면 영 일어날 줄을 몰랐었습니다. 산의 까마귀들이 죽은 송장인줄 알고 내려와 부리로 꾹꾹 찍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밤새 엎드려 기도하다가 새벽이면 산 밑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수염에 고드름이 달리고 잔등에 서리가 하얗게 덮혀 있었습니다. 거기다 맨발로 독사가 우글거리는 지리산을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피를 흘리사 구원받을 참 길을 열어 놓으셨느니라.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이렇게 눈물 흘리시며 하산하실 때 산 밑에 있던 제자들은 그를 맞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슷한 얘기는 유럽에도 있습니다. 분도 라브르라고 하는 성자는 큰 십자가를 일생동안 만들어서 그 십자가를 지고 13년 동안 유럽을 돌며 거지 순례를 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소서. 내 주여 오소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나 당신을 고대합니다. 나 당신을 탐합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하루가 내게는 천년과도 같습니다. 오소서. 내 주여! 지체하지 마소서.”
그는 마음 속에서 너무도 예수를 사랑하고 갈망했기에 가슴이 너무 뜨거워 겨울에도 앞가슴을 헤치고 다녔습니다.
유명한 성자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의 말년에 라 베르라라 하는 산에 들어가 40일을 금식했습니다. 제가 그의 전기를 썼던 관계로 그 산을 가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라 베르라산은 우리나라의 무주 구천동보다 깊어서 아침에 출발하면 해가 저문 밤에나 도착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가 성 프랜시스는 두 가지 제목을 가지고 기도드렸습니다.
“주여,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 하나는 당신이 겪으신 그렇게도 괴롭고 애처로운 고난을 나의 영혼과 몸안에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불타는 듯한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저도 당신을 향하여 품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한국 교인들은 ‘떡 주시오. 밥 주시오.’라고 기도를 하지만 이 분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케 해주시고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40일을 프랜시스가 라 베르라산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어느날 새벽 아직 동트기 전에 스랍천사가 여섯 개의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왔습니다. 그 스랍천사가 날아와 프랜시스가 기도하는 바윗돌 위에 앉는 그 순간 프랜시스는 자기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5개의 상처, 스티그마를 받고 마음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성 프랜시스가 받은 5상이고 성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흔은 프랜시스 외에도 여러명이 받았는데 두 손과 두 발에 예수님처럼 못자국이 생기고 옆구리에 창자국이 생겨 거기서 피가 계속 흘러나와 붕대를 감아도 붕대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어 그 산을 내려올 때에는 나귀를 타고 내려왔으며 프랜시스가 죽을 때까지 그 피가 계속해 나왔다고 합니다.
그 프랜시스가 오늘 20세기의 현대의 사람들에게 부르짖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20세기 기독교인들이여, 20세기의 성직자들이여, 내가 내 몸에 예수의 다섯 개의 상처를 받은 것처럼 20세기에 그리스도의 일을 하려고 하는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몸에 예수의 흔적, 다섯 개의 스티그마를 받아야만 여러분이 부르짖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주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픔을 가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아픔을 의미합니다. 우리 성직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아픔을 지니고 고난을 회피함이 없이 인류의 고난과 겨레의 고난 속에 서있어야만 합니다. 성자는아니지만 파스칼 같은 사람도 “우리는 우리의 가지고 있는 아픈 상처를 십자가 그리스도의 상처에 얹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셋째, 영을 받아야 한다.
암 8장 11~13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암 8장 11절 이하의 말씀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아주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외관상으로 볼 때에는 교회마다 만원이었지만, 실제 교인들의 영혼을 볼 때에는 기갈에 젖어 있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계속해서 기도원, 교회집회, 은사집회로 모이고 가정제단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예언집회, 신유집회가 끊일 날이 없지만은 실제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일천만명이요, 전국의 교회수가 4만 이상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왜 이모양입니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살인, 강도, 강간, 폭행, 자살, 데모, 노사분규 등이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기독교와 교회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운동은 육신생활의 다복이나 경제 부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18세기 이전의 영국 사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 사람들은 영국 사람의 영혼은 다 썩어버리고 육신의 본능만 활발하게 살아있는 그런 세대라고 그 시대를 평했습니다. 또 그 시대의 영국 아이들은 우리는 우리의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속에서 요한 웨슬레는 회개, 중생, 성령의 운동을 일으켜 영국교회를 건지고 나아가 영국의 국가와 사회를 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하기를 요한 웨슬레의 업적은 영국 국가가 19세기 이전에 바다와 육지에서 얻은 승리보다 더욱 훌륭한 승리였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에 이런 영의 사람이 한 명만이라도 존재한다면 우리 나라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스가랴 4장 6절에서 말씀하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건지는 일인 진정한 기독교 운동은 인간의 지혜나 수단, 경험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신학과 교리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무엇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우리가 신학교 다닐 때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학문이 많이 나옵니다. 경영학이니 성장학이니 하여 인간의 테크닉을 가지고 목회에 성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시편 62장 11절 “하나님이 한두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예수님께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이 한국교회에 신령한 영의 운동이 일어나고, 영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넷째, 진리에 미치자.
고후 5장 13~15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고 너무 열심과 열정을 갖게 되고 많이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욕을 자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용도 목사는 미치자고 하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그의 남긴 글을 보면 하여간 미치자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집회에 다니면서도 “하여간 미치자. 크게 미치자. 미친 다음에 글쓰게 하시면 쓰고 부르짖게 하시면 부르짖자. 어찌하든 진리에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급선무이다. 오! 형제여 육에 죽고 영에 살자. 땅에서 천하고 하늘에서 귀하자. 이것이 우리 주님이 밟으신 길이다.”라고 정열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바울이 만약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리고 그 아래 내려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사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들고 계십니다. 기독교인의 신앙과 감격과 은혜의 최고의 결정은 십자가 보혈, 사랑의 강권입니다.
예수를 60년 믿고 신ㆍ구약 66권을 통달하고 목사가 되고 큰 교회를 세우고 40일을 금식하고 해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감격을 모른다고 하면 그는 가장 불쌍한 교역자입니다. 우리 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는 이점을 반성해야 합니다. 개신교도들은 이신득의만 강조하면 되는 줄 알고 예수님의 피, 십자가 보혈의 사랑은 몰라도 괜찮은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도들은 이론은 잘 따지지만 예수를 사랑할 줄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가 점점 퇴색해가고 십자가의 감격이 희미해져가는 두려움을 느낌니다.
눅 23장 44~47절에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여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2천년전 먼 이스라엘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최근의 사건, 아니 바로 이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내 개인적인 십자가 사건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지리산에서 기도했다고 앞서 소개한 이현필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 갈보리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 내 가슴에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야 한다.”
저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골고다에 올라가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뒤에서는 사람이 밀고 앞은 막혔는데 한 5분 동안 기도하면서 그 피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산의 수도원에서 그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의 신앙의 절정인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제 영혼으로 똑바로 받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썩은 나무토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이천년 전에 말라붙은 얼룩자국이 아닙니다.
성경과 교리적인 조문을 외우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순간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내 개인적인 사건, 가장 엄숙한 사건이 중요한 것입니다.
같은 교단은 아니지만 죠지 폭스는 “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았다. 여러분은 그 피를 보지 못하는가? 그 피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보라. 지금 내 마음은 골고다의 메아리요, 지금 내 귀에는 무리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려오고 지금 내 눈 앞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모습이 보인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서 콸콸 쏟아져내려오는 그 피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59장 1절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고 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힌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통한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저는 예수 믿고 회개를 한번하면 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매일 회개해야만 합니다. 매일 철저히 회개해야만 우리의 영혼의 창문을 열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 론
매일 매일 내 가슴에 바다의 조수처럼 밀려오는 그의 보혈의 피, 십자가 보혈은 기독교의 절정이고 하나님의 사람의 절정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십자가가 희미해져가면 안됩니다. 교파보다 큰 것이 십자가의 보혈이고 이것은 교회보다도 큽니다.
이제 바울이 권고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강권하시기 바랍니다.
<E:\(1)2013-10-26 이전-주해\노트북자료옮김1\노트북자료1-C자료\자료1\주석\한신목회개발\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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