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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9월29일(목)맑음
1. Enlightenment is our true nature and our home, but the complexities of human life cause us to forget. That forgetting feels like exile, and we make elaborate structures of habit, conviction, and strategy to defend against its desolation. But this condition isn’t hopeless; it’s possible to dismantle those structures so we can return from an exile that was always illusory to a home that was always right under our feet.
깨달음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자 고향이지만 복잡한 삶이 그걸 망각하게 만든다. 그런 망각이 유배같이 느껴지면 우리는 유배 생활의 황량함에 대항하기 위해 습관과 신념이란 정교한 구조를 만들어 방어기제로 삼는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런 구조는 해체될 수 있기에 가상의 현실인 유배지에서 우리 발밑에 늘 있었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
For many of us, there’s something pushing us and something pulling us toward homecoming. We’re pushed by our own pain and the pain we see in the world around us; we’re pulled by intimations of something larger and truer than our ordinary self-oriented ways of experiencing life. Here’s a tradition that says, yes, we understand that, and there are ways to make those intimations not simply a matter of random chance but readily and consistently present. It’s possible to make ourselves available, in all the hours of our days, to the grace we so long to be touched by, and to spread that grace to the world around us.
우리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에 끌려가거나 밀려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으로부터도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는 세상에서 자아 중심으로 흐르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진실한 어떤 것이 있다는 암시에 우리가 이끌린다. 거기에 대해 그렇다! 고 말하는 하나의 전통이 있다. 이런 암시란 우연한 일이 아닐 뿐아니라, 늘 거기에 있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 생애의 모든 시간 동안 우리가 그렇게도 접촉하기를 바라는 은혜(신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아니라 깨달음의 기쁨이랄까 만물과 하나-됨을 느낄 때의 경이와 환희)를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내 주위의 세상에 그 은혜를 두루 펼칠 수도 있다.
Great Ancestor Ma of China assured his students that “for countless aeons not a single being has fallen out of the deep meditation of the universe.”
중국의 마조 대사는 제자들에게 “영겁의 세월 동안 한 중생도 우주적인 깊은 명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확언했다.
We enter a phase of awakening that includes, perhaps surprisingly, endarkenment as well as enlightenment. Awakening is a marriage of wisdom and compassion, and both wisdom and compassion are made up of enlightening and endarkening. The enlightening aspect of wisdom is a growing clarity of insight that puts doubts to rest and creates confidence. It’s about what we come to understand. The endarkening aspect of wisdom is our profound acceptance of the great mystery at the heart of things, which we can never understand in our ordinary ways but can come to rest in. This is about knowing what we can’t know, and it’s sometimes called “not-knowing mind.”
우리는 깨달음의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건 아마 놀랍게도 밝아짐(en-lighten-ment)뿐만 아니라 어두워짐(en-darken-ment)도 포함한다. 밝아짐이란 지혜와 자비의 결합인데, 지혜와 자비는 밝아짐과 어두워짐으로 이루어진다. 지혜의 밝아짐 측면은 의심을 쉬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생기게 하여 꽤 뚫어보는 힘을 분명하게 증장시킨다. 그건 우리의 이해력과 관계된다. 지혜의 어두워짐-측면은 사물의 중심에 깃든 큰 신비를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과 관계한다. 그건 가끔 ‘알지 못하는 마음(숭산선사가 외국인 제자들에게 don`t know mind, 돈노우 마인드,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이라 불린다.
The enlightening aspect of compassion includes our shining commitment to everyone’s freedom from suffering. The endarkening aspect of compassion is our willingness to have our hearts broken by the world, so our hearts remain open and not defensive. As we endarken, we see that we are not only continuous with the luminous nature of the universe but also continuous with the great broken heart of the world; we and the world share a tenderness that is both poignant beauty and wound.
자비의 밝아짐 측면은 모든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빛나는 헌신을 포함한다. 자비의 어두워짐 측면은 세상 때문에 기꺼이 고통받으려는 자발적 태도이다. 그래서 자기의 가슴이 열려서 방어적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어두워질수록 우주의 빛나는 성품과 함께 지속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통에 크게 아파하는 마음도 지속된다. 그래서 자신과 세상은 통렬한 아름다움과 상처 둘 다를 가진 유연함을 나누게 된다.
2. In our yearning for enlightenment, we might hope that it’s a state of unfluctuating perfection that solves the problem of the constant change that roils our lives. But if we see what we’re doing as awakening, something that unfolds over a lifetime, we understand that each of us is somewhere in the middle of a long walk through varied terrain. Then our task is to stay alive to the changes in that terrain and to trust the path as it appears before us, rather than try to impose our map on it.
깨달음을 그리워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삶을 휘젓는 끊임없는 변화라는 문제를 해결해줄 부동의 완벽한 상태일 거라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이라면서 우리가 하는 일-그건 평생에 걸쳐 벌어지는 일인데-을 보게 되면, 우리 각자는 다양한 지형(상황, 형편)에 걸친 긴 여정의 중간 어느 곳에 처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이란 그 지형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응하여 생생하게 살아감이며, 자신의 지도(목표, 비젼)를 지형 위에 덮어씌우기보다는 자기 앞에 나타나는 길(현재 자기가 처한 현실)을 신뢰하는 것이다.
There are seasons in awakening. The winter of awakening is crystalline in its purity. The snow, which has been called Guanyin’s cloak, covers all distinctions, differences, and defining characteristics in unbroken white, and the gaze relaxes. This is the wisdom of equality; it’s bright, and a little cool.
Then, if we let it, spring comes with its exuberances and profusions, revealing the warm wisdom of differentiation. Now the distinctions between things, and the particular beauty of each thing, are important. If in awakening’s winter we love everything equally, in its spring we love each thing for itself.
깨달음에는 계절이 있다. 깨달음의 겨울은 수정 같은 순수함이다. 관세음보살의 겉옷(얇은 비단 옷)이라는 눈은 모든 분별과 차이와 특성들을 잡티가 없는 하얀색으로 덮음으로써 시선이 편해진다. 이것은 평등성지이다. 밝지만 조금 서늘하다.
그리고 봄은 윤택함과 풍요로움으로 온다. 그건 따뜻한 차별의 지혜를 드러낸다. 이제 사물 간에 분별이 생겨나고 개별적인 아름다움이 중요해진다. 깨달음의 겨울에는 만물의 평등함을 사랑하고, 깨달음의 봄에는 각자의 개별성을 사랑한다.
Both winter and spring are part of what’s true, as are summer and autumn in their turn. In welcoming awakening’s seasonal transformations, we discover a greater truth that shows us a new way of trusting the very change we once thought a problem.
겨울과 봄은 여름과 가을이 그런 것처럼 실상의 한 부분들이다. 깨달음의 계절이 변화하는 걸 반긴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문제라고 여겨왔던 바로 그 변화를 신뢰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는 더 큰 진리를 발견한다.
Awakening has its ebbs and flows, too. People often get worried or discouraged when nothing seems to be happening in their spiritual life. But because something isn’t apparent in our conscious awareness doesn’t mean it’s not happening at all. When the field appears fallow, we can learn to trust what’s going on underground, in the dark, invisible to us. In fact, it’s essential that along with the lightning comes the quiet dark, when radiant bursts are taken in and made part of the whole.
깨달음에는 썰물과 밀물이 있다. 사람들은 가끔 수행하는 동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걸 걱정하거나 낙담한다. 자신의 알아차림이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논밭을 경작하지 않는 동안 우리는 땅 밑 깜깜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걸 신뢰할 수 있다. 사실 번개가 치면 고요한 어둠이 따라온다는 것이 기본이다. 빛의 폭발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전체로 통합할 때이다.
We can learn to trust the relentless stripping of winter as much as the bursting buds of spring—as do the plants, taken down to bare root and then blossoming again. To agree to all the seasons and tides of awakening means that we are always walking the Way: while there are times we won’t understand, there are no detours, no causes for disappointment. Though sometimes obscured by clouds, there is only the rising dawn, long and slow, that we walk within.
벌거벗은 뿌리로 돌아갔다가 다시 꽃을 피우는 식물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새싹들이 돋아나는 봄과 함께 사정없이 벗겨내는 겨울을 믿는 걸 배울 수 있다. 모든 계절과 깨달음의 밀물과 썰물을 긍정하는 것은 항상 길을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끔은 돌아갈 길도 없고, 실망할 이유도 없이,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가끔은 구름에 싸여 깜깜해질 때도 있지만 다시 새벽은 오고, 우리는 멀리 천천히 내면의 길을 간다.
-Joan Sutherland, Roshi, is a founder of the Pacific Zen School (a contemporary koan school), as well as the founding teacher of The Open Source, a network that includes sanghas in Colorado, Arizona, and the Bay Area. Now retired from working directly with students, her teachings continue through Cloud Dragon, an online source for her writings and talks. She is the author of Vimalakirti & the Awakened Heart and Acequias and Gates: Miscellaneous Writings on Miscellaneous Koans.
조안 서더랜드: 태평양 선종(현대적 공안 학교)의 창업자, 여성 선사. 콜로라도, 아리조나, 태평양 연안의 승가를 포함하는 네트워크인 <열린 근원>을 창업했다. 지금은 제자들을 직접 만나는 일에서 은퇴하여 <구름용>이라는 온라인 사이트로 글쓰기와 법문을 통하여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다. 유마경과 반야심경 및 무문관의 저자이다. 여러 공안에 대한 다양한 글을 썼다.
3.
Watching the moon
at dawn,
solitary, mid-sky,
I knew myself completely:
no part left out.
—Izumi Shikibu
중천에 외로이 뜬
새벽달을 보면서
나 자신을 완전히 알았네,
한 부분도 남김없이
-이즈미 시키부,
When buddhas don’t appear
And their followers are gone,
The wisdom of awakening
Bursts forth by itself.
—From Nagarjuna`s verses from the Center, translated by Stephen Batchelor
부처님들도 나타나지 않고
그의 추종자들도 사라질 때;
깨달음의 지혜는
스스로 폭발한다.
-용수존자의 중론 게송 가운데, 스티븐 베츨러 영역
2022년10월1일(토)맑음
58.1kg. 가을 냄새가 난다. 오전에 요가하고 오후에 기도와 명상하다. 정원에 금목서 향이 은은하다.
2022년10월2일(일)맑음
어리석은 사람은 돈을 버는 데 시간을 쓰지만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산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지구의 다른 생물을 체치고 인간을 제일 포식자로 떠오르게 했다. 세상에는 실재하지 않는, 인간의 머리에만 있는, 생각으로 만들어낸 ‘국가’, ‘가족’, ‘민족’과 같은 신념이 집단을 이루어, 무기를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켜 자연을 정복했다. 인간의 상상력은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상상력의 부정적인 면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가져오는 신념이 ‘자아’ 관념이다. 인간의 모든 신념 체계는 기본적으로 두뇌가 지어낸(行, 상카라) 환상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런 환상이 힘을 발휘하는 건 인간은 네 편, 내 편으로 뭉쳐서(편 가르기, 내 편으로 뭉치기), 싸움하기를 좋아하는 습관 때문이다. 이것은 진화과정에서 획득되어 강화된 것으로 현생 인류에겐 거의 본능에 가깝게 되었다. 오늘도 한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준전시체제로 대결하고 있고, 광화문 광장에서는 진보와 극우가 서로 대치하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전쟁 중이며, 이란과 미얀마에서는 준-내전 상태에 있다. 사람들, 참, 싸우는 걸 좋아한다. 아니 호모 사피엔스에겐 죽이는 것이 제일 신나는 일이며 최고의 놀이인가 보다.
2022년10월3일(월)흐림
저녁 강의하다. 14명 참석.
<마음의 본연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저절로 해탈하는 법>
Dharma teaching is every where if you are aware and look at carefully. Many times in Nepal I see crows chasing an eagle.
The only bird that will peck an eagle is the crow. It sits on the eagle's back and bites its neck. However, the eagle does not fight the crow. It simply opens its wings and begins to soar higher into the sky. The higher the flight, the harder it is for the crow to breathe. Eventually, the crow falls due to a lack of oxygen.
당신이 깨어있어서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곳에 있다. 내가 네팔에 있을 때 독수리를 쫓는 까마귀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독수리 머리를 쪼는 새로는 까마귀가 유일하다. 까마귀는 독수리 등에 올라타서 그 목덜미를 쫀다. 그러면 독수리는 까마귀하고 싸우는 게 아니고, 날개를 펼쳐서 하늘 높이 올라갈 뿐이다. 독수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까마귀는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까마귀는 산소가 부족하여 떨어진다.
-이것은 수행자가 어떻게 번뇌를 떨쳐내는지 알려주는 법문이다. 까마귀는 귀찮은 번뇌 망상. 독수리는 알아차리는 마음. 까마귀가 독수리 등에 올라타고 목을 쫀다. 번뇌가 마음에 올라타고 마음을 성가시게 건드린다. 독수리가 까마귀에게 반응하지 않고 다만 높이 솟구쳐 오른다. 번뇌 망상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관점을 하늘처럼 넓게 높인다. 그러면 하늘처럼 무한하게 넓어진 마음에 까마귀는 저절로 떨어져 흔적이 없어진다. 이것이 마음의 본연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저절로 해탈하는 법이다.
2022년10월4일(화) 비온 후 맑음
어제 밤새 비 오고 바람 불더니, 새벽엔 한바탕 세찬 비가 쏟아진다. 오후에 맑아지다. 산내들에서 점심 공양하다. 문정 보살이 내일 수술을 받기로 계획되어 있기에 도반들은 오늘 함께 공양하면서 쾌차를 기원한 것이다.
2022년10월5일(수)흐림
세상과 물질의 한가운데 있던 생명은 반투명한 반투성 막 membrane에 의해 세상과 분리되었다. 생명은 시공간이 막으로 둘러싸 있고 물을 머금은 캡슐 capsule이다. 생명은 열을 잃고 해체되는 경향이 있는 우주에서 자기 생산적 auto-poetic인 미학적 혼돈이다. 생명은 과거를 보존하고 과거와 현재 사의 차이를 만들면서 시간을 포착하고 복잡성을 계속 확대하면서 스스로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창출해간다.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
오전에 명상기도하고 문정보살의 쾌차를 축원하다. 사천 비란치아에서 점심 공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