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9일 토요일
◑ 오늘의 말씀 묵상 ◑
※ Hallelujah!
- 오늘은 행복한 2019년 마지막 주말인데, 많이 쌀쌀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 유난히 급변하는 시대에 다사다난 했지만, 역사적인 순간들을 힘차게 달려오시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 이제 때가 가까움을 알고 복음과 함께 살아온 지난날 나의 결산서를 하나님 앞에 내어 들이는 송년 주말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욥기 19장 1- 12절 }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 제 목 ◑◑◑◑
◗◗ 빌닷에 대한 욥의 2번째 답변
◑◑◑본문 이해와 요약 ◑◑◑
◗ 19장에서는 욥은 친구들이 열 번이나 자기를 꾸짖고 심지어 말로서 학대하였다고 말합니다.
- 여기서 열 번이라는 말은 정확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주 또는 계속해서 거듭 된 반복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 사실 욥의 친구들은 친구인 욥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흉악한 죄인으로 몰아가면서 한두 번 비난한 것이 아니라 똑같이 비슷한 내용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욥의 마음을 찔러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 욥은 친구들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자신을 힐난한다고 비판하였는데, 그는 친구들이 자신을 정죄하는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그래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고 있으며, 친구들의 정죄함이 인정사정도 없이 무자비한 것이며, 어리석은 말들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 친구들을 책망한 욥은 먼저 하나님이 욥을 굴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그물로 욥을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 이 말은 욥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욥은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 고통이 더욱 심해졌기에 절망하였던 것입니다.
-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고 잠잠하실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며 깊은 절망 속에 빠지는데,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그러한 절망 중에서도 영원한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 위에 인간적인 사랑과 동정마저 빼앗아 갔다고 비탄해 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서로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면서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만, 욥에게 닥친 환난으로 인해 가족들과 친구들, 그밖에 모든 사람들이 욥을 멀리하여 외계인처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또한 욥은 심한 고통 가운데서 친구들에게 동정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말이 책으로 기록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 아마 욥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으며, 그래서 기록될 것을 간절히 바란 후에 자신이 육체를 떠나 구속자를 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 욥은 두 가지의 의미로 자신의 구속자를 기다렸는데, 하나는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육체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구속자를 기다렸고, 또 하나는 자신의 무죄함을 변증해 주실 구속자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 그런즉 욥은 구속자를 기다리면서 이제 그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자신이 직접 보겠다고 말합니다.
- 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뵐 때 자신의 마음이 조급하겠다고 하였으며, 이 말은 욥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줄 증인 앞에 하루 빨리 서고 싶어서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그리고 욥은 자신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무죄한 고난을 겪고 있는 자신을 향해 계속 비난과 조소를 하며 정죄했던 친구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 결론적으로 욥을 향해 빌닷이 맹렬히 비난을 하고 난 후, 이에 대한 욥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욥은 친구인 빌닷의 가혹하고 맹렬한 인심 공박에 대하여 그의 그릇된 점을 책망하였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통을 더한 것에 대해 친척과 친구들이 자비를 베풀지 않음에 애통해 하였습니다.
- 끝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내세에 대한 소망과 구속자를 사모하는 욥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욥의 부활 사상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부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제하고 인내로 근신하게 됩니다.
- 그러나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 부활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믿고 어떤 고난에서도 의연히 대처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위로의 말 한마디에 생기를 얻는다.( 욥기18장 2,3절)
◈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우리가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은 정죄가 아닌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마음입니다.
➩ 2-3절을 살펴보면 욥은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대까지 하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 하는구나.”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번뇌하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마음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크게 괴로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리고 ‘열 번이란’ 이란 문자적 의미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론적 사고에 근거하여 욥의 고난이 그의 악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거듭하여 주장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거듭된 주장은 극심한 재앙과 질병으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욥으로 하여금 그러한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므로 욥은 지금 친구들을 향하여 언어 폭력적으로 자기를 학대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각이 있는 우리가 생각하여 봅시다. 욥의 친구들이 악한 자들이었습니까?
- 욥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작정하고 욥을 학대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본래 욥을 사랑하였던 친구들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욥이 재앙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를 제쳐두고 단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 그런데도 그들은 욥에게 도리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 자기를 학대하는 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욥이 완악해서입니까?
- 욥이 교만해서 자기의 악함을 지적하는 친구들의 충고를 멸시하였기 때문입니까?
- 욥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욥이 아닌 욥의 친구들에게 있었습니다.
-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 고난에 처한 욥을 보았을 때 아무런 말로도 욥을 위로하지 못하였습니다.
-욥기2장 13절에서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 이유는 욥의 고난이 극심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 이 말은 일차적으로 욥의 친구들이 욥의 극심한 고난에 대하여 감히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하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욥의 극심한 고난이 욥의 숨겨진 어떤 큰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감히 욥을 위로하려고 시도하지 못하였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는 욥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탄식을 발하였을 때, 욥의 친구들이 욥의 그러한 태도를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징벌에 대하여 불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책망하기 시작함으로써 논쟁이 시작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어쩌면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불경한 욥을 책망하지 않으면, 자기들 역시 욥의 죄악을 용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을지 모른다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 욥의 말의 논조에는 분명 그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 결국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는 말 대신에 정죄하고 책망하는 말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이 욥을 고통스럽게 하고 학대하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은 정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누가복음 6장 37절에서 “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 아무리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도 정죄만 하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 그것은 도리어 그를 학대하고 고통스럽게만 할 뿐이기에 중요한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정죄만 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결국 이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정죄만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고통과 고난 속에 있을 때에 지인들이 위로 차 찾아와서 하는 말 중에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고난과 역경 속에 있는 사람에게 방문 하면서 취할 합당한 태도는 무엇인지? 혹시 위로보다 충고의 말로 마음에 절망감을 주고받은 적은 없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말 한마디가 생사를 결정짓게 합니다. 위로의 말 한마디에 생기를 얻게 됩니다.
- 사랑의 관심 속에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죄를 용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 죄 지은 일이 명백한 데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직선적으로 정죄하는 것은 우리의 정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 골로새서3장 12,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 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 우리에게는 죄인을 정죄할 권한이 없으며, 다만 정죄하고 징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도 죄인들을 정죄하신 일이 없습니다.
-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해서도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용서하여 주셨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돌려보내었습니다.
- 그러므로 오늘 내가 죄인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도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이며, 이것이 나 역시 죽어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마땅히 실천 준행할 일이므로 사람에 대한 여죄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나에게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따뜻한 말 한마디로 생기를 넣어주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