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2
(원인)
남침
한국 전쟁은 북한의 의지로 발발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이 과거에 있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도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고도 주장해 왔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 등의 국가에서 과거에 제기되었던 한국 전쟁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과 주장들이다.
스탈린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 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부라야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현 부라야트 공화국)의 기갑부대 군사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조선인민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50여 회 가량을 한국 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하였고,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이후에 전쟁을 승인하게 되었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내란 확전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유엔군도 진격 시작, 평양 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
고착 전쟁(1951년 6월 ~ ): 중국 인민해방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 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위주이거나 그를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인민군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경과
북한의 김일성의 명령 하에,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소련에서 지원한 최신형 T-34/85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93]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장비도 부족했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창동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오전 2시 30분에 폭파를 맡은 장교 세 사람에 의해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미국 공군 항공기가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항공기 투하용 ‘AN-M64’ 미제 폭탄”을 한강 대교와 한강 철교에 투하했다.
북한의 남침은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주미 한국대사 겸 UN 한국 대표 장면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짊어지고 비장한 결의로 6월 24일 당일(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미 국무성과 철야 협의한 결과 한국문제를 익일 UN안보이사회에 긴급제소하여 25일과 27일의 결의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회원 국가는 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사태를 중시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다시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 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 해안의 해상 봉쇄를 명하였다. 그 사이,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이어 7월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8일에는 유엔 결의에 의한 유엔 깃발이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95]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유명한 대전 전투(7월 20일)를 비롯한 전쟁 초기에 있어서 미국 제24사단과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북한군의 작전에 대항하여 지연 작전으로써 후방의 한 · 미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대전을 넘어선 북한군은 진로를 세 방면(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및 포항)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북한군은 호남 평야를 휩쓸고서 남해안 연안으로 침입하는 한편 경북 북부 전선과 동해안 전선과 호응하여 세 방면으로부터 부산-대구의 미군 보급선을 절단하여 한미 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한 · 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은 8월 15일 대구를 침공하고자 대구 서남북방에 6만의 병력과 수십대의 전차를 집중하였으나 16일 미국 공군 B29의 전략적 대폭격으로 말미암아 완전 궤멸되었고 한편 이 사이에 연합군 병력은 한국군 5개 사단을 비롯하여 미군 4개사단, 영국군 2개 대대, 호주군 1개 대대 그 밖에 10개국에서 파견된 수만의 연합군으로써 증원되어 이렇게 북한군의 주력을 유도흡수한 연합군은 마침내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총지휘하에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97]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동반하여 서울 수복식을 거행하였고 비로소 90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서울 시민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어 10월 19일[98]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고,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99]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중국 인민 지원군 28만명이 전투에 개입하여(11월 28일)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연합군은 장진호 지구의 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철수 작전을 시작하여 서울 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 와중에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발발과 서전(緖戰)
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공산 국가의 맹주격인 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권에 뿌린 관계로 당시 북한 뿐만 아니라 공산계의 주력 전차였다
개전 초기 북한 보병의 기본 화기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 개성 · 동두천 ·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101]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102]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개성, 문산 전투
한국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104] 일대에서는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웠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 휘하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km, , 제13연대는 제12연대 배치지역의 서쪽 끝인 예성강 유역부터 20km(즉,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 구간)에 이르는 38선, 즉 국경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 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서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 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105] 제12연대를 좇아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6월 28일)
의정부 전투
6·25 발발 직전, 의정부 포천 지역의 38선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의 예하 제1 · 9연대와 포병, 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1연대는 동두천 정면(서쪽), 제9연대는 포천 정면(동쪽)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여 제1군단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발발 당일, 영내에 대기하고 한국군 제9연대를 북한군 제3사단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 · 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1·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이상, 6월 25일) 이로써 의정부가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강릉 전투
육군본부의 대응
당시 육군의 총지휘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었다. 개전 당일(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채 참모총장은 육사교도대 생도 1기(262명) 및 2기(227명)를 포천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하였다.(6월 25일 오후)[108] 채병덕은 다음날(6월 26일) 오후의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한편, 육군본부 상황실의 당직하사관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 분주하게 상황을 접수하고 있었다. 아침 7시 이전에는 육군본부로 이어지는 군의 주요통신망이 재경유격대들에 의해 절단되었고 북한군은 한국군의 통신망을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에 역이용하고 있었다.
서울의 상황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UP통신사의 서울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발송한 전문(電文) 기사 내용에 대하여 UP통신사의 도널드 곤잘레스(Donald Gonzales)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에게 확인을 요청하였다.(오전 11시 4분)[112]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도 11시에 워싱턴D.C.에 전화를 걸어 “북한군이 한국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고 보고했고, 북한의 공격 상황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워싱턴 당국은 이 공식보고를 6월 24일 21시26분에 접수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7시간26분 후였다.[113]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 딘 러스크는 동국(同局)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잭 제임스가 타전한 기사(전쟁 발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14] 한편, 전쟁 발발에 관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5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116]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117]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119]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보도연맹 사건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조선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학살은 주로 국군(육,해,공군)과 서북청년회(단)등의 극우 폭력단체의 의해 자행되었으며 , 미국 문서에서 미군정 미군 장교의 참관과 허가 최종 지시로 밝혀져있다.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 보병의 기본 화기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121]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22]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124]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124]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7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견해가 나뉘어 있다.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견해 중 많은 학자들이 춘천전투에서의 국군의 방어가 인민군을 저지한 것이 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이유로 보고있다. 이 2사단[127] 은 의정부에서 조선인민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낙동강 방어전
낙동강 전선에서 미 육군 24사단 소속 M24 채피 전차와 전차병들 (1950년 8월 17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다시 진로를 3분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湖南) 일대를 휩쓸고 마산으로 닿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동으로 포항에 육박했다. 유엔군은 총사령부하에 한국군까지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완료한 때였다.
8월 7일 유엔군은 마산지구에 미 제 25사단 · 34사단 기타 제5전투단 · 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을 목표로 육박하는 북한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3일 동안에 60리를 진격, 한국군의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하동지구를 탈환했다. 이것은 6월 25일 이후 유엔군이 가한 최초의 본격적 반격이었다.
8월 13일에는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을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북한군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
이 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미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 후 북한군은 대구를 피하여 동·서로 부대를 이동하더니, 최후의 결전인 제2차 협공(挾攻)작전을 기도했다. 서남지역 진주(晋州) 방면에 북한군의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집결하고,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 역시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동시에 유엔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미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기진하였으며, 훈련도 되지 않은 신병들을 보충 병력으로 편성한 상태였다.
서남지역에서는 마산의 미 제2사단·25사단이 북한군의 계속되는 야습공격을 막아서 격퇴시켰으며, 동부전선에는 한국군 제2군단이 9월 10일 최강을 자랑하던 북한군 제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永川)지구에 몰아 포위하고 4,8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 수 많은 차량과 전차 무기 등을 빼앗아 완전 섬멸한 후 단번에 15km를 북진하여 적의 기세를 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워커(Walker) 중장은 12일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북한군의 남침 공세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유엔군의 북진이 있을 뿐이었다.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육군소장 백선엽이 전투로 낙동강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 등의 증원 파병때까지 여유 시간을 획득했다.
다부동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월까지 북한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UN에서의 설득 작업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130] 의장석에 앉은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그 동안의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과,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130] 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측 대표 단장 장면은 8월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는 끝내 장면의 착석을 거부했다.[130] 또한 말리크는 “6‧25 동란은 인민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였다.[130] 소련 측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한 장면은 미국 측 대표 오스턴과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130]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반박하였다.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관련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에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 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소련 측이 제시한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장면 대표는 9월에 열린 UN 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는데, 9월 안보리 의장국은 영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 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131] 여 장면 대표는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 대표는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131]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대한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132]
그는 약 40여 분간 공산권의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출처 : 위키 백과 ,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