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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산구문화유산해설사 원문보기 글쓴이: 문대식
韓末湖南義兵
(光州地方을 中心으로)
의병정신선양회 광주지회장 문대식
1.의병의 의의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구국의 민병
2.역사적 실제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백제시대 수도가 함락된 뒤에도 왕족복신과 승려 도침이 당나라 군사들에 대한 치열한 항쟁을 4년간에 걸쳐 계속했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검모잠이 왕족 안승을 받들어 국내에서 당병과 싸웠고 고구려 유민이 발해란 새 나라를 세워 대륙민족에 대한 피나는 항쟁도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다.
고려시대는 몽고의 침략을 받았을 때 정부의 굴종적인 자세와는 반대로 배증손 김통정 등이 백성을 이끌고 진도와 제주도도로 들어가 독립 고려국의 슬로건 아래 최후까지 항쟁했던 것도 의병으로써 피 묻은 역사다.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 사실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으로써 곽재우, 승병을 이끈 휴정, 유정, 조헌, 정인홍, 김천일, 고경명, 최경희 등이 있었다. 거의 전국적으로 궐기한 이들 의병은 오히려 관군이상의 큰 활약을 벌였는데 이것은 이들 의병장의 대다수가 전직관리 유학자들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컷기 때문이다.
이들 의병의 활약으로 우리나라는 왜군의 급박한 추격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의병은 대체로 소규모 유격전을 활용했으나 금산,남원 싸움등과 같이 대군과 정면 충돌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관군에 적극 협력해 각지에서 왜군과 혈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의병운동 사상 빛나는 금자탑의 하나를 이룩하였다.
3.한말의병의 개요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은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의병항쟁과 애국계몽운동이 그것이다. 의병항쟁은 즉각적인 무력투쟁을, 계몽운동은 점진적인 실력양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일본의 침약이 가속화되면서 의병들의 항쟁도 점차 격렬한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1895년에 발생한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을 계기로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1904~5년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침략정책이 보다 노골화 되자 그것에 대항한 의병의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의 일제의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7.19)와 정미7조약의 체결, 군대의 강제해산(8.1) 조치이후 약 2년 동안 전국은 의병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1908년 이후가 되면 의병항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곳은 호남지역이었다. 1908년 일본군경의 교전횟수와 교전 의병 수에서 전라도는 각각 25%와 24.7% 1909년에는 각각 46.6%, 59,9%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광주지역은 당시 전남지역 중심지로서 의병의 모집이나, 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도 광주, 장성, 나주, 담양이 의병운동이 성한 지역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4.제1차 의병의 봉기와 광주
을미사변 이후 최초의 의병은 1895년 11월 26일 서울에 “창의소고시문”이 도하의 신민과 팔도의 백성들은 호천통곡하며 만대 후에도 잊지 못할 이 원수를 두고 잊을 수 없다“ 라고 나붙고, 11월 26일을 전후해 충청도 보은에서 문석봉등의 유생들이 거의 토역의뜻을 선포 하였으며 12월 30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2월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것이다. 호남지방은 고광순, 기우만, 기삼연등 유학자를 중심으로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자는 의논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기우만은 고을에 통문을 돌려 일제의 횡포와 군왕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그냥 둘 수 없다고 다짐한 후 상소를 올려 시국을 개탄하고 앞으로의 방책을 밝히고자 했으나 언로가 막혀 있으므로 주저하고 있었다. 그 무렵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점점 거세지고, 더구나 제천에서 류인석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과 그 통문이 당도하자 기우만은 본격적으로 거의 준비에 나섰다.
기우만이 광주 향교로 나아가 의사들을 모으고 규칙을 정한 뒤 전력을 논의하자 사방에서 의병이 모여 들었으며 관리들은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성에서 기삼연이 의병 300명을 이끌고 와서 군무를 지원하여 맡았다. 한편 나주에서는 민중과 이속들이 의병을 일으켰고, 해남군수 정석진과 담양군수 민종열 등이 뜻을 모아 창의의 깃발을 세우고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했다. 안종수는 과거부터 불법과 횡포가 심했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더욱 기고 만장하여 강제 삭발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기우만은 이 소식을 듣고 글을 보내어 나주 의병들을 격려하니,
그들은 더욱 힘을 내어 주서 이학상을 대장에 추대 하고 부서와 규율을 정한뒤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렸다. 점차 나주의병이 강해지자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기주현, 양상태 등 여러 의사들과 나주로 와서 단을 쌓고 굳은 맹세를 한 다음, 임진왜란때 의병장 김천일의 사당과 금성산에 제사를 올려 신의 가호를 빌고 민심도 안정 시켰다.
그리고 다시 각 고을로 통문을 돌려 4월 11일 광주에서 회합할 것을 아렸다. 당시 나주지역에 많은 의병들이 운집해 있었지만 광주가 호남의 중심지며 맨 처음 의거를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창의소 본부를 광주에 두기로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이 해남으로 들어가 의병에 참여한 정석진을 죽이고 이어 담양군수 민종열을 구금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유림이 중심이 된 의진은 크게 동요했다. 더구나 남로 선유사로 각지를 순회하던 신기선이 전주에 도착하여 의병해산을 종요하는 고종의 조칙을 보내자 기우만은 통곡하면서 의병 해산을 결심하였다.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음험하고 불측하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적을 토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 임금에게 화를 재촉하는 길이 되기에 알맞은 것인즉 자수하여 우리들의 의리나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
기우만의 광주의병은 거사일을 이틀 앞둔 4월 9일 해산하고 말았다.
광주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기우만은 전남 장성 사람이었다. 벼슬은 참봉을 하였으며 조선의 6대 성리학자며 위정척사론자인 노사 기정진의 손자로 가업을 이어받아 문유로 추대 받았다. 광주의병을 끝까지 해산하지 말자고 주장하던 기삼연은 전통적인 유가 가문에 태어나 전기 의병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의병장 이었다. 기우만이 의병장을 해산하려 하자 탄식하는 말에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선비와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것이며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 에랴 이 군사가 한번 흩어지면 우리들은 모두 왜놈이 될 분이다” 하고 돌아와 독자적으로 거의를 준비하다가 부왜인의 밀고로 전주 진위대로 압송되었는데 그날이 딸의 초례날이었다. 그는 서울 평리온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돌아와 은신 생활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후기 호남 의병장이 되었다.
5.을사조약체결과 의병전쟁의 발전(2차 의병)
을사조약(1905.11.17)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다시 의병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2차 의병이라고 한다. 호남의 2차 의병은 전북 태인에서 봉기한 면암 최익현과 전 낙안군수 임병찬이 주도하였다. 이때부터 호남의병은 전국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최익현은 위정척사파의 주도자였던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일찍이 대원군을 탄핵하여 하야시켰을 뿐 아니라 강화도 조약 때에는 격열한 상소활동을 벌여 당시의 유림들로부터 명망과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면암 최익현은 연재 송병선이 순절 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을 하면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뜻이 통하는 관료나 이름있는 유림이던 면우 곽종석, 간재 전우 등 에게 같이 거사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응답이 없자 임병찬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 했다. 최익현은 4월 8일(음) 담양의 용추사에서 기우만을 비롯한 남도선비 50명을 만나 결의를 다지고 “모두가 힘을 합하여 원수 오랑캐를 무질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 는 내용의 격문을 여러 고을에 통고 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드디어 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왜적이 주권을 장악하고 역신의 죄악을 빚어내 500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 한다면 천지신명이 도울 것이다”라고 역설한 후 사생을 같이 해서 거의 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일본정부를 성토하는 글을 보냈는데 거기에서 일본이 저지른 죄 16가지를 열거했다. 그 중요내용은 갑신정변을 일의킨 죄, 동학 농민혁명때 궁궐을 침입한 죄, 국모를 시해한 죄, 경제적 이권을 침탈한 죄, 토지를 점령하고 친일 분자를 추천한 죄, 한일의 정서를 강요한 죄, 충신과 공론을 막은 죄, 일진회에 협조하고 애국단체를 탄압한 죄, 한국인을 매매한 죄, 통신기관을 장악한 죄, 고문정치를 행한 죄, 차관을 제공하고 한국제정을 소비한 죄, 을사조약을 강요한 죄, 통감이 정치를 간여한 죄, 이민규정을 제정한 죄 등이다. 최익현과 임병찬등이 의병을 일으키다 흥덕의 고용진이 포수 30여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다. 이 의병 부대는 15일에 정읍을 점령하여 무기를 접수 하였으며, 16일에는 순창을 점령해서 부서를 새로 정하고 왜병 10여명을 성밖에서 격퇴시켰다. 17일 곡성에 진입해서, 18일 군수로 하여금 무기를 바치게 한 후 장성으로 향했다. 노령의 험준한 지리를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날 장성의 김송현 엄덕조가 포수 수십명을 거느리고 합세 하였다. 19일에 장성을 떠나 순창으로 향하였는데 도중에 왜병을 만나 격퇴하고 전주관찰사 한진창과 순창군수 이달용이 왜병을 인도하여 의병을 모해 하려고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노하여 군수를 죽이려 했으나 , 이 군수가 용서를 빌자 그를 선봉장으로 삼아 순창읍으로 진입했다. 20일 에는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해산을 권유하는 가운데 광주 진위대의 군사 50명이 옥과 30일 지점까지 육박했고, 전주 남원의 진위대 병사들도 진격해 왔다. 이에 최익현은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부하들에게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20여명은 끝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진위대의 본격적인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가 대전하다 쓰러지자 남은 자는 12인에 불과하였다. 22일에 최익현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 당하니, 이로써 최익현 임병찬 의병대는 막을 내렸다. 결국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순국 하였다. (1907.1.1)
최익현의 봉기는 당초 기대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봉기당시 전남 11개 군에 보낸 격문과 태인 정읍 순창방면의 행군은 호남 의병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호남 각지에서는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의병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06년 11월 백낙구가 고공순과 구례에서 거병하여 광양, 순천에 진출하였다. 1907년 3월 화순에서 양회일, 이백래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 동복, 능주를 휩쓸었다. 남원의 양한규는 고광순과 합심해 남원을 점령했다. 고광순도 창평에서 봉기하여 남원, 화순, 능주, 동복, 구례, 광양까지 활약 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이후에도 호남 각지에서 의병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리고 녹천은 8월 11일 연곡사로 들어가 “불원복” 세글자를 쓴 기를 말들어 달고 전투를 하다 1907년 10.11일 화개동 연곡사에서 전사 하였다.
6.제3차 의병의 항일투쟁과 광주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났던 때에는 호남지역의 의병봉기가 활발하지 못했으나 19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의병운동의 중심지역으로 되었다. 경술국치 이전의 의병운동은 호남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봉기한 의병의 수가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이나 일본군과의 교전횟수를 비교해 볼 때 그렇다. 제 3차 의병을 주도한 인물은
기삼연, 김용구, 고광순, 김준, 김율, 김동신,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양삼기, 이기손, 임창모, 조경환, 김원국, 조정인, 오정술, 오상열, 박시화 등이었다.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새로운 시기로 들어선 것은
기삼연의 봉기 이후라고 보인다.
1907년 10월 기삼연은 호남창의 회맹소를 결성하여 맹주에 기삼연이 추대 되었고 통령에는 김용구, 선봉에는 김준, 중군장에 이철형, 후군장에 이남규, 참모에 김화중, 종사에 김익중 등이 참여했다. 이 때 기삼연 의병장의 휘하의 간부들은 대개가 유생들이었다.
호남창의 회맹소 의진은 약 500명으로 고창, 영광, 무장지역에서 투쟁하였다. 1908년에는 담양, 장성, 함평, 등의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기삼연 의병진은 각기 독립된 여러 부대의 연합체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기삼연이 1908년 2월에 체포된 후에는 여러 의진으로 분화되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김용구는 기우만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구국의 뜻이 있어, 일심계를 조직하여 의병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1907년 8월 영광에서 거병하여 기삼연 의병진에 합진하여 통령으로 활약 하다가 기삼연 추월산 전투에서 부상 후에는 그 의병진을 담당하였다. 기삼연 사후에는 이의진은 김용구, 김준, 김율, 이대극, 이철형 등의 의진으로 분화되었다. 호남창의 회맹소의 선봉진인 김태원은
한때 동학농민군으로 활약 했다가 의병에 참가하여 그의 동생 김율과 같이 가장 뛰어난 활동을 했다. 특히 1908년 2월 2일에 담양의 무동촌에서 적장 요시다를 죽인일이 있었으며, 100~3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주를 중심으로 장성 함평, 영광, 담양, 나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4월 이후 에는 전남의 남부지역에서 안규홍, 심남일등이 봉기를 시작하여 의병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맺게 되었다.
안규홍은 보성에서 봉기하여 능주, 순천, 광양, 등에서 활동하였다.
안규홍은 안담살이라 불리 우는 머슴 출신으로 유생 의병장등과는 다른 특색을 잦고 있었다. 심남일은 함평출신으로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이라 불렀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이 농민, 상인, 목수등 민중 출신이었으며 주로 화순, 곡성, 보성, 장흥, 영암, 등지에서 전해산 안규홍, 조경환, 의병부대와 연합해서 작전을 펴기도
했다. 김태원의 뒤를 이어 호남 창의회맹소의 잔여 부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한 의병장은 임실 출신의 전해산 이었다. 그는 장성, 함평, 영광, 고창, 광주에서 500여명의 의병을 지휘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 활동 뿐 아니라 무뢰배 가짜 의병으로 민생을 괴롭히는 자들을 처단하여 치안유지에도 공헌했다. 또한 양진여 박도경, 조경환이 봉기하였다. 기삼연 김태원 의병부대의 잔여 세력은 그 부장급 있었던 박도경 등에게 재 규합되어 활동을 지속하였다. 양진여는 1908년 3월 광주에서 봉기 하였는데 5월 에는 그의 아들 양삼기가 양진여의 병력중 일부를 가지고 담양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였다. 조경환은 본래 김태원 의병진의 부장이었는데 김태원이 죽은 후 그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1908년 5월경에 함평에서 봉기하였다. 나주, 광주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 1월 10일 광주군 어등산 운수동에서 부하 20여명과 전사 하였다.
김원국, 김원범 형제 의병장으로 광산군 사람이며 김원국은 김태원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광주를 중심으로 활약했고 조경환과 동생 김원범이 사망하자 독립부대를 개편 100여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활약하다 함평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 광주 순사대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7. 남한 大 討伐作戰의실시와 의병전쟁의 쇠퇴
1909년 여름에 들어서도 의병 투쟁이 진정되지 않자 일제는
대규모 작전을 실시 했다.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 이다. 1909년 9월 1일부터 2개월 여에 걸쳐 실시 되었다. 당시 대구에서 주둔하고 있던 한국 임시 파견대 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전라남북도의 의병들을 섬멸 한다는 목표아래 실시되었다. 동원된 병력은 보병 2개 연대 및 해군 제 11정대 그리고 현지 경찰력, 헌병 등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공격은 육상으로는 전북 부안, 태인, 남원을 잇는 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섬진강 상류로부터 하동 고포에 이르는 외곽선으로 하였다. 사령부는 9월 1일 남원에 두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헌병대 병력이 총동원되어 군경합동 작전으로 토벌을 하여 15일 까지는 광주에 두고 이후 영산포, 목포로 옮겨갈 것을 계획하였다. 토벌기간 동안 토벌대는 병력을 5내지 10명으로 대를 지어 촌락과 산야를 구분하지 않고 의병의 색출에 전력을 다하였다.
전남경찰서가 보고한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자 : 420명
2. 체포 또는 자수자 1867명
3. 노획한 총기 455정
4. 체포된 주요수괴 : 심남일, 안규홍, 황두일, 박사화, 나성화, 박영근,
강무경, 손덕오, 양진여, 권택, 모천년 등 26명
5.살육된 주요 수괴 : 임창모, 임학규, 손참봉, 기타 소수괴와 화적의
수령이었던 자 수십명
이 토벌작전 결과 호남지방의 의병운동조직이 급속히 해체되었고 의병조직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의해 수색 토벌이라는 이름
아래 살육 또는 체포됨으로써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 역량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병운동이 진압됨으로써 한말 의병전쟁
도 퇴조기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의병운동의 잔여세력은 대부분이 만주지역으로 퇴각하거나 국내의 지하로 숨어들어서 1919년 3.1운동 때 까지 산발적인 저항을 보였으나 국내 의병은 1910년 경술국치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8.맺는말
한말 호남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심남일은 이렇게 말하였다
“의병의 본뜻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말의 구국운동인 의병 전쟁은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초들이 맨주먹으로 일으킨 것이다. 그것의 승패는 처음부터 불 보듯 뻔했다. 그 점은 의병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 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털끝만치도 굴복하는 빚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우발적이거나 일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계승 발전이라는 깊은 뿌리를 가진 당연한 결과였다.
일찍부터 충절과 의리를 소중하게 지켜온 호남인들은 임진왜란 때에도 빈사 상태에 빠진 나라와 민족을 구출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대열에 앞장섰다. 또한 1894년에는 이 나라의 자주 독립과 봉건 질서 타파를 위해 동학농민전쟁을 전개했다. 새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동학혁명이 일본의 신무기 때문에 좌절된 뒤로도, 날로 더해가는 일제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한말 의병운동의 선두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 이었다.
충절과 의리를 기본정신으로 삼은 호남인들, 그들은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지탱해 주는 지주로서, 역사발전의 견인차로서 그 소임을 훌륭하게 수행 했던 것이다.
# 참고문헌
1. 기려수필
2. 매천야록
3. 한국독립운동사
4. 전남폭도사
5. 폭도에 관한편책
6. 의병운동사
7.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