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주중 행사로 집안에서 하는 일이 한 가지 생겼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내 손으로 직접 육수를 끓이는 일이 그것이다. 십여 년 넘게 해왔던 심리학 공부를 그만두고 나서부터니까, 아마 한 사오 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지 싶다. 일주일에 하루쯤, 결혼식을 비롯한 각종 경조사에 참석할 일도 없이 집 안에서 느긋하게 쉬는 날, 그러니까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전에 육수를 끓일 때가 많다. 그리고 그날 점심은 흔히 잔치국수라고 부르는 물 국수를 먹게 된다.
육수를 끓이기 위해서는 평소 재료를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내가 애용하는 주재료는 해산물이다. 그중에서도 멸치와 마른 새우, 다시마는 필수 재료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다 바지락, 미더덕, 꽃게 등 해산물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넣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질 좋은 육수를 만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쪽파나 대파, 양파, 애호박, 부추, 김치, 당근, 청양고추, 참기름이나 들기름, 깨소금, 김, 달걀, 어묵, 고춧가루, 조선간장, 양조간장 따위도 가능한 한 많이 갖추어 둬야 할 부재료에 속한다. 내가 뭐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고, 늘 직접 요리를 해 먹을 만큼 시간적 여유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필수 재료와 몇 가지 부재료만큼은 재고가 바닥나지 않도록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 준비된 육수가 없어서 불편해하는 사람은 우리 집 식구 중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휴일 오전에 굳이 시간을 내서 육수를 끓이게 된 이유는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물 국수를 잘하는 집이 없기 때문이었다. 밀가루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나나 우리 아이들이나 평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밀가루 음식을 두루 즐겨 먹는 편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국수와 라면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거르는 일 없이 주 1회씩은 먹는다. 그리고 자장면, 짬뽕, 칼국수, 수제비는 2주에 한 번 정도 먹고 있다. 분식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아내는 내가 거의 밀가루 중독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 이상은 먹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있으니, 내성이나 반복성의 측면에서 그리 우려할 만한 중독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동네에는 유명한 비빔국수와 칼국수 집이 한 군데씩 있다. 그 비빔국수나 칼국수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에 가까운 맛이라 종종 찾아가서 먹기도 하고, 나 혼자일 경우엔 비빔국수를 포장해 와서 먹기도 한다. 외식하러 나가기 어려울 경우나 농장에서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다가 식사를 하는 때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서 먹곤 하지만, 평소엔 15분 정도 직접 차를 몰고 중국집을 찾아가서 자장면이나 짬뽕, 그리고 탕수육 같은 요리를 먹는다. 다행히 식구들도 모두 중국 음식을 즐기는 편이라 메뉴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의견이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흔히 잔치국수라 부르는 물 국수 맛집은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이동 시간 삼사십 분 이내의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가 국수 한 그릇 먹기 위해서 두세 시간을 투자할 만큼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은데 말이다.
국수를 삶아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국수사리는 어느 곳이나 별반 다르지 않지만, 국수사리를 말아먹는 멸치육수는 식당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국수를 파는 대다수의 식당에서 정성 들여 육수를 우려내지 않고, 편리하게 분말 육수를 사다가 물에 넣고 끓여서 국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 국물에다 제아무리 잘 삶아낸 면발과 갖가지 고명을 풀어 넣은들 무슨 깊은 맛이 나겠는가.
하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국수를 사 먹으면서 국물에 대한 불만을 말할 계제도 아닌지라, 생각하다 못해 급기야 내가 스스로 육수를 끓여서 물 국수를 만들어 먹게 된 것이다. 한 번 육수를 끓일 때 큰 냄비로 한가득 끓여놓으면 일주일 정도는 쓸 수 있다. 잔치국수 국물을 하고 남은 육수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찌개나 국을 끓일 때나 수제비 같은 밀가루 음식을 만들 때마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 아내도 내가 육수 끓이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는다.
내가 언제부터 국수를 즐겨 먹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끔 우동이나 잔치국수를 먹었던 일은 확실히 생각난다. 당시 시내 외곽에 속했던 우리 동네에 중국집은 한 군데도 없어서 그랬는지 그때까지 자장면을 사 먹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밖에서 정신없이 놀다가 식사 때를 놓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밥이 없을 때나 부모님이 나들이 나가면서 밥값을 손에 쥐여줬을 땐 항상 밥 대신 우동이나 잔치국수를 사 먹었으니, 그때부터 면류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뜻밖의 용돈이 생겼을 때 친구들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국수를 함께 먹었던 일도 있었다.
라면은 중학교 때 처음 먹기 시작해서 청년 시절 내내 셀 수 없이 많이 먹었다. 라면은 값도 저렴한 데다 집에서도 쉽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고,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곱슬곱슬한 면발의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얼근하고 구수한 화학조미료의 국물맛이 내 젊은 시절의 구미를 충족 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군 복무 시절에는 라면을 무던히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일요일 점심 급식으로 라면이 나왔지만, 그것으론 부족해서 기회만 있으면 라면을 구해다가 간식이나 술안주로 끓여 먹곤 했다.
한동안 그렇게 많이 먹었던 라면을 점점 멀리하고, 그 대신 국수나 자장면, 짬뽕, 칼국수를 먹게 된 것은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나서부터였다. 그 나이가 되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거나 입맛이 변했거나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인스턴트 식품을 기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고, 그 많은 면류 중에서도 국수를 가장 자주 먹는다. 국수는 각종 면류 중에서도 면발이 가는 편에 속한다. 면발의 길이도 적당해서 한 젓가락 집으면 그대로 후루룩 다 빨아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뜨거운 육수에 순하고 부드러운 면이 사르르 풀어져 있는 잔치국수를 한 그릇 앞에 놓고 앉으면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마음도 편해진다. 밀가루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국수 그 자체의 미각을 즐기는 가운데 나도 모르는 새 그것이 환기하는 아련한 정서에 젖어 들곤 해서 그럴 게다. 가늘고 하얀 면발과 진한 멸치 육수에서 연상되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 이제는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향과 그곳에서 뛰놀았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 정서의 배경에 짙게 깔려 있다.
지금처럼 면 종류 음식이 다양하고 풍부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매일 먹는 밥보다도 모처럼 만에 한 번 먹는 국수를 나는 더 좋아했다. 당시 잔치국수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했지만, 그것은 알갱이 그대로 숟가락으로 떠먹는 쌀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곤 했다. 밀알을 분쇄해서 만든 밀가루가 하얀 면발로 재탄생해서 오는 긴 과정을 한 번 더 거쳤고,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기다란 면의 형태로 변모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릇에 소복이 담긴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 올릴 때면, 나도 모르게 귀하고 경건한 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되곤 했다.
십여 년 전 TV에서 방영한 ‘누들로드’를 흥미롭게 보았거니와, 아득히 먼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치고 중국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온 국수의 근원을 생각해 보고,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의 국수를 만들어 온 인간의 지혜와 노력에 새삼 감탄하면서, 나 역시 나름대로 긴 과정을 거쳐서 직접 조리한 국수를 먹는다. 우리 식구들은 내가 왜 값비싼 스파게티나 쌀국수보다 잔치국수를 더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한 해에 40번쯤은 육수를 끓이고 국수를 만드는 ― 국수에 대한 내 사랑은 앞으로 시간이 좀 더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첫댓글 나도 10대에는 수제비, 국수 등 밀가를 음식을 좋아 했는데 언젠가부터 싫어지더군요.
라면이나 빵은 요즘도 옆에 두고 먹는데 좋아서라기보다는 체중을 원상회복시키기 위해서 사료로 먹는 셈이죠.
국수여도 그 정도 정성을 들인 육수면 먹어 볼만도 하네요~
술을 즐겨하시는 분이나 위장의 기능이 약해지면 밀가루 음식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 드시면서 건강을 챙기세요.
직접 우려낸 육수맛이 궁금하네요.
저는 국수 보다 수제비 ㅎ
작은 국숫집 하나 차릴만한 정도라는데... 보여줄 방법이 없네요 ~ ㅎㅎ
저도 국수 좋아하는데~
갑자기 국수가 먹고 싶습니다.
퇴근하면서 한 그릇 먹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참~! 육수 내는데 무가 빠진 거 같아요. 울 마눌에 따르면 무를 넣어 우려야 감칠맛이 더한다고 하는데~ 한번 실험해 보시어요~ㅎ
오뎅탕 육수에는 무를 꼭 넣었는데 국수 육수에는 안 넣었습니다. 다음에는 꼭 넣어보고 맛의 차이를 느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여수의 우리 집은 '고고차이나'라고 면으로는 방송도 탔으니 '친구'연락만 주고 우리 집으로 오소. 기타 등등 대접할께,,,
7일날 행사에 꼭 갈려 했는데 못가네, 별 볼일 없어도 고향에서 맡아주라 하는 일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네. 자네 혹시 참석하면 내가 작년 11월에 낙점 받았던 '사철가'(수필인데 시로 잘못 나왔더만) 시상을 받아 전해주는 핑계로 언제든 여수로 한 번 오소(개동 선생님도 함께 오시면 우리 만남처럼 더욱 좋으니,,,) 좋고 따뜻한 글 우동의 맛으로도 여수는 대신 할 수 있겠구만^^
한마당 행사 때 만날 줄 알았는데 일 때문에 못 온다니 아쉽군. 상장은 내가 받아서 챙겨뒀다가 나중에 전해 주겠네. 여수는 언제라도 가 보고 싶은 곳인데...... '고고차이나' 음식 맛도 보고 싶고....개동님 만나면 한 번 의논해 보도록 하지.
국수 ㅡ멸치 다시마 홍합 파 ㆍᆢ어묵탕 ㅡ국수 육수에 무와 꽃게 추가
ㆍᆢ짬뽕 ㅡㆍ파 마늘 고추기름을 내고 ,각종야채와 돼지고기 오징어 뽁다가 어묵탕 육수 부으면
ㅡㅡ저의 레시피입니다
짬뽕도 직접 조리해 먹는다면 나름 상당한 수준의 쉐프네요. 이젠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 요리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으니 참 좋아요.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농장 근처에 집을 짓거나 제대로 된 작업실 완성하면 집들이 한 번 할 생각입니다. 삼겹살에다 소주 한 잔 하고, 후식으로 국수도 반드시 곁들여야 하겠죠. ^^
선생님
국수사랑 글 잘 읽었습니다.
밀가루 음식 많이 드시지 마세요.
혈당을 올린답니다.
선생님
제가 아는 국수체인점 있는데 아주 국물이 진하고 맛있어요
알려드릴게요
관심 갖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만남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좋은 국수집 정보도 알려주시면, 시간 나는 데로 방문해서 맛보고 싶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실수로 댓글이 지워졌네요
죄송합니다.
국수 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추위에 감기 조심하세요
산마을풍경님 오랫만입니다. 종종 뵐 수 있길 바랍니다.